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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퀴즈쇼>를
읽었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에 이은 이번 달 두 번째 소설이다. 사실 나는 김영하 작가에게
꽤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팟캐스트 -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 를
들으면서 숙면에 빠지는 것이 나의 달콤한 일상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낮고 꽤나 지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불안한 시기를 거쳐가던 중이던 지난 겨울, 김영하의 목소리는 나에게 꽤 효과 좋은 수면제였다.

이런 미안함 때문에 <퀴즈쇼>를
읽은 것은 아니다. 사실 <퀴즈쇼>를 읽어야겠다는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적는 이유는 <퀴즈쇼>가 특별히 좋아서도
아니다. 실은 <밤은 노래한다>가 나에게는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퀴즈쇼>를 단순히 폄하할 수만도 없는 이유는 곳곳에 들어찬
재기발랄한 통찰 때문이다. 나는 소설가를 꿈꾼 적은 없지만,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소설은 나도 써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황당한 자신감을 혼자서만 가져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퀴즈쇼>를 읽으면서 나는 이런 나의 황당한 자신감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고 내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통찰과
센스를 작가 김영하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김영하는 이런 문장을 쓰는 재주를 가졌다.
하나같이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던 그들을 나는 속으로 '깨나' 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가지는 부모님 속 '깨나' 썩이던 깡패였지만, 마음잡고
사회에 나와서는 돈푼 '깨나' 만진 적이 반드시 한 번은
있었고 한창 때는 여자 '깨나' 울렷다. 그러나 결국 다 날려먹고 비록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이게 자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김영하, <퀴즈쇼>, p. 102)
나는 도저히 이런 문장을 쓸 수 없다. '깨나'족이라는 말을 도대체가 생각해낼 수 없다. 어른들 중 유독 자기만의
신화에 심취해서 무언가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종종 관찰했지만, 그들을 '깨나'족이라는 다소 장난스러운 어투로 '개념화'해서 쓰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어떤 말을 지어내는(개념화)
능력만이 작가의 능력은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작가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김영하는 그런 점에서도 아주 훌륭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문장에 주목해볼 수 있다.
약한 남자 특유의, 어려서부터 한 번도 주먹질 같은 것은 해본
적 없는, 늘 지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온, 어쩌면
폭력적인 아버지한테 늘 머리를 쥐어박히며 자라왔음직한, 그래서 다른 남성과의 힘싸움 같은 것은 아에
포기해버린 듯한, 그러나 한편으론 여성들의 타고난 모성을 자극하는 부드럽고 비굴한 자기만의 구애양식을
체화하며 그것으로 여성들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한, 그러다보니 때로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으나, 여전히 수컷의 본질은 깊숙이 숨어 있는 그런 친구 같았다.
(김영하, <퀴즈쇼>, p. 344)
이 긴 문장은 한 인간에 대한 관찰의 결과물이다. 한 인간은 다소
길더라도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자신의 통찰에 대한 자신감일까? 김영하는 한 문장으로 관찰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이 문장을 읽다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나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 즉
공감을 이끌어내는 문장이다.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탁월한 관찰력과 관찰에 기반한 찰진 문장이
있어야 하는데, 김영하는 그런 일에 성공했고 그래서 나는 김영하가 작가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쓴 것은 김영하의 <퀴즈쇼>에 대한 독후감이나 정리의 글이 아니다. 오히려 <퀴즈쇼>를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들을 가감없이
쓴 것이다. 나는 <퀴즈쇼>를 읽고 작가가 될 수 없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실히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김영하는 꽤나 좋은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소설을 더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