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하러 그런 곳에 가는 거야?"하고 사람들이 물어도, 그저 그것이 나한테 필요해서, 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프랑스 문학을 만났던 젊은 날의 기억을 버리지 못해, 사르트르나 니장이 살던 파리의 카르티에 라탱이라는 곳에 한 번쯤 서보고 싶다, 브위헐, 고야, 고흐,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할 기회를 스스로 허락한 것이다.

 유럽 각지를 석 달에 걸쳐 걸으며 홀린 듯이 미술 작품을 보고 다녔다.

 예컨대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고야의 <검은 그림> 방에서 멍하니 긴 시간을 보냈다. 나도 고야처럼 괴로워하고, 고야처럼 싸우고, 고야처럼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야는 궁정화가였으나 자유주의를 신봉했으며, 나폴레옹군이 그 자유주의를 조국 스페인에 가져다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나폴레옹군의 포악함을 눈앞에서 보면서 <전쟁의 참화> 시리즈를 남몰래 제작했다. '근대'로 가는 입구에 서서 그 명과 암을 지켜 본 그는 스스로 마음이 찢겨 죽었다. 50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쓴 것이었다. 중학생 때처럼 글을 쓰는 것으로 자신을 객관화하고,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나라는 존재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보편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미술이라는 거울에 비춘 나에게 공감해줄 독자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도 있었다. 51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 」의 말미에 적어둔 루쉰의 이 말을 "명량한 언설로 앞길의 광명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하는 잗르의 구령처럼 인용하는" 예가 많다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없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루쉰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이야기한다. 암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카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견인불발의 중국 혁명가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략) 여기서 희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짙은 어둠과, 어둠 그 자체에 의해 필연적으로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한 실천적 희망과의 살아 있는 교착, 교체를 '문학적'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나카노 시게하루는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 부른다.

 

 거기에 거의 서정시 형태로 된 그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 있었다. (중략) 루쉰의 문학이 문학으로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러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에 있다.

 

 시란 무엇인가?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는 태도가 아니다. 효율이라든가 유효성이라든가 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이 길을 걸으면 빨리 목적지에 닿을 테니 이 길을 간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의 유무나 유효성, 효율성 같은 원리들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언어이며 그것이 서정시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절망'을 말할 때도, "이런 짓을 해봤자 아무런 희망도 없어, 절망이라고"하는 것과, 루쉰이 말하는 '절망'과는 같은 단어이지만 쓰임새가 전혀 다르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말에서 절망밖에 읽을 수 없건만,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느낀다고 말한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것 이상으로 (중략) 일신의 이해, 이기라는 것을 떨쳐 버리고, 압박이나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곳으로 간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을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루쉰이라는 중국의 시인을 만나, 한 사람의 일본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가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 동아시아 근대사 속의 만남이 지닌 실낱같은 가능성이 엿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 사회에 나카노가 루쉰으로부터 배운 것을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이가 존재할까? 큰 의문이다. 전후 한 시기에 보였던 그런 '가느다란 가능성'은 이제 소멸의 낭떠러지에 있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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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14 14:49   좋아요 0 | URL
저도 <시의 힘>은 따로 페이퍼를 만들어야하나 고민중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받아 적었더니 a4지 열 장도 넘더라구요. 이웃분들께 스크롤의 폭력을 행하는건 아닌지 걱정되더라구요^^

2016-02-14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6-02-14 17:50   좋아요 0 | URL
쑥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