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당연히 <어바웃 타임>을 보고 싶었지만, 그리 발빠른 편이 아니라 연인들을 위한 영화
예매에 실패하고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변호인>을
봤다. 영화를 보고 마음이 무거웠다. <변호인>에서 그리고 있는 우리의 굴곡진 역사와 그 역사 가운데 살았던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또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영화 보는 내내 눈앞에 겹쳐지면서 역사의 반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어떤 카타르시스보다는 걱정과 우려를 짊어지고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걱정과 우려의 근원은 사실 영화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변호인>을 좋은 영화라고 말해도 되는걸까? 라는 생각에 선뜻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변호인>은 어떤 영화적
상상력 혹은 감독의 독특한 시선,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감상자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만한 부분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우리가 가벼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상기시켜주면서 우리가 품고 있는
자연스러운 생각들(민주주의, 헌법, 기본권 등의 중요성, 독재나 고문의 야만성)이 힘겹게 우리에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즉 우리들의 상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자리잡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몰상식’의
시간들이 있었는지를 확인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불행’을 말하고 있고 지금 누리는 약간의 안락함에 담긴 ‘시간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상기시켜주고 잊지 말라고
권유하며, 그것들의 유산을 지키라고 말하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우리의 ‘불행’은 ‘잘 표현된’ 것이었는가? 내가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잘
표현된’, 즉 영화적 상상력이나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라고 불릴만한 것들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변호인>과
유사하게 송강호 씨가 출연했던 <효자동 이발사>에는
풍자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 영화가 재미있었고 오래 전에 본 영화이긴 하지만 불행했던 시기에
한 시민이 겪었던 고통과 불합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지금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변호인>은 다큐멘터리라고
봐도 무방한 영화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에는 우리의 상상력이나 생각하는 힘을 자극하는 요인들은 별로 없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확인할 뿐이다. 이것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상징을 통해서건, 은유를
통해서건) 무엇을 생각할 때, 그것은 지금 눈앞에 바로 보이지는
않는 저기 너머의 것이나 숨겨져 있는 것들을 눈앞에 있는 것으로 끌어올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무엇을 없는 것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
눈앞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눈앞에 자신의 기본권을 침해 당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안녕하다고 해서,
혹은 내 주변인들이 모두 안녕하다고 해서 세상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때, 혹은 상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없는 것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폭넓은 의미에서 사유의 힘(눈에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삶을, 내 눈 앞에 미시적인 세계가 아니라 미시적인 세계의 조건이 되는 거시적 세계를 생각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느끼게 하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우리의 상식들에 놓인 역사적 흔적들, 시간의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영화관을 나선 이후에 감상자들이 독자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도록 유도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지나왔던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떤 반복을 경험하고 있고
안녕하지 못함을 체감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반복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사유의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즉각적인 고통들 혹은 눈앞에
보인 고통이나 불합리에는 반응할 수 있을지 몰라도 더욱 세련된 방식의 독재나 은연 중에 체화된 고통에는 대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돼지국밥 집 아주머니의 따뜻함을 기억한 ‘당신의 돈을 지켜주던
변호사’가 불합리에 맞서는 변호사가 된다는 이 역사적인 이야기에서 나는 아쉬움을 느낀다.
사실 아쉬움은 감독에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아쉬움은
이 정도라도 충분히 해내야 한다는, 그러니까 더 큰 상상력이나 사유의 힘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이 정도는 잊지 말고 살자는 권유나 다짐을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꽉막힌 현실의 갑갑함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