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의 수록시인 복종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과 상당히 유사한 사유구조를 보여주고 있어서 작가의 말과 시편 사이에서 애매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시는 근대 서정시론의 교의를 어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말들은 심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술의 차원에서 쓰여 있다. 여기서 사물이나 화자의 생각이 심상화 된 부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전문이 줄글로 되어 있다. 우리 시의 속성으로 하여 요운이나 각운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물론, 다른 율격상의 장치에 대한 배려의 자취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산문시는 의미론 혹은 심리학의 영역을 열어놓는다. 한용운의 산문시는 시와 사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효과를 산출한 효시로서 한국 문학사를 풍성하게 해왔다.

이번 장에서는 먼저 자유연애 담론과 님의 침묵의 여러 시들의 관계를 재검토하겠다. 한 논자는 한용운의 자유연애 관련 시편들에서 사랑하는 대상의 정서적 승인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님이 침묵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시적 화자가 보이는 사랑은 일종의 맹목적인 집착의 면모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의미심장한 지적을 하였다. 이것은 한용운의 시가 근대적인 개인의 상호적인 계약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연애의 이상보다는 전통적인 반려애와 유사하다는 비판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문화사적인 접근은 님의 침묵의 수록시 자유정조를 초점화하고 있지만 복종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와 같은 싯구 역시 일종의 맹목적인 집착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장에서는 선외선사상과 님의 침묵의 관계를 새롭게 해명하여 근래의 문화사적 접근을 재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겠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 복종은 자유연애 담론을 다분히 연상시키고 있는바 한용운의 문학활동은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문화사적인 접근을 역방향에서 대면할 수 있는 시 텍스트이다.

앞장에서 검토했듯이 한용운은 량치차오를 매개로 하여 서양 근대 사상을 주체적으로 전유하였다. 복종에 나타나는 자유와 복종의 관계는 량치차오의 신민설에서 복종이 자유의 어머니라는 테제와 상호작용한다. 량치차오는 공덕과 사덕을 나누어 공덕 편의 한 항목으로 자유를 다루고 있다. “아아! 오늘날의 청년은 누구나 시끄럽게 자유를 떠들어댄다.” “참된 자유는 반드시 복종할 줄 안다. 복종이란 무엇인가? 법률에 복종하는 것이다. 법률이란 내가 제정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보호하고 또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량치차오에게서 참된 자유는 내가 제정한 법률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때 량치차오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 가 있다. 하나는 중생과 상대한 나로, 인간 세상에 서 있는 칠척의 [육체적] 존재이다. 또 하나는 그 칠척의 존재와 상대하고 있는 나로, 그 영대에 존재하는 밝디밝은 한점 [마음]이다.” 량치차오에게 육체적 존재로서의 나는 법률에 복종한다는 점에서 자유가 없지만 육체적 존재와 상대하는 마음은 자유로우며 마음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여 육체가 법률에 복종하게끔 한다고 할 수 있다. 량치차오는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의 논리를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방향에서 전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덕의 한 항목인 자유와 복종, 법률 등의 관계는 한용운의 시 복종에서 상응한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야요는 싯구는 량치차오의 아아! 오늘날의 청년은 누구나 시끄럽게 자유를 떠들어댄다.” “복종이 자유의 어머니등의 주장과 상동성을 갖는다. 다만 복종은 구체적으로 당신을 법률이라고 부르지 않고 있으므로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문제로 남는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량치차오가 국가주의에 빠져든 것과 달리 량치차오를 적극 수용한 한용운은 불교 사상을 통해 다른 길을 열어 놓는다. 복종당신이 량치차오의 법률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는 테제를 통해 재확인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군말(부분)

 

님의 침묵의 수록시인 복종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과 상당히 비슷한 사유구조를 보여준다. 사용하는 어휘로 아름다운 자유”(복종)이름좋은 자유”(군말)는 그 용례가 일치한다. 복종당신군말과의 대비를 통해서 중생, 철학, 봄비, 이태리로 확산된다. 량치차오와 칸트 사이에서 단독성을 얻는 자유와 복종의 아이러니는 한용운의 시에 요구할 사상성의 중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진여(眞如)가 일체 중생이 보편적으로 지닌 본체요, 각자가 제각기 한 진여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했고, 칸트는 사람이 다 한 진정한 자아(自我)를 가지고 있다 했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다. (...) 양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에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한 개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처님의 철리(哲理)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부처님이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되어 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면서 기실은 하나인데, 누구는 부처가 되고 누구는 중생이 되겠는가. 이는 소위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다만 공중의 꽃이나 제 이()의 달과도 같아 기실 무의미할 뿐이다.”

 

위의 인용에는 빠뜨렸지만 칸트는 성리학에 비해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을 명료하게 한 것으로 높게 평가된다. 하지만 칸트의 진정한 자아는 개별적으로 있는 데 반해 량치차오가 이해한 부처님의 진여는 보편적으로 있다는 점에서는 칸트가 저평가된다. 한용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와 량치차오의 진정한 자아관을 넘어서게 된다. 한용운에 따르면 부처님은 보편적 자아와 개별적 자아 어느 한쪽 편에 한계지어지지 않고 그 둘을 상즉상리의 관계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이며 부처와 중생 사이에 구분은 없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