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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그녀 ㅣ 가연 컬처클래식 16
이상민 지음, 신동익 외 각본.각색 / 가연 / 2014년 1월
평점 :
상상력의 명암(明暗)
<수상한 그녀>에 대한 단상
상상, 몽상, 꿈 등으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쾌감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기쁨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상상이나 꿈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이 존재해왔던 이유들도 어쩌면 옛 사람들도 그 기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전적인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기쁨을 그리면서도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 혹은 한시적인 쾌감이라는 점을 동시에 그렸다는 점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구운몽>이나 <조신설화>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상상력, 몽상 그리고 꿈 등은 모두 인간의 욕망과 관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종류의 욕망들 –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의 성취 같은 것들 –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꿈이나 상상 속에서는 이루어지곤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같은 매체들은 보편적으로 원하고 있는 바를 그려내어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며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대개 ‘재밌었다’라고 평가하곤 한다.

<수상한 그녀> 역시 보편적인 욕망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간다. 주인공인 오말순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반기문 총장 다음으로 훌륭한 반현철 교수를 키워냈다. 똑부러지는 자식교육과 집안 살림은 그녀의 자부심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늙은이의 고집으로 느껴진다. 그 고집의 일부가 며느리에게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고 며느리는 결국 병을 앓아 눕게 된다. 집안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자, 가족들은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서 논의하게 되고 요양원으로 가기 전날 마지막 외식을 하게 된다. 외식을 마치고 쓸쓸히 손자를 만나러 가던 중에, 오말순은 청춘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는데, 그러던 중 그녀는 20살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말순이 오두리가 되는 그 단순한 상상력은 “다시 한 번 젊음을,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그녀의 노래 <한번 더>에서 잘 보여진다.
“또 다시 밝아올 내일의 아침처럼 빛나는 희망이 널 비출거야/ 가슴속에 숨어있던 이제는 빛바랜 어릴적 꿈들을/찾아서 향해서 꿈이 아닌 현실로 화려한 조명이 널 비출거야[…]오 한번 더 그래 한번 더!” (<수상한 그녀> ost, <한번 더> 중)
오말순은 다시 한 번 젊어져,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살아보고 싶다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그 욕망은 ‘말순’이라는 자식을 위해 남에게 못할 짓을 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그리고 그 억척 같은 인생의 교훈으로 자신의 아집을 만들어 타인들을 평가했던 팍팍한 인생이 아니라 오드리 햇번처럼 빛나는 ‘두리’로서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늙어간다는 것,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우리는 연습하지 못한다. 죽음과 늙음은 어느 순간 삶에 불쑥 끼어드는 불청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세월이 안겨주는 서러움과 불가항력의 힘에 좌절감을 느낀다. 서러움과 좌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젊어지고 싶다는,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고 <수상한 그녀>가 시작되는 그 유쾌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유쾌한’ 상상력이 언제나 기쁨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고전적인 작품들이 꿈과 상상의 ‘명과 암’을 동시에 그리듯, 우리가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망의 이면에는 ‘도피’라고 부를만한 우리의 비겁함이나 게으름도 담겨 있다. 오두리가 아닌 오말순으로서 빛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장벽이 오말순으로부터 오두리를 상상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게으르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연습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비겁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시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게으름이나 비겁함을 굳이 부각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오말순의 행복이 오두리를 통해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말순은 오말순이고 오두리는 오말순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다만, 게으름과 비겁함이 말해지려면, 그것은 오말순으로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말순이 계속 오두리를 꿈꿀 때 말해져야만 할 것이다. 섣부른 판단보다는 상상력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에서 얻어진 에너지로 우리에게 쉽게 생길 수 있는 게으름과 비겁함을 미리 경계해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이들이 취할 수 있는 현명함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