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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설국열차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설국열차를 두 번째 봤을 때는 부모님과 함께였다. 극장에 30년 만에 오신다는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니 감회가 남달랐는데, 며칠
뒤에 아빠가 일기를 쓰는 블로그에 갔더니 설국열차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빠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질서를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기득권층의 만행 아닌 만행을 보며 난 어느 칸에 타 있으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셨단다.

설국열차의 주제의식은 이처럼 뚜렷하다. 뚜렷해서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 문제를 누가 이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지금, 여기’에서 전달하고
있는가? 이 닳고 닳은 문제에 대해서, 뻔한 문제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하는가?
물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의 탁월성은 열차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이 뻔한 문제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거리’를
두며 몰입할 수 없다. 직접 피부에 맞닿은 것은 예술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에, 현실에 몰입하는 것은 굉장한 피로감을 주기 때문에 – 누가 돈을
주고 일부러 피곤해지겠는가! -, 유희를 본질적 기능으로 가진 예술의 정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열차라는 알레고리에 의해 우리는 그 ‘뻔한 문제’를 어느 정도는 거리를 가지고 볼 수 있게 되고 거기에 오락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SF 영화에 나오는 하나의 즐길거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현실과 영화적
가상 사이의 균형은 열차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절묘하게 유지된다. 사람들은 영화 속에 그려진 문제를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 현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면서도 영화적
가상의 세계 속의 문제로도 인식한다. 이러한 균형이 설국열차가 가지는 탁월성이다.
설국열차가 그리는 세계는 디스토피아다. 이 열차 안에서는 각자의 주어진
위치가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칸을 바꾸는 것은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시키고 공멸을 불러온다는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입되어있다. 각각은 하나의 부품이다. 자신의
역할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상상력은 철저히 거세된다. 단백질 블록을 만드는 이는 단백질 블록만 만든다. 교사는 교사로서 책무를 다한다. 기계가 손상되면 인간이 부품이 되어
일을 한다. 완벽한 균형, 그리고 균형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규범적 힘 – 이 균형이 훼손되는 것은 비정정상적인 상태이거나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 이 열차가 무한히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반복적으로’ 1년을 주기로 돌 수 있는 힘이다.
이 균형과 질서를 흔들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두 가지 유형의 균열의
시도가 존재하는데, 그러한 시도를 하는 이들을 ‘안’과 ‘밖’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커티스는 ‘안’의 사람이다. 그는 열차의 질서를 말그대로 ‘전도’시키려 한다. 머리와
꼬리를 뒤집는 것이다. 커티스는 윌리엄의 질문, “앞 칸에
가면 무엇을 하겠나?”에 대해 망설인다. 다른 장면에서 “우리는 앞 칸에 가면 그러지 않을거야”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거나, 꼬리칸의 동지들과 깔끔한 초밥을 하나씩 먹으면서 메이슨 수상에게는 단백질 블록을 주는 식으로 보여지는 것은
커티스의 ‘전도’이다. ‘안’의 사람인 커티스가 시도하는 ‘전도’는
단적인 ‘부정’이다. 이
‘부정’의 정신이 커티스를 열차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부정’의 정신은 “지금의
삶이 ‘아닌’ 삶”을
꿈꾸게 한다. 현실의 비참함을 거부하고 다른 현실을 꿈꾸게 하는 힘이 바로 ‘부정’의 정신 속에 배태되어 있다.

남궁민수와 요나는 ‘밖’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차 바깥의 삶을 꿈꾼다. 열차 바깥의
삶이 실제로 어떠할지에 대해 뚜렷한 전망이나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열차 내부의 질서를
‘전도’시키는 것이 아니라 열차 ‘바깥’, 열차 ‘너머’의 삶을 꿈꾼다. 그들은 이 디스토피아적 균형의 세계가 아닌 그 너머의
삶, 그것이 극심한 추위라는 고통을 동반하더라도 제 발로 걷고 햇살에 눈부심을 느끼는 삶을 꿈꾼다. 열차 안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온함이 존재한다. 거기에서는 부품으로서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죽진 않는다. 자신의 죽음 역시 체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무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밖’의 사람들은 이러한 ‘안온함의 세계’, 무한히 반복하고 순환하는 세계를 거부하고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은 실상 유의미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안’의 사람들의
부정의 정신과 ‘밖’의 사람들의 ‘너머’를 상상하는 ‘상상력’은 서로를 지지하고 추동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커티스에 의해 남궁민수와
요나는 행동의 반경을 얻게 되고, 커티스는 남궁민수와 요나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요나는 커티스를 일깨우고 커티스는 마지막 성냥을 건넨다. 그리고
민수와 커티스는 서로를 껴안으며, 요나와 타미를 지켜낸다. 지금이
아닌 삶을 생각하는 부정의 정신과 너머를 상상하는 상상력은 이렇게 결합하고 영화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으로서 설국열차 전반에 흐르고 있다.

그렇다. 설국열차는 아주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주제의식과 상업성 사이의 균형을 지키면서 자신의 탁월성을 뽐내는
영화다. 또한 아주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에 부정의 정신과 너머를 상상하는 상상력을 결합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로서 진실된 주장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만약 주어진 질서, 주어진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더 나아가
주어진 질서를 걷어차고 다른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두 가지 것들 – 부정의 정신과 상상력 -이 없이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이 뻔하고 진부한 주제의식을 통해
“내가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 솔직히 그런 질문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는 아주 적다는게 내 생각이지만 – 불러일으킨다면, 설국열차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