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북노마드 예술아카데미 Post Studio 1
정재호 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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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오늘 오전부터 몸이 으스스한게 감이 좋질 않았다. 주말에 산 새 운동복을 입고 출근길을 나서는데 한편으론 신나지만, 배가 슬슬 아픈게 어딘가 기분이 좋질 않았다. 오전에는 어떻게 버텼는데, 점심을 먹고 나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의무실 신세를 졌다. 오후 내내 링거를 맞으면서 자다가 음악을 듣다가 하도 심심해서 빌려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책 제목에서 순수한 비장미가 흐르는데, 바로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이다. 미술 관련 종사자들이 강연한 것들을 모아둔 책인데 내용이 꽤 흥미롭다. 그러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미술을 공부한 친구들도 있고 제목의 <그림> <음악>, <사진>, <논문>, <평론>, <소설>, <시나리오>, <영화> 등등 으로 바꿔읽는다면 다들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낄법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이런 '창조적인 일',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길을 보여주고 또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를 만들면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최소한 책의 첫 번째 챕터에서 말하는 문제의 핵심은 "지속가능성"이다. 내가 그림을 그려서, 영화를 만들어서, 논문을 쓰면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무엇인가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을 구축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는 최소한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중차대한 결정을 하게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좀 투박하게 말하자면, '생활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소위 말하는 '예술가'가 될 것인가라는 선택 말이다. 정재호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선택은 그리 적절한 물음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작가는 직업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돈도 벌기 힘들다. 작가는 직업이 아닌, 삶의 태도 또는 세계를 어떤 형태로 지향하는 모습이다. 그러니 작가가 되길 원한다면 먼저 직업을 가져라. 나는 작가의 삶을 산다는 건 투잡 인생이라고 생각한다."(p.20)

조금 냉정한 말인듯 싶지만, 운수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은 뼈아픈 진실일지도 모른다. 뼈아픈 진실 앞에서 우리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 균형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생활과 자신의 작업 사이의 균형이야말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자세이고, 이런 균형감에서 지속가능성이 생긴다. 순수한 열정은 착취당하기 쉽고 착취 속에서 금새 사그라들 수 있다. 지나친 영악함은 돌이킬 수 없게 자신을 본래적인 열망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실행은 어렵다. 하지만 '창조적인 일'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 외에 근거를 두지 않는 일'이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단지 모방을 하거나 반복적인 재생산이 아니라면, 자기 외에 근거를 둘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불안하고 더 지속가능하기 어렵다. 열정으로 이겨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불안은 단지 견뎌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기쁨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오직 자신에게 근거를 두는 고독한 일이라면, 그 고독의 결과물이 철저히 무시될 수도 있는 일이라면, 뼈아픈 진실로서 '투잡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기나긴 외줄타기 속에서 자신만의 균형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계속 그 창조적인 작업에 몰두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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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다소 거칠지만 꽤나 강력하고 매력적인 문장으로 <피로사회>는 시작한다사실 이 문장에 <피로사회>의 핵심적인 주장과 그 과제가 다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주요 질병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과 그 질병이 이전 시대의 것과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대’의 문제와 ‘질병’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는 문제이다이 두 가지 문제가 나에게 호기심을 끌었던 이유는 ‘시대’를 구분하는 근거가 어떤 것일까라는 것과 각 시대에서 포착되는 일종의 ‘징후’를 ‘질병’이란 형태로 이해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피로사회>를 일종의 ‘시론’으로 받아들였다하나의 체계적인 분석이라고 말하기엔엉성한 구석이 있고 내적인 정합성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게 될 개념이 어떤 점에서 타당한 것인지즉 그러한 개념을 적용하여 사회를 이해할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 같다오히려 저자는 ‘시론’의 수준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련의 담론들을 건드리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것 같다그런 점에서 <피로사회>는 탁월한 의미에서 사회에 대한 ‘철학적 분석’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작업이다.


 <피로사회>의 핵심적인 주장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더 이상 ‘면역학적 시대’가 아니라 ‘신경증적 병리학의 시대’라는 점이다면역학적 시대에는 타자의 부정성이 문제의 핵심이었다면신경증적 병리학의 시대에는 타자에 대한 긍정성의 과잉이 문제가 된다면역학의 시대에선는 ‘차이’라는 것이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따라서 ‘이질적인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그것은 제거의 대상이거나 면역 반응의 대상으로서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다그러나 저자가 <피로사회>라고 일컫는, ‘후기근대’ 사회에서 ‘차이’는 더 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오히려 ‘후기근대’의 “차이에는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중의로 전락한다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여행하는 관강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pp. 13-14)


 저자는 반복해서 후기근대가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예를 들어세계화 과정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세계화 과정이라는 것이 국가나 지역별 경계를 제거해나가는 과정인데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경계나 장벽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피로사회>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이전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내에서 동반되었던 부정성의 폭력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폭력이다그런 점에서 저자의 주장  후기근대가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다-은 또 하나의 근거를 갖게 된다.부정성에 의한 폭력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관찰되는 것이다.(p. 16) 하지만 <피로사회>는 긍정성의 과잉이 문제가 되는 사회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p. 19)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보여지는 폭력은 ‘새로운 폭력’이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 보다는 포화시키며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 시키는 것이다.(p. 21)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의 구분과 병렬적으로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대비된다규율사회는 복종적 주체가 조직되고 확산되던 사회라면성과사회는 성과주체가 조직되고 확산된 사회이다규율 사회에서는 부정성의 사회였고 당위의 조동사, “무엇을 해야 한다” 혹은 그의 부정으로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정조가 지배적인 사회었다면성과사회는 ‘할 수 있음’이라는 정조가 지배적인 사회이다. “이제 금지명령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이니셔티브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규율사회는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p. 24)




 









 성과주체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p. 28)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성과 주체가 늘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자기 자신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이런 점을 저자는 아주 웅변적인 어조로 강조하여 보여준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그는 자기 자신이 주인이자 주권자이다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p. 29)

 


 <피로사회>는 분명히 흥미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담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마리’일 뿐이다왜냐하면 하나의 분석의 체계로서 정합성은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저자가 병렬적으로 배치시키고 있는 개념들즉 근대와 후기근대 혹은 자본주의와 후기자본주의 등의 개념들과 연결될 수 있는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 그리고 규율사회와 성과사회가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지 않다저자는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연속성’을 강조한다생산성의 향상이란 측면에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서 보여준다그러나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 사이에는 ‘단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항생제의 발명과 발전이 면역학적 시대의 종언을 맞이하게 했다고 말이다이러한 비대칭성을 해소할 수 있는 약간의 수사적 노력 - 연속성을 강조할 때는 ‘하나의 층위’라고 그 범위를 축소시키는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더불어 <피로사회>가 마냥 새롭지 않은 것은 그것이 새롭다고 말하는 것이 이미 진부한 것이기 때문이다저자가 긍정성의 과잉에 의해서 양산되는 ‘새로운 폭력’을 말할 때, -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제시되는 ‘새로운’ 폭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우리가 늘상 지적하고 있고 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익숙하지만 그것이 내재적이기 때문에 가공할만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폭력이다맑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체계 자체가 이런 종류의 폭력을 언제나 잘 보여주는 것 아니었던가그런 점에서 저자의 시대구분 역시 그 근거가 다소 희박한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것은 저자가 도입하고 있는 개념들 자체의 정당성이다저자가 로베르토 에스포지오라는 사람의 면역성 이론을 비판하며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 꽤 흥미롭다. “어떤 적절한 해석 범주를 통해 특수한 부문별 언어들을 횡단하여 단일한 의미 지평과 연관 속에서 이 사건들을 고찰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p. 14) 특수한 부문별 언어들을 횡단하는 새로운 해석 범주를 가진다는 것은 최소한 내가 보기엔 어떤 ‘메타적 개념’들을 창출해내는 일이다그리고 이는 철학의 고유한 역할일 수 있고 철학이 떠맡아야만 하는 과업일 수 있다그러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메타적 개념들이 제시될 때 그것의 정당성이 어떻게 확보되느냐이다그 개념이 마치 하나의 배라고 가정한다면사회현상이라는 험난한 파도가 득실되는 바다를 무사히 항해하며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만약에 난파된다면 그 개념은 실패한 개념일 것이다비유적으로 제시한 어떤 개념의 ‘설명력’이 그 개념의 정당성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일까그렇다면 과학적 이론 혹은 개념과 철학적 이론 혹은 개념 사이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여전히 이런 질문들은 나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피로사회>와 관련짓지 않더라도모든 종류의 사회와 역사에 다리를 걸치고 그것들을 설명해내려는 철학적 작업은 자신이 왜 그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려는지 그리고 그러한 설명이 왜 정당한지를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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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위드 러브
우디 앨런 감독, 알렉 볼드윈 외 출연 / UE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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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좋다나쁘다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사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단일한 기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어떤 ‘기준’그것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꽤 우스꽝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태인물대상 등으로부터 느끼는 감정들은 기본적으로 평가적이고 이 인지하기 힘든 평가의 과정에는 마찬가지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종의 ‘기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무엇이 어떤 영화를 ‘좋은 영화’로 만들어 주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불러 모은 관객수는 최근에 가장 유의미하게 활용되는 기준 중에 하나일 것이다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이 봤다고 해서 그 영화가 곧바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개인적으로아주 개인적으로 나는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포착해서 보여주는 영화는 최소한 나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생생하게 포착된 삶의 한 단면이 아름답고 또 재미있는 방식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꽤 훌륭한 점을 지닌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디 앨런의 신작 <로마 위드 러브>는 꽤 훌륭한 점을 많이 지닌 영화이다먼저 <로마 위드 러브보다는 우디 앨런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정리해본다면최근 우디 앨런은 특정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거나 도시 이름을 전면에 내거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To Rome with love>(2013), <Midnight in Paris>(2012) 그리고<Vicky, Cristina, Barcelona>(2008, 번역된 제목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들이 그런 영화에 속할 것이다로마파리 그리고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를 우디 앨런은 꽤나 흥미롭게 시각화시켜준다는 점도 꽤 흥미롭다더불어 우디 앨런은 ‘환상’이라는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그런 욕망들을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 같다사실 최근 영화들은 거의 ‘환상’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위드 러브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환상’을 다룬다로마라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람들이 가진 ‘환상’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한 번쯤 꿈꾸는 그런 환상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예를 들면 평범한 회사원이고 회사에서 존재감도 없는 그런 사람이 엄청난 유명인이 된다는 환상또 여자 친구의 친구(심지어 그는 굉장히 개방적이고 내가 해보지 않았던 일탈적 경험들을 즐기기도 한다)와 사랑에 빠지는 환상은퇴한 고전 음악 프로듀서가 자신이 굉장히 선구적인 사람이며 자신이 발굴한 오페라 가수가 대단히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환상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여성이 도시의 영화배우나 강도와 사랑을 나누는 환상반대로 순박한 시골 청년이 거칠 것 없는 도시의 섹시한 창녀와 사랑을 나누는 환상 등 영화가 다루는 환상들은 소재 자체로는 진부한 것일지 모르지만그것이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삶과 더 가까이 있는 것들이고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또 만들어 내는 환상이다.

 


 이런 ‘환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아마 감독의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환상’이라는 이유만으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이런 평범하고 진부한 환상들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디 앨런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환상’을 다루지 않는다아주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이것이 ‘환상’이다는 점을 보여주고 또 어떨 때는 제 3자가 개입해서 당신이 갖고 있는 환상이 얼머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주기도 한다. ‘환상’에 대한 주된 태도는 ‘유머’ 혹은 ‘풍자’이지 결코 ‘비난’이 아니다.



우디 앨런은 ‘유머’를 활용해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즐겁게 볼 수 있게 하는 전략을 취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그렇기에 <로마 위드 러브>는 꽤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위드 러브>는 우리의 일상의 한 단면을 포착하여 보여주고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환상을 품고 살아간다는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그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훈계하지 않되객관성을 유지하면서   3자의 해설이 제시  유머를 통해 재밌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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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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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나의 삼촌 브루스리>(이하 <나의 삼촌>)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어떤 사람의 추천 때문이었다그 당시만 해도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천명관은 대단한 사람이다”고 했기 때문에 천명관의 소설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그리고 <나의 삼촌>은 내가 처음으로 E-Book으로 읽은 책이기도 하다사실 E-Book 형태로 된 몇 권을 책을 보긴 했지만 화면을 스친 것들이 대부분이라제대로 읽었다라고 말하기에 합당한 것은 <나의 삼촌>이 처음이다.



<나의 삼촌> E-Book의 형태에 알맞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읽는 내내 마치 무협지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빨리 책장(?) 넘겼다(정확히는 화면을 터치했다). 처음에는 천명관식 유머 - 그것은 나에게 성석제의 <조동관약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는데 –에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읽어나갔고유머에 익숙해지자 주인공 권도운이 살아간 한국 현대사가 들어왔다기본적으로 옛날 이야기를 구성지게 잘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라서 책장을 앞으로 다시 넘긴다거나 아니면 어떤 부분을 반복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그런 점에서 <나의 삼촌>은 가볍게 읽을만한 소설이다소설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재미이다재미없는 이야기에 대해선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재미’는 실로 여러 가지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나의 삼촌>의 경우는능청스러우면서도 구성진 문장이 담고 있는 ‘유머’가 가장 주된 요인이다.

<나의 삼촌>에는 가슴을 뻥뚤어주는 부분이 있다바로 화자의 부인으로 등장하는 ‘아영’에 대한 서술인데내가 요즘 자주 보게되는 사람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영은 매사에 계산적이어서 반드시 준 만큼 돌려받고 무엇에든 다치지 않을 만큼 충분한 거리를 두어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서울깍쟁이였다대신자신이 신세를 진 만큼 반드시 갚아주려는 자존감과 자신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에 대해선 철저히 사랑하고 통제하려는 소유욕을 가진 여자였다[]그녀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생에 대한 의심 없는 열정과 자신이 인생에 대해 쏟아붓는 노력만큼 반드시 보상을 받겠다는 확고한 의지였다. (천명관, <나의 삼촌 브루스리2> )

 

계산적이면서도 자존감을 갖춘 사람들이 너무 많다사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기술하고 평가해야할지 몰랐는데작가의 통찰력으로 명증하게 이를 표현해주니 고마웠다.

 

 하지만 왜 나에게 천명관을 추천한 사람이 굳이 천명관에 대해 “대단하다”라는 평가를 내렸는지 모르겠다일단 내게 불편함을 주었던 것은 너무 거대한 역사들을 가볍게 터치하고 넘어가는 서술 방식 때문이다내가 가장 인상 깊었고 또 동시에 가장 큰 실망을 느꼈던 부분이 ‘삼청교육대’에 관한 것이었다삼청교육대에서 벌어진 온갖 만행의 끔찍함에 대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지만왜 작가는 이 사건 자체만을 두고 천착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짜장면을 만들겠다는 요리사의 의중과 관계없이 왜 군만두가 나오지 않았냐고 하는 격일지 모르겠지만최소한 나의 기준에서 좋은 소설이란 어떤 사건어떤 캐릭터에 대한 깊이 있는 반성으로부터 비롯된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 혹은 설명을 하고 있는 소설이다그런데 <나의 삼촌>에서 ‘삼청교육대’와 관련한 부분에서는 느닷없는 휴머니티와 느닷없는 영웅들이 등장해서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같은 ‘천착’이 없다는 생각에 실망스러웠다.


 또한 대사의 톤들이 들쭉날쭉한 것도 불편했다얼간이 같은 말을 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변신을 해서 자신의 캐릭터를 버리고 작가가 하는 말을 줄줄 내뱉을 때마다 일관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캐릭터가 캐릭터 자체만으로 어떤 필연성을 갖추어 나가고 독자들이 그 필연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예술의 세계가 아닐까 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에 비추어 봤을 때, <나의 삼촌>은 추천한 사람이 말한 ‘대단함’과는 거리가 먼 소설이다.



 작가의 노고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나는 <나의 삼촌> E-Book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책으로서 아주 적합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단지 잡지처럼 그림이나 짧은 문장들을 보고 넘겨버리는 그런 수준도 아니고 몇 번을 곱씹어서 읽어봐야할 책도 아닌,딱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감동적이며 적당히 생각하게 만드는 책 - 물론 이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기에 E-Book의 형태로 읽을 때 최상의 효과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어떤 종류의 책에 대해서는 그것이 물리적인 형태를 갖추어 책 귀퉁이를 접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나에게 <나의 삼촌>은 그런 책이 아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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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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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퀴즈쇼>를 읽었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에 이은 이번 달 두 번째 소설이다. 사실 나는 김영하 작가에게 꽤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팟캐스트<김영하의 읽는 시간> - 를 들으면서 숙면에 빠지는 것이 나의 달콤한 일상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낮고 꽤나 지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불안한 시기를 거쳐가던 중이던 지난 겨울, 김영하의 목소리는 나에게 꽤 효과 좋은 수면제였다

 



 

이런 미안함 때문에 <퀴즈쇼>를 읽은 것은 아니다. 사실 <퀴즈쇼>를 읽어야겠다는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적는 이유는 <퀴즈쇼>가 특별히 좋아서도 아니다. 실은 <밤은 노래한다>가 나에게는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퀴즈쇼>를 단순히 폄하할 수만도 없는 이유는 곳곳에 들어찬 재기발랄한 통찰 때문이다. 나는 소설가를 꿈꾼 적은 없지만,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소설은 나도 써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황당한 자신감을 혼자서만 가져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퀴즈쇼>를 읽으면서 나는 이런 나의 황당한 자신감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고 내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통찰과 센스를 작가 김영하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김영하는 이런 문장을 쓰는 재주를 가졌다

 

하나같이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던 그들을 나는 속으로 '깨나' 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가지는 부모님 속 '깨나' 썩이던 깡패였지만, 마음잡고 사회에 나와서는 돈푼 '깨나' 만진 적이 반드시 한 번은 있었고 한창 때는 여자 '깨나' 울렷다. 그러나 결국 다 날려먹고 비록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이게 자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김영하, <퀴즈쇼>, p. 102)

 

나는 도저히 이런 문장을 쓸 수 없다. '깨나'족이라는 말을 도대체가 생각해낼 수 없다. 어른들 중 유독 자기만의 신화에 심취해서 무언가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종종 관찰했지만, 그들을 '깨나'족이라는 다소 장난스러운 어투로 '개념화'해서 쓰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어떤 말을 지어내는(개념화) 능력만이 작가의 능력은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작가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김영하는 그런 점에서도 아주 훌륭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문장에 주목해볼 수 있다

 

약한 남자 특유의, 어려서부터 한 번도 주먹질 같은 것은 해본 적 없는, 늘 지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온, 어쩌면 폭력적인 아버지한테 늘 머리를 쥐어박히며 자라왔음직한, 그래서 다른 남성과의 힘싸움 같은 것은 아에 포기해버린 듯한, 그러나 한편으론 여성들의 타고난 모성을 자극하는 부드럽고 비굴한 자기만의 구애양식을 체화하며 그것으로 여성들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한, 그러다보니 때로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으나, 여전히 수컷의 본질은 깊숙이 숨어 있는 그런 친구 같았다. (김영하, <퀴즈쇼>, p. 344)

 

이 긴 문장은 한 인간에 대한 관찰의 결과물이다. 한 인간은 다소 길더라도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자신의 통찰에 대한 자신감일까? 김영하는 한 문장으로 관찰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이 문장을 읽다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나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 즉 공감을 이끌어내는 문장이다.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탁월한 관찰력과 관찰에 기반한 찰진 문장이 있어야 하는데, 김영하는 그런 일에 성공했고 그래서 나는 김영하가 작가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쓴 것은 김영하의 <퀴즈쇼>에 대한 독후감이나 정리의 글이 아니다. 오히려 <퀴즈쇼>를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들을 가감없이 쓴 것이다. 나는 <퀴즈쇼>를 읽고 작가가 될 수 없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실히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김영하는 꽤나 좋은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소설을 더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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