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를 찾아라
배혜경 지음 / 수필세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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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떠나있던 알라딘 마을을 다시 기웃 거릴 때였다. 어떤 글을 읽고 어, 이 분. 내가 아는 그 분이 아닌가. 했더니 역시 그 분이었다. 그녀는 배혜경에서 프레이야가 되어 있었다. 이름을 가리고도 분별이 되는 무엇. 그녀의 글에는 색깔이 있다. 향기라고 해도 좋고 리듬이라고 해도 좋을 독특함은 그녀가 가진 고유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고 글을 쓰는 사람도 많지만 저만의 고유함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행위하는 주체가 분명한데도 주체의 개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창작하는 사람들의 고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이미 어떤 경지를 이루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그녀는 일상을 단단히 직조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런 일상에서 꾸준히 우물물을 퍼내듯이 글을 써왔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기꺼이 맡기도 하고 누가 뭐래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꼼꼼히 하기도 하면서 주어진 일에는 책임을 다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중국인 거리>가 생각났다. 오정희 선생님은 일과 생활을 잘 병행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중국인 거리>에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잘 닦은 툇마루의 감성이 있다. 오래 먼지를 쌓아두다가 어느 날 하루 맘 먹고 북북 닦아 봐야 나올 수 없는 그런 반짝임. 헌신과 꾸준함의 나날들이 반짝이는 툇마루에는 쌓여있다. 울툭불툭 변덕 부리지 않고 자기 앞의 생을 꾸준히 고르게 살아 온 사람의 단정함.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쪽지고 하얀 모시저고리 입고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아서라. 그녀는 뜨거운 여자다.

 

이 책은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와 2부는 유년의 기억과 성장과정 그녀가 살아 온 이야기들, 에피소드에 이어지는 심상들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위대함은 누추한 삶을 구원해 줄 청모 입은 손님을 기다리며 살아 봄 직한 삶을 이어가는 데 있다. 자만과 자책으로 착각과 권태가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하수구의 비누거품처럼 싸구려 욕망이 들끓을 때면 청포도 한 알 한 알을 굴려서 깨물어 볼 일이다. 우리의 시절,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에. 45

 

 뒤집어 볼 일이다. 잘 유지되는 좋은 관계는 정말 하고 싶은 속내를 얘기하지 않는 경우에 많다고 한다. 사실과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게 과연 옳을까. 처음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며 살면 과연 더 좋을까. 송어가 노니는 물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수면 아래가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솔직하지 못하다. 가면을 건네주면 그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75

 

얼마 전의 일이다. 솔직하려고 하다가 동티가 난 일이 있었다. 나는 잘 덮어두는 걸 좋아한다. 시간이 흐르면 그냥 내 입으로 다 털어 놓는 일이 다반사지만, 일단은 덮는다. 그래서 남들이 의뭉스럽다고 말할 지도 모를 비밀을 지니고 사는 편이다. 가족에게조차 사생활이 중요해서 남편이 모르는 절친도 많다. 다 까발리고 나면 허전해서 살 수가 없다. 남들에게 솔직함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솔직한 사람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좀 모른척하고 사는 일이 아름답다 여긴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대체, 그렇게 다 표현하고 사는 사람이 말하지 않는 비밀은 뭐래?...흠, 암튼, 누군가 나에게 솔직하라고 하면 폭력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솔직은 나의 문제다. 상대가 요구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런 나의 격한 감정을 이렇게 순연하게 표현해주었다.

 '송어가 노니는 물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수면 아래가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3부는 짧고 긴 기행의 흔적이 소담히 담겨있다.

 

눅눅했던 운동화가 보송보송해져 있다. 발바닥으로 온후한 태양의 온기가 퍼진다. 잰걸음으로 선착장을 향하는 오후 두 시의 태양은 뜨겁고 다른 섬으로 향하는 내 가슴은 오히려 서늘하다. 무형의 바람이 가슴에 한동안은 불어 댈 테고 마음을 좀 더 열어 두라고 귀엣말할 것이다. 동서남북 전 방향의 출발점, 섬은 소유를 사양하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 무량하다. 113

 

꽃이 지듯 매미 소리가 지듯 시간도 진다. 매달려도 부질없는 일이다. 지는 꽃송이에서는 사랑이 송가가, 지는 매미 소리에서는 생명력의 찬가가 들린다. 124

 

나무는 혼자 서서 시간의 무게를 견딘다. 사람은 홀로 서기에는 너무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습성에 젖어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우리 이 나무에 목을 매달까?"

고고를 디디가 만류하고 그들은 다시 기다림을 선택한다. 나무에 목을 매다는 대신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돌보는 편을 택한다. 그것이 무기수의 생을 견딜만한 놀이로 바꾼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 간다.

 기다림은 그리움의 다른 말, 미련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그 환상 마저 불가하면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심장이 뛰는 한 기다리겠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좋겠지요. 내일은 꼭 그가 온다고 하니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있을까 해요." 138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여행을 해도 될만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만한 가치로 표현하고 글로 그 아름다움을 나누는 사람은 여행에게도 사람에게도 가치를 더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한답시고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좋다. 죽인다. 술 가져와라. 이런 말만 남발하는 나님을 반성하게 하는 이 깊이!)

 

4부와 5부는 영화와 연극 감상기, 문학관 기행기다. 5부는 여느 다른 에세이집에서 볼 수 없는 특화된 꼭지다. 최명희 문학관, 요산 김정한 문학관, 이병주 문학관을 다녀와서 그녀가 성심을 다해 쓴 글들인데, 문학관이라 하면 떠오르는 어쩔 수 없는 진부한 감상들을 깨는 반전이 있다. 문학관 하면, 내가 가진 이미지는 잊혀지고 죽어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공간을 가보고 싶은 곳으로 바꿔 놓았다. 그 사람을 알고 사랑하고 공감하려한 그 다감함에 다시 한 번 그 작가에 대해 그 작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탐방기 정도에도 그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나는 보랏빛 우체부가 되고 싶다

 기산여고 3학년 때 전국문예콩쿠르에서 장원으로 당선 된 수필 <우체부>의 결문이다. 여고생 특유의 몽상가적 문장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최명희는 우체부가 주는 "흐뭇하고 서민적인 평화를 좋아한다"고 썼다.188

 

전시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작은 나무책상이 창가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그 위에 명함과 메모지가 방금 누군가의 손이 닿은 것처럼 놓여 있다. 가운데에는 꼼꼼히 기록하여 만들어 둔 단어장들이 누렇게 빛바랜 색을 하고 열람되어 있다. 작품 속에 낱낱이 드러나는 향토색 짙은 단어와 생생한 현실의 언어는 이런 꼼꼼한 습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204

 

그녀의 글은 전체적으로 깔끔하다.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건, 하나의 풍경을 보더라도 그녀는 다각적인 사유를 한다. 그런 겹을 깔끔한 문장에 다 담아내려는 그녀의 열정은 처음 한 두 편에서 좀 어색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논리적이고 명징하기만 문장을 구사하기에 그녀는 너무 예술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다음 책에선 그런 감성이 좀 더 산만하게^^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세상에 생산되어지는 모든 것은 궁극의 쓰레기다. 박경리처럼 박완서처럼 쓸 것 아니면 글을 써서 세상에 내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태어난 거야 할 수 없지만 가능하면 지구한테 죄 짓지 말고 조용히 덜 남기고 가자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쓰레기를 생산해낸 것일진대, 나는 지금 쓰레기 앞에서 숙연하다. 그녀의 책이 나오고 내가 그 글을 읽고 그녀가 누군지 알겠고, 또는 모르겠고, 여기서 거기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다니 공감하고 찡하다. 어떤 한 문장에서 맺힌 게 풀어지고, 그냥 좀 더 살아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좀 위로가 필요했다. 이런 내 마음을 떼어가고 또 보태주는 책이 있어 다행이다.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음..다시 읽어 보니 내가 그녀와 백만년전쯤부터 알고 있고, 백 번쯤 만난 친구라고 오해할 만한 글이다. 나는 그녀와 서재지인이고, 한 달여 전 야나문에서 있었던 소심한 출판기념회에서 딱 두어 시간 얼굴을 마주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뻥은 아니다. 나름 직관과 토..통...찰..력..을 동원..해 썼을 뿐....   (..  ). 그렇다. 그녀와 나는 책으로 오래 오래 만났다. 백 번쯤이라고 해도 비밀이나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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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4 1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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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2-12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실시간 답글..감사합니다..^^..아 일해야 하는데 알라딘 이웃분들 서재만 돌아다니네요 ㅎㅎㅎㅎ

2016-02-12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6-02-1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좋아요를 백만번은 누르고 싶은 리뷰에요.^^

2016-02-12 17:05   좋아요 0 | URL
군더더기란 표현 적확하지 않아 수정하고픈데 집이 아니라. 난감. 제 뜻은 전달 된거죠? 어휘를 넘어선 ㅋㅋ

꿈꾸는섬 2016-02-12 17:08   좋아요 0 | URL
깊은 사유..풍성한 나무..충분히 공감가는 이유이긴한데 역시 군더더기는 부정적으로 보이긴 하네요.ㅎ 어떤 단어로 바뀔지 궁금해요.

2016-02-12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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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0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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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1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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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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