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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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에 대한 나의 편향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 숲>을 읽고

 

 2013년에는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의 신작 소설을 읽었지만 나는 원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닌데다가, 하루키라는 이름에 대해서 그저 풍문으로 들었던 반감이 있었던지라 그리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노르웨이 숲>을 읽게 된 것 역시 어떤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하루키를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읽고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르웨이 숲>을 읽는 내내 여기에 나온 인물들의 방황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마음 속의 구멍을 가지고 산다. 그 구멍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관계된 것인 것처럼 보인다. ,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p. 48.)는 것을 조금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이 <노르웨이 숲>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죽음이라는 그 공기 덩어리를 내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 봄을 보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심각해진다고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나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죽음이란 심각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런 숨 막히는 배반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p. 49.)

 

 <노르웨이 숲>이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죽음이라는 심각한 사실과 이를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려 하는 인물 특히 와타나베-의 태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와타나베는 심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삶의 일관된 태도인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는 격정이 보이지 않는다. 와타나베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감정의 폭발이나 격한 반응 같은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구멍을 가진 사람들은 와타나베에게 자신들의 구멍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지만 그것이 탁월한 의미에서 소통이나 이해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자신의 비애를 눈물이나 통곡으로 표현한다면 비록 언어적으로 표현된 명료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어떤 격정과 울림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방식도 소통이나 이해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겠지만, 그런 실패가 하찮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도달하려는 소통이해에 관한 가장 인간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가 가진 심각해지지 않으려는 태도는 그가 근본적으로 세상을 향해 열려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와타나베와 나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 있는 인간이야. 오만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야 있겠지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거기에 대한 것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어.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어.”(p. 351.) 주변 사람이 보는 와타나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혼란스러운 세계와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낸다는 것은 의미있는 성취다. 세상의 혼돈과 비참함을 견딜 수 있는 것 역시 자신만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이것을 마냥 반기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만의 세계가 창문 없는 모나드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숲>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어려워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인 것처럼 보인다. 창문 없는 모나드 같은 그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사는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아니, 도대체 이것이 문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해소통의 가치를 왜 높이 평가해야하며 그것이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와타나베라는 인물이 하나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나의 편향을 밝히자면, 나는 와타나베가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와타나베의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와타나베를 비난하는 것은 아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와타나베를 내버려두는 것 역시 현명한 일은 아니다. ‘이해소통이 없는 삶은 그것의 실제적인 달성 여부와 무관하게 살만한 가치가 없는 삶이다. 왜냐하면 와타나베의 말처럼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차피 사라져 없어질 삶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진실된 노력으로 채워져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더 없이 인간적일 수 있다. ‘죽음이라는 허무의 극단에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소통이나 이해앞에서 좌절할 때만 숭고해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나의 편향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도록 살 것이다. 이것이 나의 와타나베에 대한 편향 아닌 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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