시인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고 싶을 때, 이를테면 나무라든가 구름, 당나귀 같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을 때, 그 보여주기의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그냥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는 나무이고 구름이고 당나귀이다. 나무는 말하지 않고 구름은 노래하지 않으며 당나귀는 문자를 쓰지 않는다.
말 없음, 노래 없음, 문자 없음이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전에는 나무였다가 사람이된 사람, 전에는 구름이었다가 사람이 된 사람, 당나귀였다가 사람이 된 사람임을 세상에 보여주자면, 그는 말, 노래, 문자 없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나무, 구름, 당나귀 - 아니, 시인으로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럴 수 없다. 나무는 봄에 잎사귀 내고 가을에 그새 잎 떨구어 나무임을 말하고, 구름은 다시 끌어올리면서 뭉게구름, 실구름, 먹구름의 노래로 구름임을 말하고, 옛날에는 소금 짐 지다가 지금은 아무 짐이나 등짝에 얹히는 대로 지고 다니는 당나귀는 짐 짐으로써 당나귀임을 말한다. 그러나 시인으로 환생한 나무, 구름, 당나귀는 사람 꼴로 살아야 하는 그 꼴값 때문에 잎을 내지도, 비를 뿌리지도, 소금 짐을 지지도 못한다. 그는 말로 소리로 노래하고 문자로 써야 한다. 그는 전에는 나무, 구름,당나귀였다가 사람이 된 사람, 지금은 사람이지만 또 한 바퀴 돌아 필시 소쩍새, 은초롱, 돌고래로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17쪽~18쪽
첫 페이지를 읽는데,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가 '시인은 숲으로 가야만 한다'로 읽힌다. 써지지도 읽어지지도 않는 날들이지만 그래도 쓰는 시늉을 하고, 읽는 시늉을 하니 하루하루 살아는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늉이라도 내 보는 것,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는 걸로. 긍정적으로 살아 보는 걸로.
(이 기시감은 뭐지?라고 생각하니, 며칠 전 단발머리님 페이퍼와 어제 강의...ㅎㅎ, 내가 글치 뭐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