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그녀 가연 컬처클래식 16
이상민 지음, 신동익 외 각본.각색 / 가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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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명암(明暗)

<수상한 그녀>에 대한 단상

 

상상, 몽상, 꿈 등으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쾌감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기쁨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상상이나 꿈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이 존재해왔던 이유들도 어쩌면 옛 사람들도 그 기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전적인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기쁨을 그리면서도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 혹은 한시적인 쾌감이라는 점을 동시에 그렸다는 점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구운몽>이나 <조신설화>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상상력, 몽상 그리고 꿈 등은 모두 인간의 욕망과 관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종류의 욕망들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의 성취 같은 것들 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꿈이나 상상 속에서는 이루어지곤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같은 매체들은 보편적으로 원하고 있는 바를 그려내어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며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대개 재밌었다라고 평가하곤 한다.

<수상한 그녀> 역시 보편적인 욕망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간다. 주인공인 오말순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반기문 총장 다음으로 훌륭한 반현철 교수를 키워냈다. 똑부러지는 자식교육과 집안 살림은 그녀의 자부심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늙은이의 고집으로 느껴진다. 그 고집의 일부가 며느리에게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고 며느리는 결국 병을 앓아 눕게 된다. 집안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자, 가족들은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서 논의하게 되고 요양원으로 가기 전날 마지막 외식을 하게 된다. 외식을 마치고 쓸쓸히 손자를 만나러 가던 중에, 오말순은 청춘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는데, 그러던 중 그녀는 20살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말순이 오두리가 되는 그 단순한 상상력은 다시 한 번 젊음을,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그녀의 노래 <한번 더>에서 잘 보여진다.

 

또 다시 밝아올 내일의 아침처럼 빛나는 희망이 널 비출거야/ 가슴속에 숨어있던 이제는 빛바랜 어릴적 꿈들을/찾아서 향해서 꿈이 아닌 현실로 화려한 조명이 널 비출거야[…]오 한번 더 그래 한번 더!” (<수상한 그녀> ost, <한번 더> )

 

오말순은 다시 한 번 젊어져,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살아보고 싶다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그 욕망은 말순이라는 자식을 위해 남에게 못할 짓을 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그리고 그 억척 같은 인생의 교훈으로 자신의 아집을 만들어 타인들을 평가했던 팍팍한 인생이 아니라 오드리 햇번처럼 빛나는 두리로서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늙어간다는 것,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우리는 연습하지 못한다. 죽음과 늙음은 어느 순간 삶에 불쑥 끼어드는 불청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세월이 안겨주는 서러움과 불가항력의 힘에 좌절감을 느낀다. 서러움과 좌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젊어지고 싶다는,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고 <수상한 그녀>가 시작되는 그 유쾌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유쾌한상상력이 언제나 기쁨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고전적인 작품들이 꿈과 상상의 명과 암을 동시에 그리듯, 우리가 다시 한 번 빛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망의 이면에는 도피라고 부를만한 우리의 비겁함이나 게으름도 담겨 있다. 오두리가 아닌 오말순으로서 빛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장벽이 오말순으로부터 오두리를 상상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게으르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연습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비겁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시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게으름이나 비겁함을 굳이 부각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오말순의 행복이 오두리를 통해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말순은 오말순이고 오두리는 오말순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다만, 게으름과 비겁함이 말해지려면, 그것은 오말순으로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말순이 계속 오두리를 꿈꿀 때 말해져야만 할 것이다. 섣부른 판단보다는 상상력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에서 얻어진 에너지로 우리에게 쉽게 생길 수 있는 게으름과 비겁함을 미리 경계해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이들이 취할 수 있는 현명함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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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 HD 리마스터링 (2disc)
곽경택 감독, 유오성 외 출연 / 다일리컴퍼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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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우정의 조건

:: 영화 <친구>[1]를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은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2]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정이 우리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고 우정이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친구가 없는 삶은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또한 친구를 통해 우리는 삶의 사소한 부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또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관의 일부분을 형성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친구 그리고 우정은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고 만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는 충분히 가치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우정을 삶에서 간직하는 일은 드물다. 영화 <친구>는 친구와 우정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가를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어렸을 적, 네 명의 친구(준석, 동수, 중호 그리고 상택)은 함께 바닷가에 가서 헤엄을 치고 거리를 누비며 꾸밈없이 함께 어울리는 친구였다. 그 넷은 함께라서 행복했다. 이런 어렸을 적의 우정은 고등학교에 시절부터 미묘한 긴장이 흐르는 관계로 변한다. 학교의 통인 준석과 부통인 동수 사이의 긴장은 진숙을 사이에 두고 절정에 달한다. 장의사 아버지를 둔 동수는 영향력 있는 조직폭력배의 아들로 태어난 준석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택에게 진숙을 넘겨버린 준석을 두고 동수는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고 따지며 대들어보지만 죽고싶나라는 준석의 위압적인 말투를 따라하는 것으로 그 긴장은 잠정적으로 봉합된다. 세월이 지나, 동수와 준석은 건달이 되었고 상택과 중호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들이 공유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고 그들은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이 살아가려고 했던 방향은 너무 달랐다. 상택은 학문의 길을 걷게 되었고 중호는 적당히 살림을 꾸려나가는 소시민으로, 준석과 동수는 건달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준석과 동수의 길도 달랐다. 준석은 자신의 아버지의 부하였던 사람 밑으로, 동수는 준석의 아버지를 배신한 사람 밑으로 들어간다. 준석과 동수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였고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동수는 준석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준석도 그 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이 우정은 파국으로 종결된다.


 넷의 우정, 특히 동수와 준석 사이의 우정은 왜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둘의 관계가 우정을 빙자한 수직적 위계관계였기 때문이다. 준석이 통이었다면, 동수는 부통이었고 동수는 이 사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열등감을 가졌다. 이 열등감의 근원에는 준석을 넘어설 수 없다는, 다시 말해 관계에 내재해있던 위계질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완전한 우정은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에 근거한다. 그의 말을 옮기자면, “친구는 모든 점에 있어서 상대방으로부터 똑같은 것 혹은 유사한 것을 받게될 것이고 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3]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물질적 이익을 염두해 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이 갖춰야 할 덕들(용기와 절제 그리고 지혜 등)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덕을 상대방도 역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관계의 동등성에 기반한 우정만이 완전한 우정이라고 불릴 수 있을 뿐, 그 이외의 우월성이나 불균등한 관계에 근거한 우정은 완전한 우정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준석과 동수의 관계는 동등한 것이 아니었다. 준석은 관계를 지배하는 힘이었고 동수는 그 힘에 눌려있거나 도전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우정은 언제나 파국에 이를 수 밖에 없거나 불온한 형태의 의리라는 이름으로 치장될 뿐이다.


 그렇다면 상택이와 준석이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그들의 관계는 참된 의미의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준석은 상택에게 친구아이가,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고 말하곤 했다. 준석이 상택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상택이 동수처럼 자신과 동류의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고 준석 자신도 다른 방식의 삶을 살수만 있다면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주먹을 가진 준석은 우월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상택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있었고 그런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다는 욕망 내가 그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상택을 통해서 대리만족 하고자 하는 욕망 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 역시 참된 의미의 우정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리자면, 우정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은 상대방이 잘 되길 바라는 선의이다. 준석과 상택은 서로가 잘되길 바라는 선의를 가졌을 수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상택이가 준석이 엇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구체적으로 노력했던 순간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반항해 학교를 떠난 준석에게 학교로 돌아오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니는 니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게라고 준석과 대화를 나눈 후, 그들은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이는 더 이상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안부를 묻고 집안의 애경사에 참가해 자리를 지켜주며 고향에 내려가면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사이가 된 것이다. 서로의 삶을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관계를 우리는 우정의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친구의 삶이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관하는 자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상대방에 대한 선의가 그저 내면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마음 속으로 백만장자를 꿈꾸는 허영심에 들뜬 사람의 공상과 그리 다른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잘되길 바라는 선의를 행동으로 표현할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참된 우정의 조건이 형성될지 모른다.

 동등한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한 선의를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할 때, 그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나의 친구이고 우리의 관계가 참된 우정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친구, 이런 우정은 언제나 드물고 희귀했으며, 우리는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안정한 우정의 끈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 동수, 준석, 중호 그리고 상택은 이 불안한 외줄타기에서 떨어진 평범한 사내들이었음에 틀림없다.    



[1] 곽경택, <친구>, 2001.

[2]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창우 외 옮김, 이제이북스, 2007, p. 277.(1155a)

[3] 같은 책, p. 285. (1156b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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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설국열차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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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를 두 번째 봤을 때는 부모님과 함께였다. 극장에 30년 만에 오신다는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니 감회가 남달랐는데, 며칠 뒤에 아빠가 일기를 쓰는 블로그에 갔더니 설국열차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빠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질서를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기득권층의 만행 아닌 만행을 보며 난 어느 칸에 타 있으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셨단다.

 


설국열차의 주제의식은 이처럼 뚜렷하다. 뚜렷해서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 문제를 누가 이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지금, 여기에서 전달하고 있는가? 이 닳고 닳은 문제에 대해서, 뻔한 문제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하는가?

 

물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의 탁월성은 열차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이 뻔한 문제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거리를 두며 몰입할 수 없다. 직접 피부에 맞닿은 것은 예술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에, 현실에 몰입하는 것은 굉장한 피로감을 주기 때문에 누가 돈을 주고 일부러 피곤해지겠는가! -, 유희를 본질적 기능으로 가진 예술의 정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열차라는 알레고리에 의해 우리는 그 뻔한 문제를 어느 정도는 거리를 가지고 볼 수 있게 되고 거기에 오락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SF 영화에 나오는 하나의 즐길거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현실과 영화적 가상 사이의 균형은 열차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절묘하게 유지된다. 사람들은 영화 속에 그려진 문제를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 현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면서도 영화적 가상의 세계 속의 문제로도 인식한다. 이러한 균형이 설국열차가 가지는 탁월성이다.

 

설국열차가 그리는 세계는 디스토피아다. 이 열차 안에서는 각자의 주어진 위치가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칸을 바꾸는 것은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시키고 공멸을 불러온다는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입되어있다. 각각은 하나의 부품이다. 자신의 역할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상상력은 철저히 거세된다. 단백질 블록을 만드는 이는 단백질 블록만 만든다. 교사는 교사로서 책무를 다한다. 기계가 손상되면 인간이 부품이 되어 일을 한다. 완벽한 균형, 그리고 균형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규범적 힘 이 균형이 훼손되는 것은 비정정상적인 상태이거나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이 열차가 무한히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반복적으로’ 1년을 주기로 돌 수 있는 힘이다.

 

이 균형과 질서를 흔들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두 가지 유형의 균열의 시도가 존재하는데, 그러한 시도를 하는 이들을 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커티스는 의 사람이다. 그는 열차의 질서를 말그대로 전도시키려 한다. 머리와 꼬리를 뒤집는 것이다. 커티스는 윌리엄의 질문, “앞 칸에 가면 무엇을 하겠나?”에 대해 망설인다. 다른 장면에서 우리는 앞 칸에 가면 그러지 않을거야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거나, 꼬리칸의 동지들과 깔끔한 초밥을 하나씩 먹으면서 메이슨 수상에게는 단백질 블록을 주는 식으로 보여지는 것은 커티스의 전도이다. ‘의 사람인 커티스가 시도하는 전도는 단적인 부정이다. 부정의 정신이 커티스를 열차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부정의 정신은 지금의 삶이 아닌을 꿈꾸게 한다. 현실의 비참함을 거부하고 다른 현실을 꿈꾸게 하는 힘이 바로 부정의 정신 속에 배태되어 있다.

 


남궁민수와 요나는 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차 바깥의 삶을 꿈꾼다. 열차 바깥의 삶이 실제로 어떠할지에 대해 뚜렷한 전망이나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열차 내부의 질서를 전도시키는 것이 아니라 열차 바깥’, 열차 너머의 삶을 꿈꾼다. 그들은 이 디스토피아적 균형의 세계가 아닌 그 너머의 삶, 그것이 극심한 추위라는 고통을 동반하더라도 제 발로 걷고 햇살에 눈부심을 느끼는 삶을 꿈꾼다. 열차 안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온함이 존재한다. 거기에서는 부품으로서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죽진 않는다. 자신의 죽음 역시 체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무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 사람들은 이러한 안온함의 세계’, 무한히 반복하고 순환하는 세계를 거부하고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의 사람들과 의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은 실상 유의미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 사람들의 부정의 정신과 의 사람들의 너머를 상상하는 상상력은 서로를 지지하고 추동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커티스에 의해 남궁민수와 요나는 행동의 반경을 얻게 되고, 커티스는 남궁민수와 요나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요나는 커티스를 일깨우고 커티스는 마지막 성냥을 건넨다. 그리고 민수와 커티스는 서로를 껴안으며, 요나와 타미를 지켜낸다. 지금이 아닌 삶을 생각하는 부정의 정신과 너머를 상상하는 상상력은 이렇게 결합하고 영화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으로서 설국열차 전반에 흐르고 있다.

 


그렇다. 설국열차는 아주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주제의식과 상업성 사이의 균형을 지키면서 자신의 탁월성을 뽐내는 영화다. 또한 아주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에 부정의 정신과 너머를 상상하는 상상력을 결합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로서 진실된 주장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만약 주어진 질서, 주어진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더 나아가 주어진 질서를 걷어차고 다른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두 가지 것들 부정의 정신과 상상력 -이 없이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이 뻔하고 진부한 주제의식을 통해 내가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솔직히 그런 질문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는 아주 적다는게 내 생각이지만 불러일으킨다면, 설국열차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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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설국열차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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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특히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예술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필연성이다. 하나의 캐릭터가 제시되고, 캐릭터의 삶이 형성되며 캐릭터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계가 꽉 짜여진, 그래서 시작부터 종결까지 필연적인 행위, 필연적인 삶 그리고 필연적인 세계와 그것들의 종말로 채워진 작품을 나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들은 보는 이들의 특정한 감정들을 자극하기 위해 애를 쓴다. ‘여기서 울어야만 해혹은

여기서 빵 터져야만 해라고 감독이 말하는 장면들에서는 클리쉐들이 제시되고 보는 이들은 어김

없이 나도 그런 클리쉐들에 즐겨 눈물 콧물을 쏙 빼거나 환희의 웃음까지 잘 짓지만 그들의

요구에 감정적으로 부응한다. 그런 영화들에는 그 감정들을 자극하기 위해 쓸데없는 장면들을 많

이 넣는다.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그 영화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더라도 아주 중요한 목적이

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은 과잉된 것들은 좋은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는 좋은 영화다. <설국열차>에는 군더더기가 적다. 물론 약간의

과잉, 특히 커티스가 자신의 목표를 거의 다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자신의 과거를 고백

했을 때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커티스라는 캐릭터가 왜 그렇게 큰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지 직접적으로 제시해주는지를 보여주는 장

면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넘어갈 수 있고 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설국열차>

에서는 각각의 캐릭터가 각자에게 부여된 필연성에 따라 이야기의 형성해내고 그에 따라 비극성

혹은 희망을 부각시키고 있다. 티미는 왜 단백질 블록 2개가 아니라 공을 가지고 놀고 싶다고 했을까? 좁은 열차 안에서 공놀이를 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티미에게는 그런 열망이 있었던 것이고 이런 티미의 열망이 그가 몸을 구부려 나사를 조이는 모습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또 요나에게 민수는 자신이 만났던 청소부 에스키모 여인이 가진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을까? 영화가 끝날 때, 요나가 입고 있었던 옷과 그녀의 외모 그리고 그녀가 걸어간 길이 요나에게 제시된 필연성이었기 때문이다. 요나는 등장하지도 않은 여인이 가진 믿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이야기 속에서 가야할 바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슬픔이든 희망이든, 아니 우리의 모든 감정들을 개연성있게 이끌어 내주는 그리고 왜 우리가 그것에 슬퍼하고 또 희망을 갖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로서 <설국열차>는 좋은 영화다. 이것이 내가 그것을 두 번 본 이유이며 앞으로 한 번쯤은 극장에 다시 방문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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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위드 러브
우디 앨런 감독, 알렉 볼드윈 외 출연 / UE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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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좋다나쁘다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사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단일한 기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어떤 ‘기준’그것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꽤 우스꽝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태인물대상 등으로부터 느끼는 감정들은 기본적으로 평가적이고 이 인지하기 힘든 평가의 과정에는 마찬가지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종의 ‘기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무엇이 어떤 영화를 ‘좋은 영화’로 만들어 주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불러 모은 관객수는 최근에 가장 유의미하게 활용되는 기준 중에 하나일 것이다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이 봤다고 해서 그 영화가 곧바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개인적으로아주 개인적으로 나는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포착해서 보여주는 영화는 최소한 나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생생하게 포착된 삶의 한 단면이 아름답고 또 재미있는 방식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꽤 훌륭한 점을 지닌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디 앨런의 신작 <로마 위드 러브>는 꽤 훌륭한 점을 많이 지닌 영화이다먼저 <로마 위드 러브보다는 우디 앨런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정리해본다면최근 우디 앨런은 특정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거나 도시 이름을 전면에 내거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To Rome with love>(2013), <Midnight in Paris>(2012) 그리고<Vicky, Cristina, Barcelona>(2008, 번역된 제목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들이 그런 영화에 속할 것이다로마파리 그리고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를 우디 앨런은 꽤나 흥미롭게 시각화시켜준다는 점도 꽤 흥미롭다더불어 우디 앨런은 ‘환상’이라는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그런 욕망들을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 같다사실 최근 영화들은 거의 ‘환상’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위드 러브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환상’을 다룬다로마라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람들이 가진 ‘환상’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한 번쯤 꿈꾸는 그런 환상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예를 들면 평범한 회사원이고 회사에서 존재감도 없는 그런 사람이 엄청난 유명인이 된다는 환상또 여자 친구의 친구(심지어 그는 굉장히 개방적이고 내가 해보지 않았던 일탈적 경험들을 즐기기도 한다)와 사랑에 빠지는 환상은퇴한 고전 음악 프로듀서가 자신이 굉장히 선구적인 사람이며 자신이 발굴한 오페라 가수가 대단히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환상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여성이 도시의 영화배우나 강도와 사랑을 나누는 환상반대로 순박한 시골 청년이 거칠 것 없는 도시의 섹시한 창녀와 사랑을 나누는 환상 등 영화가 다루는 환상들은 소재 자체로는 진부한 것일지 모르지만그것이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삶과 더 가까이 있는 것들이고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또 만들어 내는 환상이다.

 


 이런 ‘환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아마 감독의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환상’이라는 이유만으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이런 평범하고 진부한 환상들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디 앨런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환상’을 다루지 않는다아주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이것이 ‘환상’이다는 점을 보여주고 또 어떨 때는 제 3자가 개입해서 당신이 갖고 있는 환상이 얼머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주기도 한다. ‘환상’에 대한 주된 태도는 ‘유머’ 혹은 ‘풍자’이지 결코 ‘비난’이 아니다.



우디 앨런은 ‘유머’를 활용해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즐겁게 볼 수 있게 하는 전략을 취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그렇기에 <로마 위드 러브>는 꽤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위드 러브>는 우리의 일상의 한 단면을 포착하여 보여주고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환상을 품고 살아간다는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그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훈계하지 않되객관성을 유지하면서   3자의 해설이 제시  유머를 통해 재밌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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