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홍주희.강정현]

은자(隱者)가 세상으로 나왔다. “글쓰기가 두려워 평생 오디오 저널이나 평론계에 나서지 않았다”는     오디오계의 고수가 묵직한 책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성균관대 건축학과 김영섭(57) 교수. 그의 이름은 ‘오디오쟁이’들 사이에선 이미 전설이다. 음악과 소리에 홀려 40년을 보낸 인물이다. 그의 방에 가득한 환상의 명품 기기로 음악을 들어보는 것은 오디오쟁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꾸었을 꿈이다.

이런 그가 궁극의 소리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오디오의 유산』(한길사, 379쪽, 8만원·사진)을 펴냈다. 각종 오디오 기기를 직접 다뤄보고, 관련 잡지와 전문서적을 500권 이상 뒤지면서 5년간 공들인 결과다. 그는 이 책 출간에 맞춰 ‘빈티지’로 가득한 자신의 오디오 룸을 공개했다.

“오디오를 취미의 영역이라 여겨서 그런지 체계적으로 오디오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 없어요. 40년 넘게 소리를 찾다 보니 물어오는 사람도 많고, 이럴 바에야 ‘내가 한 번 전범을 만들어보자’ 싶어서 책을 냈어요. 평론서에는 부정확한 내용이 더러 보였는데, 이 참에 제가 경험으로 확인한 올바른 정보를 나누는 기회도 되겠다 싶어서요.”

한옥의 지하를 파서 만든 33㎡(10평) 남짓한 공간은 그의 오랜 오디오 편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어른 키보다 큰 스피커와 나팔꽃처럼 활짝 벌어진 축음기, 테이블 위에 놓인 진공관 앰프와 턴테이블로 방 안이 가득 차 있었다. 벽면은 2만 장의 LP와 3000여 장의 CD가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김 교수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으로 소리의 천국을 열었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는 베토벤의 말처럼 쾅쾅 울리는 1악장이 방을 가득 채웠다. 사방을 휘감는 울림이 좋은 건 알겠는데 궁금할 수밖에 없다. ‘비싸고 불편한’ 소리를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연주회장이 아닌 이런 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주 은밀하게 음악가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어요. 예로, 300년의 시간을 넘어 바흐를 만나는 건 저 같은 사람들에겐 우주적인 경험이에요.”

김 교수는 그룹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실황 녹음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음반을 CD플레이어에 잇따라 얹으며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 소리는 이미 1950년 대에 완성됐어요. 그때가 바로 최첨단인 거죠.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당시 활동하던 연주자들, 성악가들은 전쟁과 죽음의 시대를 체험했어요. 그들이 감정을 쏟아낸 그 절절한 노래와 연주는 지금 시대엔 불가능하다고 봐요. 황금 시대의 명연주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면 당시의 기기를 쓰는 게 최선의 선택인 거죠.”

그가 옛 것에 매달리는 이유다.

“요즘 아이들은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잖아요. 편리하겠지만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인류가 만든 소리의 황홀경을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다음 세대에 전승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고요.”

김 교수 덕에 그의 가족도 오디오 전문가가 다 됐다. ‘황금의 귀’를 가졌다는 부인을 비롯해 세 자녀가 모두 각자의 오디오 세트를 가지고 있을 정도다.

“(비싼 기기니까 조심스럽지만) 오디오를 못 만지게 하는 건 어리석어요.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이 방에 드나들었고, 기기를 만졌어요. 음악을 듣고 싶어하시는 분도 많이 오시죠. 소리 듣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키재기’하는 게 있거든요.”

김 교수의 오디오 룸을 찾는 이 중에는 연주자도 있다. 그는 실황에 가까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기기를 튜닝하기 위해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씨 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피아니스트 이혜경씨는 음반을 내기 전 김 교수의 방에서 음질을 테스트하기도 했다.

프로 연주자가 인정하는 공간을 완성했다고 해서 그가 값비싼 기기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어떤 기기도 나쁜 건 없어요.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 뿐이죠. 가격이나 브랜드 명성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스피커로도 얼마든지 웅장한 소리를 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건 제작자들은 안 가르쳐주죠. 그 사람들은 팔아야하니까. (웃음) 시간을 들여서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소리의 본질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최고라는 기기를 다 경험한 그가 내린 결론은 “싸고 아름답게 듣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이었다.

“저는 다행히도 가격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처지여서 좋은 기기를 많이 경험했어요. 그런데 최고를 경험하고 나니 신화라는 것의 허실을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만큼 돈을 들일 정도는 아니구나’하는 거죠. 돈 들이지 않고도 울림 있는 소리는 얼마든지 가능해요. 집사람이랑 싸우고 경제 파탄내면서 집착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이런 얘기하면 우리 집사람도 ‘사돈 남말하네’라고 하겠죠.(웃음) 좋은 소리라는 건 결국 조화로움이잖아요. 작은 방에 무조건 큰 스피커를 들여놓는다거나 하는 부조화 속에선 좋은 소리가 날 수 없어요.”

30분 이상 음악을 들려주던 그가 방을 나서며 말했다.

“사람이 많으니까 소리가 뭉개지네요. 여러분이 흡음(吸音)작용을 해서 울림이 사라지거든요.”

아주 작은 변화일 텐데…. 프로의 귀는 공간 속에 흐르는 미세한 둔탁음을 예리하게도 잡아냈다. 

글=홍주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오디오쟁이는 바람 안 피운다 ?

조강지처, 첩(오디오)을 한 집에 데리고 살거든 …

‘귀로 마시는 황홀한 술’

오디오는 자동차·카메라와 더불어 남성을 홀리는 ‘어른들의 장난감’이다. 여기에 푹 빠진 ‘오디오쟁이’들의 상태를 표현하는 농담이 있다. ‘오디오에 빠지면 절대 딴 여자와 바람피우지 않는다. 한 지붕 아래 조강지처와 첩(오디오)이 두 살림을 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끊임없는 ‘바꿈질(오디오 기기를 새로 바꾸는 것)’은 통과의례이며, 천상의 소리를 얻기 위한 과정은 천로역정(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우화소설 제목으로, 작품 내용처럼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뜻한다)에 비길만큼 험난하다.

명품의 경우 카트리지 바늘 하나에 수백만원, 기기를 연결하는 인터코넥터 하나에 수십만원, 스피커는 수천만원이나 한다. 월급과 기기 가격의 괴리는 점차 커지고, 진짜 가격을 아내가 아는 것은 가정의 화목을 해칠 뿐이다. 가정평화를 위해선 아내에게 진짜 가격에서 0 하나를 빼고 말해야 한다.

이 때문에 기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가족을 달래거나, 속일 수 있어야 비로소 진짜 ‘오디오쟁이’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적은 외부에도 있으니, 옆집 사람이다. 겨우 마련한 기기로 교향악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이웃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김영섭 교수는 그래서 자신의 한옥 밑에 지하실을 만들었고, “아내는 나의 오디오 편력을 보살같은 마음씨로 눈 감아줬다”고 말했다.

홍주희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hongjo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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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8-03-17 22:48   좋아요 0 | URL
후... 오디오도 없어서 그냥 피씨로만 음악을 듣습니다.
니르바나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꾸벅(_ _)

니르바나 2008-03-18 11:16   좋아요 0 | URL
오매, 반갑습니다. 하얀마녀님
니르바나를 영 잊으셨는가 했는데
이제 어디 가지 마시소. 님하^^

제 피씨 스피커 페이퍼에 댓글 달아주신 게 엊그제같은데
참 세월 빠릅니다.
비록 싸구려 2.1채널짜리였지만
아직도 소리 잘 내주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바꿈질을 생각도 못하지만
오디오의 로망을 심어주신 음악선생님때문에
상상속에선 맥킨토시 일절을 구습하고 싶어 책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ㅎㅎ

2008-03-20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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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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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5: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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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6: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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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09: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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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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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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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4 1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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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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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2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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