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스토리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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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님의 침묵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는 테제는 보편적 자아로서의 과 개별적 자아로서의 들이 상즉상리의 관계하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개별적 자아(석가, 칸트, 장미화, 맛치니)가 자신의 님’(중생, 철학, 봄비, 이태리)을 간직하고 기루어 하면 개별적 자아의 님이 보편적 자아의 님과 상즉상리의 관계를 맺게 된다고 본 것이다.

한용운은 우리 사회가 상즉상리의 관계를 깨달을 때 칸트가 정초한 근대 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래의 도덕 문명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믿었다. 이러한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를 깨닫기 위해 요청되는 수행이 참선이었다. 한용운이 생각한 참선은 근대적인 제도로서의 불교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용운이 구상한 선은 종교적 신앙도 아니오, 학술적 연구도 아니며, 고원한 명상도 아니오, 침적(沈寂)한 회심(灰心)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요, 따라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선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동시에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선은 마음을 닦는 즉 정신수양의 대명사다.” 한용운의 이러한 이해는 선외선사상을 낳는다. ‘선외선사상은 선이라는 말을 들어볼 기회조차 없었을” “상치장수가 흥정하는 말 속에도 선적 묘미가 깃들게 할 것을 요청한다. 그때에 비로소 개별적 자아와 보편적 자아의 상즉상리가 마침내 이루어지고 야만적 문명미래의 도덕 문명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는 것이 한용운의 선외선사상의 요체였다.

 

. 나가며

 

특정 분야의 범용한 지식인을 양산하는 근대 이행기를 살았던 한용운의 위대함은 시인, 선사, 정치가의 일체화를 이룬 데 있다. 이는 근대를 체험한 보통사람의 위대함이다.

선사이면서 시인, 정치가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던 선학원 시절의 산물인 한용운의 님의 침묵희박한 언표로서 당대의 담론, 언표들과 넓고도 깊은 상호작용을 수행했다. 이것을 문학의 자율성에 가둘 수도 없고, ‘일본-중국-조선의 일직선적인 사상연쇄로 제한할 수도 없다. 또한 이것은 전통으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지도 않다.

한용운은 량치차오를 통해 칸트를 접하지만 량치차오와 칸트의 한계 즉 개별적 자아와 보편적 자아의 분리를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로 넘어서며, 이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선사로서 당대의 중생에게 선외선사상을 제시한다.

희박한 언표님의 침묵선외선사상과 당대의 자유연애 담론의 상호작용의 양태의 각도에서 읽힐 때 그것은 지금, 여기의 한국적 근대문명을 사유할 수 있도록 곁을 내어 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번 논문에서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님의 침묵수록시인 자유정조를 근거로 전통적인 반려애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를 한용운의 문학활동의 주요 주제로 규명하려 한 일련의 문화사적인 연구 관점을 상대화시킬 수 있었다. 추후의 연구 과제로 기존의 문화사 연구 성과가 한용운의 선외선사상과 어떤 상호작용의 양태를 낳을지 탐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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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의 수록시인 복종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과 상당히 유사한 사유구조를 보여주고 있어서 작가의 말과 시편 사이에서 애매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시는 근대 서정시론의 교의를 어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말들은 심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술의 차원에서 쓰여 있다. 여기서 사물이나 화자의 생각이 심상화 된 부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전문이 줄글로 되어 있다. 우리 시의 속성으로 하여 요운이나 각운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물론, 다른 율격상의 장치에 대한 배려의 자취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산문시는 의미론 혹은 심리학의 영역을 열어놓는다. 한용운의 산문시는 시와 사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효과를 산출한 효시로서 한국 문학사를 풍성하게 해왔다.

이번 장에서는 먼저 자유연애 담론과 님의 침묵의 여러 시들의 관계를 재검토하겠다. 한 논자는 한용운의 자유연애 관련 시편들에서 사랑하는 대상의 정서적 승인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님이 침묵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시적 화자가 보이는 사랑은 일종의 맹목적인 집착의 면모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의미심장한 지적을 하였다. 이것은 한용운의 시가 근대적인 개인의 상호적인 계약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연애의 이상보다는 전통적인 반려애와 유사하다는 비판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문화사적인 접근은 님의 침묵의 수록시 자유정조를 초점화하고 있지만 복종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와 같은 싯구 역시 일종의 맹목적인 집착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장에서는 선외선사상과 님의 침묵의 관계를 새롭게 해명하여 근래의 문화사적 접근을 재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겠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 복종은 자유연애 담론을 다분히 연상시키고 있는바 한용운의 문학활동은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문화사적인 접근을 역방향에서 대면할 수 있는 시 텍스트이다.

앞장에서 검토했듯이 한용운은 량치차오를 매개로 하여 서양 근대 사상을 주체적으로 전유하였다. 복종에 나타나는 자유와 복종의 관계는 량치차오의 신민설에서 복종이 자유의 어머니라는 테제와 상호작용한다. 량치차오는 공덕과 사덕을 나누어 공덕 편의 한 항목으로 자유를 다루고 있다. “아아! 오늘날의 청년은 누구나 시끄럽게 자유를 떠들어댄다.” “참된 자유는 반드시 복종할 줄 안다. 복종이란 무엇인가? 법률에 복종하는 것이다. 법률이란 내가 제정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보호하고 또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량치차오에게서 참된 자유는 내가 제정한 법률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때 량치차오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 가 있다. 하나는 중생과 상대한 나로, 인간 세상에 서 있는 칠척의 [육체적] 존재이다. 또 하나는 그 칠척의 존재와 상대하고 있는 나로, 그 영대에 존재하는 밝디밝은 한점 [마음]이다.” 량치차오에게 육체적 존재로서의 나는 법률에 복종한다는 점에서 자유가 없지만 육체적 존재와 상대하는 마음은 자유로우며 마음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여 육체가 법률에 복종하게끔 한다고 할 수 있다. 량치차오는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의 논리를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방향에서 전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덕의 한 항목인 자유와 복종, 법률 등의 관계는 한용운의 시 복종에서 상응한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야요는 싯구는 량치차오의 아아! 오늘날의 청년은 누구나 시끄럽게 자유를 떠들어댄다.” “복종이 자유의 어머니등의 주장과 상동성을 갖는다. 다만 복종은 구체적으로 당신을 법률이라고 부르지 않고 있으므로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문제로 남는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량치차오가 국가주의에 빠져든 것과 달리 량치차오를 적극 수용한 한용운은 불교 사상을 통해 다른 길을 열어 놓는다. 복종당신이 량치차오의 법률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는 테제를 통해 재확인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군말(부분)

 

님의 침묵의 수록시인 복종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과 상당히 비슷한 사유구조를 보여준다. 사용하는 어휘로 아름다운 자유”(복종)이름좋은 자유”(군말)는 그 용례가 일치한다. 복종당신군말과의 대비를 통해서 중생, 철학, 봄비, 이태리로 확산된다. 량치차오와 칸트 사이에서 단독성을 얻는 자유와 복종의 아이러니는 한용운의 시에 요구할 사상성의 중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진여(眞如)가 일체 중생이 보편적으로 지닌 본체요, 각자가 제각기 한 진여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했고, 칸트는 사람이 다 한 진정한 자아(自我)를 가지고 있다 했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다. (...) 양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에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한 개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처님의 철리(哲理)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부처님이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되어 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면서 기실은 하나인데, 누구는 부처가 되고 누구는 중생이 되겠는가. 이는 소위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다만 공중의 꽃이나 제 이()의 달과도 같아 기실 무의미할 뿐이다.”

 

위의 인용에는 빠뜨렸지만 칸트는 성리학에 비해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을 명료하게 한 것으로 높게 평가된다. 하지만 칸트의 진정한 자아는 개별적으로 있는 데 반해 량치차오가 이해한 부처님의 진여는 보편적으로 있다는 점에서는 칸트가 저평가된다. 한용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와 량치차오의 진정한 자아관을 넘어서게 된다. 한용운에 따르면 부처님은 보편적 자아와 개별적 자아 어느 한쪽 편에 한계지어지지 않고 그 둘을 상즉상리의 관계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이며 부처와 중생 사이에 구분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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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용운 연구는 민족주의에 인식이 제한되어 한용운의 진보의 사상이 갖는 구체성을 다각도로 논의하지 못했다. 한편 근래에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주의 비판 흐름은 한용운의 불교 사상의 외부 영향 특히 일본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를 철학적이며 동시에 종교적 성질을 가진, 따라서 철학적 종교로 규정하는 것은 엔료의 영향을 반영한다는 지적을 비롯해서 한용운의 문명 인식은 메이지 일본의 근대지가 (...) 착종된 형태라는 비판과 신화적인 이미지”, “과대평가를 재점검하자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장에서는 한용운의 진보 사상이 민족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보편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일본 메이지 사상의 일방적 수용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

조명제는 한용운은 유신론에서 미개(야만)-문명이라는 시각에 입각한 서구 근대의 문명론을 수용하였으며, 거의 전편에 걸쳐 문명론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한용운이 일본 메이지기 사상으로부터 연원한 사상의 연쇄에 의해 착종된 사고에 빠졌다는 주장의 한 예시이다.

조명제는 서양 말에 공법 천 마디가 대포 일문만 못하다는 말이 량치차오가 1899년에 발표한 자유서의 문야삼계지별에서 온 것이라는 점, 그것은 또한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개략 2장 서두에서 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문명-미개(야만)이라는 문명론의 도식과 언설은 후쿠자와 유키치-량치차오-한용운으로 이어진 사상연쇄의 전형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용운은 이러한 문명론을 오히려 야만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한용운의 진술 맥락은 아래와 같다.

 

서양 말에 공법 천 마디가 대포 일문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이런 것은, 굳이 말한다면 야만적 문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니, 적어도 도덕과 종교에 입각해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찬양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 한용운은 서양의 문명론을 야만적 문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한용운의 인식이 야만적인 서구의 문명론을 제대로 거부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거나, 그 때문에 곧잘 전통으로의 회귀에 빠진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선이는 한용운이 야만적 문명을 목도하면서도 문명이 더욱 진보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불교=근대라는 등식을 전제로 삼은 한용운이 근대를 비판할 자리를 스스로 제거한 데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또 다른 지면에서량치차오가 도덕주의를 구현할 방안으로 강고한 국가주의를 설정했다면 한용운은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도덕과 종교를 최종 심급으로 상정했다.”고도 진술하는데 이런 주장을 종합하면 근대=불교=도덕이 모두 현재의 지평면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했듯이 한용운은 오히려 근대=야만적 문명이라는 등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을 미래의 도덕 문명으로 전환시키는 실천에 불교가 참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아래의 인용을 보자.

 

다만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때에야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줄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착실하게 할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현재=서구적 근대=야만에서 미래=도덕 문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한용운의 입론이며 이를 위한 실천으로 불교(참선)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앞에서 일견한바 불교=근대이기 때문에 근대를 비판할 수 없었다는 입론과는 차이가 크다. 한용운은 내가 믿는 불교에서 그러면 불교의 사업은 무엇인가. 가론 박애요 호제입니다. 유정무정, 만유를 모두 동등으로 박애·호제하자는 것입니다. 유독 사람에게 한할 것이 아니라 일체의 물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제국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이 실세력을 갖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박애, 이러한 호제를 말하는 것은 너무 우원한 말이라 할지 모르나 이 진리는 진리이외다. 진리인 이상 이것은 반드시 사실로 현현될 것이외다.”

사상 연쇄론은 일본, 중국, 한국의 사상을 단선적으로 그리고 시간순으로 실체화하지만 이와 달리 한용운은 식민주의의 현실적인 동시대인으로서 다양한 가능성들을 복합적이고 능동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주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 중요한 사례로서 일본으로부터 연원하지 않는 사상 연쇄의 역동성의 예로 벤자민 키드(Benjamin kidd, 1858~1916)의 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벤자민 키드는 당대 일본에서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콩트가 최초로 윤곽을 잡고 다윈이 정련한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당대 최고의 논리적 형식을 획득한 벤자민 키드의 사상을 량치차오는 1901~1903년경에 서구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 점검이라는 큰 기획 아래 주목한 것으로 보이며 진화론혁명자 키드의 학설19021016신민18호에 발표하고 음빙실문집에도 수록하였다. 한용운이 음빙실문집을 탐독한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벤자민 키드는 인간의 진보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힘이 초이성적인 것, 즉 종교에 있다는 논의를 펼침으로써 사회진화론을 계몽주의의 자장 바깥으로 끌어냈다고 한다. 키드는 스펜서류의 진화론에 대항하여 인간사회의 진보는 초이성적인 요소 특히 종교적 힘에 의해 추동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반이성주의적 진화론은 1890년대 다위니즘과 종교와의 화해라는 세기말적 현상에 부응한 것으로 이후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 등 직관주의 철학의 전조였다. 키드는 다윈의 경쟁과 선택의 원리를 적용하되 그 중심부에 종교적 요소를 배치했다.

한용운의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것이라는 도덕주의는 세기말 제국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이 실세력을 갖고 있는 시대에 너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라는 칸트적 계몽주의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키드와 공유하였다. 키드의 종교진화론현재적 이기심이 근대 문명의 진보를 제한하고 있으므로 종교를 발전시킨 문명이 근대 이후의 문명 진보에 더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한용운의 사상은 일본-중국-한국으로 이어지는 사상 연쇄착종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교정될 필요가 있으며, 한용운의 불교개혁 운동은 불교에 한정된 개혁운동이 아니라 불교를 통한 문명진보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정된 도덕주의는 단순히 전통 회귀로 볼 수 없다. 다음 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한용운의 시와 선외선사상이 희박한 언표로서 상호작용하는 양태를 짚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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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여 소설 죽음을 다시 검토해 보자.

소설 죽음에서 정성열은 여자의 정조는 반드시 최초의 정식혼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가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든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변치만 않으면 그것이 정조입니다. 그뿐 아니라 철학적으로 본다면 편협한 정조라는 것은 문제입니다.”라고 자유연애 사상을 제시한다. 이는 1930년대에 정조가 취미라는 나혜석의 주장을 선취한다. 이에 대해 주인공 최영옥이 그것은 여자를 인격으로 보지 않고 기계로 보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지금까지 문화사 연구는 이에 대해 자유연애론에 대한 전근대적인 거부의 혐의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 볼 때 최영옥의 답변은 자유연애 담론이 인간성 정식을 취하지 않고 자기애의 원리를 선택할 때 여성을 도덕법칙을 최상준칙으로 삼은 인격이 아니라 자기애의 원리에 속박된 기계로 만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용운의 삶과 사상의 일관된 근대지향성으로 볼 때 자유정조는 전근대적 반려애가 아니라 칸트의 인간성 정식에 근거를 둔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한 것이다.

소설 죽음에서 최영옥이 인격기계를 대립시키는 것은 선의지를 따르는 초월(반성)적 자아와 자기애의 원리를 따르는 현상적 자아의 대립을 형상화하는 표현이었다. 그것이 님의 침묵에서 시적인 표현을 얻을 때 초월적 자아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정조자유정조로 나아가는 시 자유정조가 탄생한 것이다. 현상적 자아가 스스로를 초월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 님을 기다리면서/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는 싯구는 이후 자기애의 원리를 거부하며 초월적 자아로서 존재 역량을 길러낸 한용운의 중핵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5장 결론

한용운의 시는 문학의 자율성의 원리에 따라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근래의 문화사 연구는 근대성의 원리에 근거해 연애의 시대에 나온 기성세대의 반명제로 가치화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화사 연구의 비판적 접근에 대한 반론은 식민주의의 현실적인 동시대인”(디페시 차크라바르티)으로서 가다듬어온 한용운의 사상적 실천 속에 이미 기입되어 있었으며 이는 시 인과율, 자유정조등에서 텍스트화된다.

이번 연구는 근대인 한용운이 칸트-량치차오의 근대적 모색을 경유하여 그것의 한계 극복을 당시 주류적이던 사랑의 문화표상과의 충돌 속에서 형상화해냈음을 문화사 연구의 직접적인 비판을 받고 있는 두 편의 시 인과율, 자유정조를 모델로 하여 제시하였다. 앞으로 이번 연구를 발판으로 하여 님의 침묵시집 전반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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