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다소 거칠지만 꽤나 강력하고 매력적인 문장으로 <피로사회>는 시작한다. 사실 이 문장에 <피로사회>의 핵심적인 주장과 그 과제가 다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주요 질병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과 그 질병이 이전 시대의 것과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시대’의 문제와 ‘질병’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는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나에게 호기심을 끌었던 이유는 ‘시대’를 구분하는 근거가 어떤 것일까라는 것과
각 시대에서 포착되는 일종의 ‘징후’를 ‘질병’이란
형태로 이해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피로사회>를
일종의 ‘시론’으로 받아들였다. 하나의
체계적인 분석이라고 말하기엔, 엉성한 구석이 있고 내적인 정합성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게 될 개념이 어떤 점에서 타당한 것인지, 즉
그러한 개념을 적용하여 사회를 이해할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저자는 ‘시론’의 수준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련의 담론들을 건드리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피로사회>는 탁월한 의미에서 사회에 대한 ‘철학적 분석’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작업이다.
<피로사회>의
핵심적인 주장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더 이상 ‘면역학적 시대’가 아니라 ‘신경증적 병리학의 시대’라는 점이다. 면역학적
시대에는 타자의 부정성이 문제의 핵심이었다면, 신경증적 병리학의 시대에는 타자에 대한 긍정성의
과잉이 문제가 된다. 면역학의 시대에선는 ‘차이’라는
것이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질적인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그것은
제거의 대상이거나 면역 반응의 대상으로서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저자가 <피로사회>라고 일컫는, ‘후기근대’ 사회에서 ‘차이’는
더 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후기근대’의 “차이에는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중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강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pp. 13-14)
저자는 반복해서 후기근대가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세계화 과정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세계화 과정이라는 것이 국가나 지역별 경계를 제거해나가는 과정인데,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경계나 장벽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피로사회>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이전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내에서 동반되었던 부정성의 폭력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주장 – 후기근대가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다-은 또 하나의
근거를 갖게 된다.부정성에 의한 폭력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관찰되는 것이다.”(p. 16) 하지만 <피로사회>는 긍정성의 과잉이 문제가 되는 사회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p. 19)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보여지는 폭력은 ‘새로운
폭력’이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 보다는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 시키는 것이다.(p. 21)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의 구분과 병렬적으로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대비된다. 규율사회는 복종적 주체가 조직되고 확산되던 사회라면, 성과사회는
성과주체가 조직되고 확산된 사회이다. 규율 사회에서는 부정성의 사회였고 당위의 조동사, “무엇을 해야 한다” 혹은 그의 부정으로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정조가 지배적인 사회었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음’이라는 정조가 지배적인 사회이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는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p. 24)
성과주체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p. 28)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성과 주체가 늘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자기 자신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점을 저자는 아주 웅변적인 어조로 강조하여 보여준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이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p. 29)

<피로사회>는
분명히 흥미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마리’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분석의 체계로서
정합성은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병렬적으로 배치시키고 있는
개념들, 즉 근대와 후기근대 혹은 자본주의와 후기자본주의 등의 개념들과 연결될 수 있는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 그리고 규율사회와 성과사회가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지 않다. 저자는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연속성’을 강조한다. 즉, 생산성의 향상이란 측면에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 사이에는 ‘단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항생제의
발명과 발전이 면역학적 시대의 종언을 맞이하게 했다고 말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을 해소할 수
있는 약간의 수사적 노력 - 연속성을 강조할 때는 ‘하나의
층위’라고 그 범위를 축소시키는 –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더불어 <피로사회>가
마냥 새롭지 않은 것은 그것이 새롭다고 말하는 것이 이미 진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긍정성의
과잉에 의해서 양산되는 ‘새로운 폭력’을 말할 때, -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 제시되는 ‘새로운’ 폭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늘상 지적하고 있고 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익숙하지만 그것이 내재적이기 때문에 가공할만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폭력이다. 맑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체계 자체가 이런 종류의 폭력을 언제나 잘 보여주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저자의 시대구분 역시 그 근거가 다소 희박한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것은 저자가 도입하고 있는 개념들 자체의 정당성이다. 저자가 로베르토 에스포지오라는 사람의 면역성 이론을 비판하며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 꽤 흥미롭다. “어떤 적절한 해석 범주를 통해 특수한 부문별 언어들을 횡단하여 단일한 의미 지평과 연관 속에서 이 사건들을
고찰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p. 14) 특수한
부문별 언어들을 횡단하는 새로운 해석 범주를 가진다는 것은 최소한 내가 보기엔 어떤 ‘메타적
개념’들을 창출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철학의 고유한 역할일 수 있고 철학이 떠맡아야만
하는 과업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메타적 개념들이 제시될 때 그것의
정당성이 어떻게 확보되느냐이다. 그 개념이 마치 하나의 배라고 가정한다면, 사회현상이라는 험난한 파도가 득실되는 바다를 무사히 항해하며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난파된다면 그 개념은 실패한 개념일 것이다. 비유적으로
제시한 어떤 개념의 ‘설명력’이 그 개념의 정당성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학적 이론 혹은 개념과 철학적 이론 혹은 개념 사이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이런 질문들은 나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꼭 <피로사회>와 관련짓지 않더라도, 모든 종류의 사회와 역사에 다리를 걸치고 그것들을 설명해내려는 철학적 작업은 자신이 왜 그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려는지 그리고 그러한 설명이 왜 정당한지를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