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 HD 리마스터링 (2disc)
곽경택 감독, 유오성 외 출연 / 다일리컴퍼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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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우정의 조건

:: 영화 <친구>[1]를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은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2]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정이 우리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고 우정이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친구가 없는 삶은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또한 친구를 통해 우리는 삶의 사소한 부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또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관의 일부분을 형성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친구 그리고 우정은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고 만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는 충분히 가치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우정을 삶에서 간직하는 일은 드물다. 영화 <친구>는 친구와 우정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가를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어렸을 적, 네 명의 친구(준석, 동수, 중호 그리고 상택)은 함께 바닷가에 가서 헤엄을 치고 거리를 누비며 꾸밈없이 함께 어울리는 친구였다. 그 넷은 함께라서 행복했다. 이런 어렸을 적의 우정은 고등학교에 시절부터 미묘한 긴장이 흐르는 관계로 변한다. 학교의 통인 준석과 부통인 동수 사이의 긴장은 진숙을 사이에 두고 절정에 달한다. 장의사 아버지를 둔 동수는 영향력 있는 조직폭력배의 아들로 태어난 준석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택에게 진숙을 넘겨버린 준석을 두고 동수는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고 따지며 대들어보지만 죽고싶나라는 준석의 위압적인 말투를 따라하는 것으로 그 긴장은 잠정적으로 봉합된다. 세월이 지나, 동수와 준석은 건달이 되었고 상택과 중호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들이 공유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고 그들은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이 살아가려고 했던 방향은 너무 달랐다. 상택은 학문의 길을 걷게 되었고 중호는 적당히 살림을 꾸려나가는 소시민으로, 준석과 동수는 건달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준석과 동수의 길도 달랐다. 준석은 자신의 아버지의 부하였던 사람 밑으로, 동수는 준석의 아버지를 배신한 사람 밑으로 들어간다. 준석과 동수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였고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동수는 준석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준석도 그 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이 우정은 파국으로 종결된다.


 넷의 우정, 특히 동수와 준석 사이의 우정은 왜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둘의 관계가 우정을 빙자한 수직적 위계관계였기 때문이다. 준석이 통이었다면, 동수는 부통이었고 동수는 이 사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열등감을 가졌다. 이 열등감의 근원에는 준석을 넘어설 수 없다는, 다시 말해 관계에 내재해있던 위계질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완전한 우정은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에 근거한다. 그의 말을 옮기자면, “친구는 모든 점에 있어서 상대방으로부터 똑같은 것 혹은 유사한 것을 받게될 것이고 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3]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물질적 이익을 염두해 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이 갖춰야 할 덕들(용기와 절제 그리고 지혜 등)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덕을 상대방도 역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관계의 동등성에 기반한 우정만이 완전한 우정이라고 불릴 수 있을 뿐, 그 이외의 우월성이나 불균등한 관계에 근거한 우정은 완전한 우정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준석과 동수의 관계는 동등한 것이 아니었다. 준석은 관계를 지배하는 힘이었고 동수는 그 힘에 눌려있거나 도전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우정은 언제나 파국에 이를 수 밖에 없거나 불온한 형태의 의리라는 이름으로 치장될 뿐이다.


 그렇다면 상택이와 준석이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그들의 관계는 참된 의미의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준석은 상택에게 친구아이가,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고 말하곤 했다. 준석이 상택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상택이 동수처럼 자신과 동류의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고 준석 자신도 다른 방식의 삶을 살수만 있다면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주먹을 가진 준석은 우월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상택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있었고 그런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다는 욕망 내가 그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상택을 통해서 대리만족 하고자 하는 욕망 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 역시 참된 의미의 우정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리자면, 우정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은 상대방이 잘 되길 바라는 선의이다. 준석과 상택은 서로가 잘되길 바라는 선의를 가졌을 수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상택이가 준석이 엇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구체적으로 노력했던 순간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반항해 학교를 떠난 준석에게 학교로 돌아오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니는 니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게라고 준석과 대화를 나눈 후, 그들은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이는 더 이상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안부를 묻고 집안의 애경사에 참가해 자리를 지켜주며 고향에 내려가면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사이가 된 것이다. 서로의 삶을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관계를 우리는 우정의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친구의 삶이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관하는 자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상대방에 대한 선의가 그저 내면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마음 속으로 백만장자를 꿈꾸는 허영심에 들뜬 사람의 공상과 그리 다른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잘되길 바라는 선의를 행동으로 표현할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참된 우정의 조건이 형성될지 모른다.

 동등한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한 선의를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할 때, 그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나의 친구이고 우리의 관계가 참된 우정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친구, 이런 우정은 언제나 드물고 희귀했으며, 우리는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안정한 우정의 끈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 동수, 준석, 중호 그리고 상택은 이 불안한 외줄타기에서 떨어진 평범한 사내들이었음에 틀림없다.    



[1] 곽경택, <친구>, 2001.

[2]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창우 외 옮김, 이제이북스, 2007, p. 277.(1155a)

[3] 같은 책, p. 285. (1156b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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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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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에도 깊이가 있을까? 이 자리를 빌어 소개할 밤이 선생이다는 이 질문에 대한 노학자의 탁월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말에도 깊이가 있다. 한 사람이 하는 말, 쓰는 글은 그 사람의 고유성을 드러내주는 좋은 방식 중에 하나인데, 그 사람의 삶의 기억들과 사유의 흔적들이 하나의 단어와 문장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말의 깊이가 있고, 말의 깊이가 한 사람의 삶의 깊이를 견줄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면, 보다 깊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기억의 두터움과 타인과 사회의 맥락을 살피는 섬세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현산 선생님의 글은 말의 깊이와 삶의 깊이를 보여주는 전범(典範)이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기억을 단정하고 아름다운 말로 녹여내며 우리에게 이렇게 조심스럽게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단정적으로 결론짓지 않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각자의 현재를 두텁게 만들기를 권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눈앞의 시간, 눈앞의 고통, 눈앞의 이해타산에만 머물지 않기를, 더 나아가 잊혀진 시간, 타인들의 고통과 삶을 자기의 것으로 껴안고 사는 삶이 깊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깊은 겨울 밤, 자신의 말과 삶의 깊이를 생각해보며 노학자의 말의 깊이와 삶의 깊이를 자신의 것과 견주어 보는 것도 추위를 이겨내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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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읽을 책 목록들을 골라보고 있었다. 주제별로 골라보기로 하다가 그런 건 여기서 리스트를 만드는게 무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금새 포기했다. 그냥 손에 집히는 대로 몇 권을 추렸고 이를 꼼꼼히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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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가장 경이로운 자연의 걸작
소어 핸슨 지음, 하윤숙 옮김 / 에이도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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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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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적과 흑 - 하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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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11,800원 → 10,620원(10%할인) / 마일리지 5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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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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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에 대한 나의 편향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 숲>을 읽고

 

 2013년에는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의 신작 소설을 읽었지만 나는 원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닌데다가, 하루키라는 이름에 대해서 그저 풍문으로 들었던 반감이 있었던지라 그리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노르웨이 숲>을 읽게 된 것 역시 어떤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하루키를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읽고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르웨이 숲>을 읽는 내내 여기에 나온 인물들의 방황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마음 속의 구멍을 가지고 산다. 그 구멍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관계된 것인 것처럼 보인다. ,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p. 48.)는 것을 조금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이 <노르웨이 숲>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죽음이라는 그 공기 덩어리를 내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 봄을 보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심각해진다고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나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죽음이란 심각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런 숨 막히는 배반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p. 49.)

 

 <노르웨이 숲>이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죽음이라는 심각한 사실과 이를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려 하는 인물 특히 와타나베-의 태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와타나베는 심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삶의 일관된 태도인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는 격정이 보이지 않는다. 와타나베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감정의 폭발이나 격한 반응 같은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구멍을 가진 사람들은 와타나베에게 자신들의 구멍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지만 그것이 탁월한 의미에서 소통이나 이해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자신의 비애를 눈물이나 통곡으로 표현한다면 비록 언어적으로 표현된 명료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어떤 격정과 울림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방식도 소통이나 이해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겠지만, 그런 실패가 하찮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도달하려는 소통이해에 관한 가장 인간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가 가진 심각해지지 않으려는 태도는 그가 근본적으로 세상을 향해 열려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와타나베와 나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 있는 인간이야. 오만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야 있겠지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거기에 대한 것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어.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어.”(p. 351.) 주변 사람이 보는 와타나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혼란스러운 세계와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낸다는 것은 의미있는 성취다. 세상의 혼돈과 비참함을 견딜 수 있는 것 역시 자신만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이것을 마냥 반기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만의 세계가 창문 없는 모나드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숲>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어려워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인 것처럼 보인다. 창문 없는 모나드 같은 그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사는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아니, 도대체 이것이 문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해소통의 가치를 왜 높이 평가해야하며 그것이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와타나베라는 인물이 하나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나의 편향을 밝히자면, 나는 와타나베가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와타나베의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와타나베를 비난하는 것은 아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와타나베를 내버려두는 것 역시 현명한 일은 아니다. ‘이해소통이 없는 삶은 그것의 실제적인 달성 여부와 무관하게 살만한 가치가 없는 삶이다. 왜냐하면 와타나베의 말처럼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차피 사라져 없어질 삶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진실된 노력으로 채워져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더 없이 인간적일 수 있다. ‘죽음이라는 허무의 극단에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소통이나 이해앞에서 좌절할 때만 숭고해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나의 편향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도록 살 것이다. 이것이 나의 와타나베에 대한 편향 아닌 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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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당연히 <어바웃 타임>을 보고 싶었지만, 그리 발빠른 편이 아니라 연인들을 위한 영화 예매에 실패하고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변호인>을 봤다. 영화를 보고 마음이 무거웠다. <변호인>에서 그리고 있는 우리의 굴곡진 역사와 그 역사 가운데 살았던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또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영화 보는 내내 눈앞에 겹쳐지면서 역사의 반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어떤 카타르시스보다는 걱정과 우려를 짊어지고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걱정과 우려의 근원은 사실 영화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변호인>을 좋은 영화라고 말해도 되는걸까? 라는 생각에 선뜻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변호인>은 어떤 영화적 상상력 혹은 감독의 독특한 시선,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감상자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만한 부분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우리가 가벼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상기시켜주면서 우리가 품고 있는 자연스러운 생각들(민주주의, 헌법, 기본권 등의 중요성, 독재나 고문의 야만성)이 힘겹게 우리에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즉 우리들의 상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자리잡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몰상식의 시간들이 있었는지를 확인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불행을 말하고 있고 지금 누리는 약간의 안락함에 담긴 시간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상기시켜주고 잊지 말라고 권유하며, 그것들의 유산을 지키라고 말하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우리의 불행잘 표현된것이었는가? 내가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잘 표현된’, 즉 영화적 상상력이나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라고 불릴만한 것들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변호인>과 유사하게 송강호 씨가 출연했던 <효자동 이발사>에는 풍자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 영화가 재미있었고 오래 전에 본 영화이긴 하지만 불행했던 시기에 한 시민이 겪었던 고통과 불합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지금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변호인>은 다큐멘터리라고 봐도 무방한 영화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에는 우리의 상상력이나 생각하는 힘을 자극하는 요인들은 별로 없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확인할 뿐이다. 이것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상징을 통해서건, 은유를 통해서건) 무엇을 생각할 때, 그것은 지금 눈앞에 바로 보이지는 않는 저기 너머의 것이나 숨겨져 있는 것들을 눈앞에 있는 것으로 끌어올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무엇을 없는 것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 눈앞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눈앞에 자신의 기본권을 침해 당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안녕하다고 해서, 혹은 내 주변인들이 모두 안녕하다고 해서 세상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때, 혹은 상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없는 것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폭넓은 의미에서 사유의 힘(눈에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삶을, 내 눈 앞에 미시적인 세계가 아니라 미시적인 세계의 조건이 되는 거시적 세계를 생각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느끼게 하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우리의 상식들에 놓인 역사적 흔적들, 시간의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영화관을 나선 이후에 감상자들이 독자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도록 유도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지나왔던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떤 반복을 경험하고 있고 안녕하지 못함을 체감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반복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사유의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즉각적인 고통들 혹은 눈앞에 보인 고통이나 불합리에는 반응할 수 있을지 몰라도 더욱 세련된 방식의 독재나 은연 중에 체화된 고통에는 대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돼지국밥 집 아주머니의 따뜻함을 기억한 당신의 돈을 지켜주던 변호사가 불합리에 맞서는 변호사가 된다는 이 역사적인 이야기에서 나는 아쉬움을 느낀다.

 

사실 아쉬움은 감독에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아쉬움은 이 정도라도 충분히 해내야 한다는, 그러니까 더 큰 상상력이나 사유의 힘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이 정도는 잊지 말고 살자는 권유나 다짐을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꽉막힌 현실의 갑갑함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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