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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 근현대문학 일본문화총서 (글로세움) 4
한국일어일문학회 지음 / 글로세움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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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소설은 상징적인 이미지와 짧고 속도감 있는 문체, 무겁게 다루어질 주제의식을 가벼운 터치로 그려나간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공허감에 목말라하는 현대를 채워 주며,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세련되고 경쾌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의 소설은 일본 젊은이들이 공감하는 사랑을 그려냈을 뿐 아니라, 사회적 격동과 전환의 시대에 구시대적 가치관과 결별하는 새시대의 가치를 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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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기억, 지도 - KBS 특집 다큐멘터리 지도에 새겨진 2,000년 문명의 기억을 따라가다
KBS <문명의 기억, 지도> 제작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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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쉬는 시간마다 읽었던 책이 <문명의 기억, 지도>(2012)이다. 워낙 재미있는 내용이다보니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인데, 책 중간중간 사진들이 워낙 잘 들어가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였다. 책도 책이지만, 이런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촬영한 방송 관계자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적으로 희귀한 보물에 속하는 지도들을 직접 촬영하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일이 보통은 아니었을 텐데....


실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이호경 PD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좋은 다큐멘터리 뒤에는 좋은 연구자가 있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터였다. 인류가 남긴 방대한 지도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줄 수 있는 한국의 학자나 전문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p. 324)


물론 그 이후에 반전이 있어서, 좋은 연구자를 만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이런 문제들은 꽤 심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문적 기초가 튼튼해야 좋은 문화컨텐츠도 많이 만들 수 있을텐데..


아무튼 책 자체가 워낙 재미있어서, 시간이 되면 다큐멘터리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할 때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때 한 권 챙겨가면 지루할 틈이 없게 해주는 그런 책이다. 


Youtube에서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예고편(http://www.youtube.com/watch?v=tHH0fQ27t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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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3월
절판


그러니 니체의 '위대한 정치'라는 모험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실현을 요구하는 한, 아마도 오늘의 복지사회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을 듯하다. 그는 허무주의로서의 도덕적 이상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의지의 박약과 신경쇠약으로부터도 벗어나려 했으며, 폭력적이면서도 건강한 양심을 회복하려 했고, 강자와 약자에 대한 본질적인 구분과 위계질서를 세우려고 했다. 그 철학적 기반 위에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감행했다. 말하자면 철학적 이유가 정치적 제도에 대한 주장을 유발하고 도발한 셈이다. 그는 철학과 정치를 이으려고 했고, 하나를 다른 하나를 통해 완성하려고 했는데, 이 꿈이야말로 그의 운명적 꿈이었는지 모른다. -72쪽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니체의 반감은 단순히 그의 개인적 실수나 부주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긍정적이고 심오한 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민주주의 대해 때로는 소극적으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갖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니체는 철학적 사상을 현실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연장하고 확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는 철학적 사상의 현실화를 추구할 만하다고 믿었다. 최소한 텍스트 안에서는 그랬다. -230-231쪽

그런데 그의 사후, 20세기 철학사상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현실에 대한 철학의 우월성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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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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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견과 자아의 발견 - <그 후>를 읽고

 


 

<그 후>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후>는 사랑을 매개로 자신을 발견하고 정립해가는 한 인물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자아의 발견은 세계 속의 다른 존재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내면을 정립(자기세계)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자신의 내면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로서 감정을 보다 섬세하게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자아의 발견을 이끌어 내는데 촉매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결혼과 구분되는 자신의 감정에 몰두할 수 있는 방식의 사랑으로서 연애는 그러한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는 제목에서 암시하는 어떤 시간부터 그 후에 지속되는 한 인물의 자아의 발견과 정립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 후>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다이스케다. 그는 지적이고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다. 지적인 사람답게, 그는 자신의 예민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고통들을 빈틈없는 사고력과 예민한 감수성에 대해 지불해야 할 세금”(p. 16)정도로 생각한다. 다이스케는 외부에서 오는 온갖 자극들에 민감하며 그 민감성이 불러오는 피로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확고한 내면 세계를 구축한다. 나이가 서른이 되었음에도 그는 생활을 목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며 형과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가며 책을 읽고 사색하며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지키는데 몰두한다. 다이스케의 내면적 세계는 결혼이라는 주변 세계의 요구와 충돌한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형수는 다이스케를 사가와 일가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려 한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신의 집안에 도움이 될만한 지방의 부자의 딸과 결혼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이스케의 친구인 히라오카가 도쿄로 돌아오게 된다. “다이스케와 히라오카는 중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로,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 년 간은 거의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p. 22)사이이다. 히라오카의 결혼 역시 다이스케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졌다. 히라오카는 직장 생활의 실패로 몸이 아픈 아내 미치요와 함께 도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는 결혼 초기와 달리 소원해져 있다. 그리고 생활고와 소원한 부부 사이에서 미치요는 허전함을 느낀다. 미치요와 히라오카 그리고 다이스케의 미묘한 관계가 지속된다. 처음에는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한 돈을 매개로 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미치요의 오빠가 있었을 때, 세 사람은 함께 어울려 지냈고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모르지만 세 개의 동그라미는 돌면 돌수록 점점 좁아졌다. 결국 세 개의 동그라미가 한곳에 모여서 커다란 둥근 원이 되기 일보 직전”(p. 283)에 미치요의 오빠가 죽음으로서 <그 후>이 관계는 평형을 상실하고 표류한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보다 먼저 미치요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희생시키더라도 친구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 도리”(p. 336)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을 도운 것이다.

그 결혼을 도왔을 당시, 다이스케는 아직 어렸고 사고가 성숙하지 못했다. , 자신의 감정에 몰두하고 자신의 세계와 그 세계로부터 세상을 향해 지시하고 선택하는 힘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미치요가 법적으로 히라오카와 결혼한 상태이고 이 둘의 사랑이 친구에 대한 배신이자 가족의 명예를 훼손하고 더 실질적으로는 가족으로부터 받던 지원을 완전히 끊기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이스케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세계를 관철시키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오히려 삼각관계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형태의 관계, 가족과 사회적 시선의 무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 분명한 상황 같은 것들은 사랑을 매개로 한 자아를 더 강하게 만드는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다이스케가 미묘한 삼각관계에서 자신의 감정에 몰두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선언하는 과정 그리고 세계 내에 존재하는 타인들의 시선과 사회적 제도에 맞서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자아가 성장하고 표현되는 과정이자 그것을 지켜내려 분투하는 과정이다. <그 후>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극적인 순간들이 연속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 후>에서는 다이스케의 생각의 흐름과 그의 입을 빌려 감각적으로 표현되는 주변의 분위기를 통해 한 인간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로부터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즉 주변 세계에 함몰되지 않는 자아를 갖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후>는 외양으로 드러나는 스펙타클 보다는 내면의 고고한 힘이 흐르는 작품이자, 그것을 세련된 감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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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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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의 열정에 관하여 :: 열정과 타인

<적과 흑>[1]에 관한 생각

 


 

진정한 열정이란 열정 그 자체만을 생각하는 법이다.

파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열정들이 가소로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열정을 드러내는 데 골몰하기 때문에,

옆 사람을 늘 착각에 빠뜨리고 만다.”[2]

 

열정에 자신을 바치는 건 좋다.

그렇지만 열정도 없으면서 열정에 자신을 바치다니!

, 슬픈 19세기여! – 지로데.”[3]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악은 옳지 못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열심히 살아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부모들은 의사가 되어라, 판사가 되어라 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세련된 인간들의 요구는 무엇을 하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열정적으로 해라!’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세기 전 니체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lieber will noch der Mensch das Nichts wollen, als nicht wollen).”[4] 한 세기 전에도 우리의 열정이나 의욕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자 하는 문제는 꽤 심각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의욕하는 것, 즉 자신이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의 보편적인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이 무엇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대상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나의 열정, 나의 의욕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탕달은 『적과 흑』을 통해 열정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열정에 관한 몇 가지 유형들을 보여주는 인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주로 열정과 타인에 관계에 관한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 열정의 근저에 타인이 있다는 것, 나의 열정은 곧 타인의 열정 혹은 타인을 위한 열정일 수 있다는 것을 스탕달 1830년대 연대기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적과 흑>은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래도 가장 중심적인 이야기는 쥘리앵 소렐, 레날 부인 그리고 마틸드 간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그 중 열정과 타인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마틸드일 것이다.

 

마틸드는 라 몰 후작의 딸이다. 브장송 신학교 교장의 천거로 라 몰 후작의 비서가 된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라 몰 후작의 딸인 마틸드를 유혹한다. 마틸드는 당대의 가장 상류층만 모이는 살롱과 라 몰 후작의 집안을 한 손에 휘어잡고 흔들 수 있는”(424)사람이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빼어난 외모, 자신에게 구애하는 지체 높은 귀족 자제들, 아버지의 권력과 막대한 부, 뛰어난 지성, 마틸드는 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살롱의 대화들에서 늘 권태를 느끼고 하층민 출신의 명민한 청년 쥘리앵 소렐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그녀는 개성 없이 밋밋한 성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멋진 청년들에게 느끼는 유일한 불만이기도 했다. 그 청년들은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나 유행을 좇지 않는 것을 은근히 비웃곤 했는데, 그들이 그럴수록 그녀의 눈에는 평범하고 시시한 위인들로 비쳤다.”(451) 하지만 쥘리앵은 다르다. 마틸드가 보기에 쥘리앵은 혼자 행동하기만을 좋아하고”, “특별한 재능이 있으며, 그래서 남들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의사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남들을 경멸하기에마틸드는 쥘리앵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마틸드는 자신의 열정을 바칠 대상으로 쥘리앵을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쥘리앵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권태롭지 않았다. 위대한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 자신이 대견해서 매일 스스로를 축복했다. 이 기쁨에는 많은 위험이 뒤따를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럴수록 좋지 뭐! 훨씬 더 좋고말고!”(436)

 

그녀에게 열정이란 반복적이고 평균화된 일상에서 영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선조인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추도하기 위해 상복을 입었을 때, 그것은 평균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는 주변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경멸의 표시이자 자신은 영웅의 시대를 희구하며 영웅적인 삶을 살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시였다. 그래서 마틸드가 쥘리앵에게 표현하는 호기심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사랑은 일상적인 것을 벗어나서 영웅적인 면모를 구현하고 싶은 보다 근원적인 열정의 변형태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쥘리앵과 나 사이에서라면 결혼 계약서도 필요 없고, 부르주아식의 의례를 위한 공증인도 필요 없어. 우리 둘 사이에서라면 모든 게 영웅적인 것이 돼. 모든 것이 정해진 틀을 떨치고서 이루어지는 거야. 쥘리앵이 귀족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이것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사랑과 같은 모습이지. 당시의 가장 탁월한 남자였던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사랑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다름없단 말이야. 쥘리앵을 사랑하는 게 내 잘못이겠어? 궁정 귀족 청년들이란 하나같이 <진부한 예법>만 추종하는 데다, 상궤를 조금이라도 벗어난 모험이라면 그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사람들인걸.”(430)

 

마틸드가 쥘리앵에 대한 상념에 젖을 때면, 그녀는 일상적인 안락함의 감옥에 안주하는 귀족 자제들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런 모습이 얼마나 영웅적인 것인지를 생각한다. 마틸드에게 쥘리앵은 사랑의 대상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열정을 쏟을 대상이다. 영웅적인 방식으로 이 안온한 상류사회에 파문을 일으킬 자기 자신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사랑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쥘리앵이라는 하층민 출신의 비범한 청년은 파문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대상이다. 마틸드가 보기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라 몰 후작의 딸이 목수의 아들에게 헌신한다 라는 사랑 이야기야 말로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한 영웅적인 모습인 것이다.

마틸드에게 자신을 완전히 쥘리앵에게 바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대한 완전한 파괴이다. 자신이 목수 아들에게 헌실할수록 그 영웅적인 면모는 더욱 빛을 발한다.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다는 만족감”(579)이 마틸드에게 느껴질 때, 그것은 이미 사랑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상에 대한 완전한 소유나 그 대상과의 완전한 합일이라는 사랑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만족감’, 즉 내가 하층민을 사랑하고 있고 그런 자기 자신이 상류 사회의 일상적인 관례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음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틸드의 사랑, 아니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영웅적인 모습으로 일상의 관례들을 파괴하고 싶다는 영웅적인 면모에 대한 맹목적 열정은 귀족적이기 보다는 노예적인 것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노예란 수동적인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을 가진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치 기준에 대한 반동을 통해 가치의 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좋음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노예에게는 늘 타인이 필요하다. 마틸드의 열정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주인의 열정이라기 보다는 타인의 열정, 타인에 의한 열정, 타인들에 비친 자기 자신을 위한 노예적 열정이다. 이런 마틸드의 열정은 쥘리앵이 감옥에 갇히자 더욱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마틸드는 자랑스러운 어떤 감정에 도취해 있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자존심마저 압도할 정도였다. 그녀는 삶의 매 순간을 평범치 않은 어떤 행동으로 채우기 위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쥘리앵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긴 대화 내용은 극히 별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계획들로 채워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쥘리앵)는 영웅주의에 지쳐있었다[…] 반면에 마틸드의 오만한 영혼은 자신을 지켜볼 군중과 자신에게 찬탄해 줄 <타인들>을 필요로 했다.”(642)

 

마틸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일탈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일 때, 이를 찬탄해 줄 타인들이었다. 그녀가 영웅적인 면모를 구현하고 싶어했던 것, 상류층의 살롱에서 권태를 느낀 것은 그들의 그녀에 대한 예찬은 이미 식상한 것이었거나 입에 발린 관례적인 것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경탄이나 찬탄의 대상으로서 자신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열정은 <타인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경외의 대상으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열정은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봐 줄 타인들이 없다면 그녀의 열정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틸드의 열정은 불행한 것이라고, 또 마틸드는 불행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그녀의 열정에는 늘 <타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불행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그녀만의 고유한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타인들>에게 찬탄받을 자기 자신에 도취되거나 그런 상념에 젖어 어떤 일/대상에 열정적인 수많은 마틸드들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열정은 불행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런 열정은 치료되어야 할 이기 보다는 이해되어야 할 문제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1] 스탕달, 『적과 흑』, 임미경 옮김, 열린책들, 2009. (이하 본문에 페이지수만 표기하거나 각주에 페이지 수만 표기)

[2] pp. 319-320

[3] p. 570.

[4] F.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KSA5, Giorgio Colli und Mazzino Montinari(Hg.),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2007, p. 412.;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6, p.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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