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번역가 이미도 "여자인줄 아셨죠? 노총각이에요
노트북·녹음기 들고 ‘나홀로 작업’…“뉘앙스 살리고 긴 문장 압축하는 것이 핵심”

부드럽지만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영화 자막 속의 ‘번역 이미도’에서 느껴지는 여성적 이미지가 싹 사라졌다. 많은 이가 여성으로 착각해온 이미도씨는 45세의 중년 남성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실로 사용한다는 서울 역삼동 스타벅스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인터뷰를 거의 안했어요. 번역자는 제2의 창작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뒷전에 물러나 있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미도는 여자다, 번역회사 이름이다 등등 소문이 많았습니다.”

‘블루’를 시작으로 ‘인생은 아름다워’ ‘슈렉’ ‘아메리칸 뷰티’ ‘시카고’ ‘식스센스’ ‘영웅’ 등 숱한 흥행작을 번역해온 이미도씨. 12년째 400여편의 외화 번역을 해온 그가 최근 외도를 시작했다. ‘이미도의 등 푸른 활어영어’(디자인하우스)란 책을 출간, 그토록 갈구해왔던 ‘제1의 창작’을 완성한 것이다. 출간 몇 달 만에 이미 4쇄를 찍을 정도로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어섰다.

미군 통역관인 아버지 첫 영어교사

이미도씨는 참 우직하게 영어를 배웠다. 첫 영어선생님인 아버지는 미군 통역관이자 도서관 사서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스파르타식 영어공부가 시작됐다. 영어 단어 하나를 노트 5∼6장 앞뒤에 빼곡히 적어야 했다. 아버지는 미국 문화를 간접체험할 수 있도록 영화를 보여주거나 영어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직접 읽어주시기도 했다. 이씨는 “지금도 당시 습관이 남아있어서 영어를 소리내어 읽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부모님은 그에게 미국에 가서 살라는 의미로 이름조차 ‘미도(美道)’라고 지었다.

“이민 갈 계획으로 2년간 미국에서 생활했어요. 그때 영화 ‘스탠 바이 미’를 보면서 외화 번역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막연히 생각했죠. 이후 이민계획을 취소하고 공군 영어교육 장교로 복무한 후 미국 영화를 국내 수입사에 소개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번역을 제의받아 얼떨결에 시작하게 됐습니다.”

흔히 외화 번역이라면 비디오테이프나 DVD를 보면서 할 것으로 상상하지만 실제 작업은 전혀 딴판이다. 영화사에서는 미개봉 영화의 테이프가 유출될까봐 번역자에게도 테이프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사만 나오는 스크립터(번역용 각본)만 주어질 뿐이다. 영화사 자체 시사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녹음한 뒤 혼자서 달랑 노트북 하나 들고 작업한다. 번역가에게 주어지는 기간은 대략 1주일 정도뿐.

“대사의 맛을 자막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녹음하는 게 꼭 필요합니다. 대사가 얼마나 빠른지, 어디서 잘라줘야 할지 등을 계산해야 하거든요. 화면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글자 수가 16자이기 때문에 영화 번역은 최대한 압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말을 많이 하거나 빨리 하는 배우를 가장 싫어합니다.(웃음)”

힘든 점은 대사에 포함된 그들만의 문화를 우리말로 옮겨야 할 때다. 예를 들어 개그콘서트의 ‘빠져봅시다’와 같은 대사를 만나면 가장 난감하다.

이씨의 작업 스타일은 철저하게 일을 즐기는 주의다. 매일 아침 9시쯤부터 저녁식사 전까지 스타벅스에 앉아 번역을 한다. 퀵서비스도 이곳에서 받을 정도다. 일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게 이곳을 선호하는 이유다. 하루종일 전기를 빌려 쓰고 자리를 차지한 데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최근 100명에게 무료로 음료와 케이크를 제공하는 ‘골든벨’을 울리기도 했다.

이씨가 받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국내에 수입되는 외화의 80%를 모두 독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다”며 이를 해명했다. “한 해 수입되는 영화는 400여편입니다. 이 중 제가 번역하는 영화는 7% 정도인 20∼24편밖에 안됩니다. 초창기에는 왕성하게 했지만 지금은 번역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한 달에 2편만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거든요. 아마 흥행작의 번역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생긴 오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편당 수입을 받는 그의 연봉은 대기업 부장 수준이다. 최근 영화를 좋아하는 젊은층에서 “외화 번역을 하고 싶다”는 문의가 많지만 그는 “스스로 실력을 쌓는 길밖에 없다”고 충고한다. 이 세계야말로 철저히 실력으로 승부하는 완전 경쟁체제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관심이 있다면 직접 영화사 마케팅부서에 번역한 작품을 들고 가서 노크하라”고 말했다.

산 하나를 정복하면 더 높은 산이 보인다고 했던가. 이미 업계에서 최고 수준에 올라섰지만 이미도씨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책을 통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펼치기로 한 것.

조급증 버리고 우직하게 공부하길

“다들 영어를 어렵고 재미없게 생각하니 영어가 두려워집니다. 두려움은 조급증을 유발시켜요. 때문에 대부분 영어공부에 있어서 ‘허리(hurry)병’에 걸려 있습니다. 외국어는 절대 단기간에 승부를 낼 수 없어요. 하루 1시간 영어공부를 하면 한 달이면 24시간, 1년이면 고작 12일을 미국에서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책에 솔깃하고, 저런 책에 솔깃하기를 반복하는 것보다 우직한 방법으로 영어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씨는 10년, 20년 장기계획을 세워 재미있는 방법으로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권하는 방법은 영화와 독서다. “영화는 일단 재밌습니다. 식당ㆍ공공기관 등 다양한 장소에서, 애인ㆍ직장ㆍ가족 등 다양한 관계에서 할 수 있는 대화와 그들의 문화를 접할 수도 있습니다. 또 사전 속에 나오는 영어가 아니라 100%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영화에 나옵니다. 최고의 교재죠.”

이씨는 일단 영화를 본 후 대형서점이나 아마존닷컴(www.amazon.com)에서 그 소설이나 시나리오, 포켓북으로 된 영상소설 등을 구입해 읽을 것을 충고했다. 영화의 내용을 다 알기 때문에 이해가 쉽고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 다음 ‘중요한 문장이나 단어를 외우면서 꼼꼼히 심화학습할 것→영화 DVD를 구해 영어자막을 띄워서 볼 것→마지막으로 자막을 없애놓고 볼 것’을 제안했다.

이미도씨는 초급이라면 ‘터미널’ ‘아이 엠 샘’ ‘스탠 바이 미’, 중급이라면 ‘식스 센스’ ‘포레스트 검프’ ‘쉘 위 댄스’ ‘레인 맨’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고급이라면 ‘아메리칸 뷰티’ ‘굿 윌 헌팅’ ‘잉글리시 페이션트’ 등을 권했다.

영화 ‘연인’에서 장쯔이가 3년간 사랑한 류더화(유덕화)보다 3일 사랑한 진청우(금성무)를 선택했듯, 외화 번역보다 책 저술에 마음을 빼앗긴 이씨. 왕성한 집필력으로 올 하반기에 또 하나의 책을 펴낼 예정이다.

사진촬영을 위해 이미도씨의 집을 찾았다. 노총각인 그의 오피스텔은 마치 쓰레기장 같았다. “신발 신고 들어오세요”라고 했던 그의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2000년 이곳으로 이사온 후 치우지 않다보니 5년간 짐이 쌓였다고 한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동전만 합쳐도 100만원은 족히 넘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그는 전정한 폐인이었다.

박란희 주간조선 기자(r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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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10 17:49   좋아요 0 | URL
저 집에 파출부로 가고 싶습니다. 니르바나님.^^
(동전 주우러......)

니르바나 2005-03-10 18:02   좋아요 0 | URL
영화의 참 매력을 아시는 로드무비님과 외화번역가는 잘 통할 것 같습니다.
한 번 만나셔서 좋은 대화 나누시면 좋은 대담록이 하나 만들어 질 것 같습니다.
이 판의 고수 두사람의 경연이 볼 만 할 것입니다.
'로드무비님과 외화번역가의 한판 겨루기' ㅎㅎ

니르바나 2005-03-10 18:05   좋아요 0 | URL
품격높으신 로드무비님, 물심을 버리시와요.
동전으로 백만원 허리에 짊어지다 큰일 납니다.
파스값만 2백만원 듭니다.
파출부는 참으셔요. 로드무비님

stella.K 2005-03-10 18:20   좋아요 0 | URL
우하하! 니르바나님 로드무비님 좀 말려줘요. 저 사람 장가 아직 안 갔다는데...전 그다지 좋아하는 스탈이 아니네요.^^

니르바나 2005-03-10 18:25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은 어떤 스타일의 남성을 선호하시나요?
분명히 책은 좋아하셔야 할 것만 같구요. 다른 조건은 또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2005-03-10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5-03-10 22:25   좋아요 0 | URL
글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