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하버드대 종신교수 석지영의 예술.인생.법
석지영 지음, 송연수 옮김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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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을 지나고나서, 살아가는 데 있어 '멘토'로 삼을 만한 사람들의 글은 읽지 않았다. 20대 중후반 이후 아빠,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중증병환과 이를 늘 염두하고 살아야 하게 된 내 삶은 내 의지대로 내가 꾸려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글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나는 '힐링' 붐을 타고 토닥여주는 책들 또한 읽지 않는다.

 

그렇게 약 10년이 지나고, 꿈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나는 이제 39, 빼도박도 못하는 애 둘 딸린 아줌마가 되었다. 인생의 목표라는 것을 세울 수 없었던 시기에 적응해서인지, 아니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내 인생 후반부를 걱정하는 그런 아줌마 말이다. 이렇게 시집과 친정, 아이들 뒤꽁무니를 종종 거리다 내 인생이 끝나버리면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찰나, '아시아 여성 최초 하버드 법대 종신교수'라는 내 나이 또래 여성, 석지영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같으면 또 한명의 엄친딸이겠군, 하며 넘겼을 기사였는데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인지 엄친딸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인지 그녀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예상 밖으로 엄친딸의 성공신화를 다룬 그런 책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룬 대단한 성과에 비해, 간결하면서도 우아하고 담담하게 그녀가 담아낸 자신의 이야기는 굉장한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책에는 크게 미국 이민 전 가족의 전사(前史), 미국 이민 후 발레학교에 가기까지의 어린 시절, 사춘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해준 발레학교와 줄리어드 예비학교 시절, 문학을 전공했던 대학과 대학원 시절, 최종적으로 법조계에 진출해 법대교수가 된 뒤의 이야기, 그리고 이민자,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자신이 젊은이들과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내가 처음에 감동받은 부분은,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가 낯선 환경에 처해지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문학과 독서, 음악과 발레 같은 '클래식'이 한 인간을 치유하는 데 얼마나 힘이 되는지, 새삼 깨닫고 클래식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되는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젊은이들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주는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공담을 다룬 보통의 책들은 자신이 얼마나 노력을 했고, 운이 따랐고, 힘이 들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고...이런 내용들이라 굉장히 교조적인데, 석지영 교수는 솔직하게 '일과 가정을 균형있게 조화롭게 꾸릴 수 없음'을 인정한다. 나는 성공한 여성들의 책에서 이렇게 그 불편한 진실을 심플하게 인정하는 책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많은 위안을 받았다.

 

또한,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어떤 일에 뛰어나고자 하는 이에게 지름길이란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그러므로 당신의 목표가 그렇게 높다면,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을 권하고 싶다.(P259)" 라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지만, 특별히 와닿았던 이유는 (내가 직업상 더 예민했겠지만) 그녀의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담담한 문체가 그녀가 책에서 내내 말했듯이 굉장히 오랜 시간 연습해서 이루어낸 성과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실제로 해보니까, 지름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말은 의외로 굉장히 와닿았다.

 

내가 선택해서 내가 만족하는 내 직업이 내게, 그리고 어쩌면 사회 전체적으로 굉장히 가치있는 일이지만 흔히 말하는 '사'자가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직종이 아닌 관계로 나는 피해의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공부잘한 모범생 딸이었던 내가 이제는 더이상 울 엄마의 자랑할 만한 딸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시집에서 대접받는 그런 직종, 친정에서도 내 일을 우선시해주는 그런 직종,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그런 직종에 내가 종사했더라면 하는 그런 마음을, 이 책을 통해 일거에 해소했다고까진 할 수 없지만, 아무도 해주지 못했던 위안을, 토닥임을 받았달까. 나는 내가 일과 가정을 둘다 잘 해나갈 수 있고, 내 일을 통해 대접도 받고 성공도 하고 싶었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 살면서 부딪히는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일들은 내가 그럴 수 없음을 늘 깨우쳐줬다. 여기서 오는 자신감 상실, 불쾌감, 우울함 등은 누구 엄마, 누구 와이프, 누구 딸, 누구 며느리 이런 거 말고 '나' 자신으로 살면서 굉장히 나를 힘들게 하는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지 못해도 괜찮다, 이건 내 잘못도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그냥 내가 그동안 이 일을 하면서 즐거웠으면 됐다...는 생각을 자기위무적인 태도가 아니라, 담담하고 우아하게 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그런 위안을 받았다. (물론 나는 그만큼 노력을 다했나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게 나이듦의 여유인 걸까.

흔히 간과하지만, 엄친딸이라고 해서 모두 완벽할 수는 없고, 모든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매력이 듬뿍 담긴 이 책을 통해, 내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고, 내 딸과 아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최고가 아니라 삶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사실 '사람답게' 사는 삶이 아닐까. 석지영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성공담이나 자서전이 아닌 우리 모두의 불완전함, 그 불완점한을 받아들이고 즐기면 자유로워진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거 같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남은 삶을 이렇게 살고 싶다.

 

이런 이유로, 매우 인상적이었던 이 책을 모든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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