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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7월
평점 :
'신본격 추리소설의 기수'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재기발랄한 단편집이다. 이 책은 작가의 주종목인 본격추리물이 아니다. 아니, 그런 비슷한 느낌의 단편이 들어있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가 '작가를 소재'로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기발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해 자유롭게 글로 엮은 단편집이다. 때론 유쾌하고, 오싹하고, 코믹하고, 애처롭고 그리고 미스터리하고...한 장르로 특정할 수 없는 작가만의 다채로운 변덕스러움이 여덟 개의 단편에 재치있게 담겨 있다.
첫 단편 <글 쓰는 기계>부터 시선을 확 잡아끈다. 기발하면서 소름끼친다. 대성 가능성의 소질은 있지만 나태하거나 집필이 더딘 작가에게 제시하는 궁극의 처방전... 정말 그런 극한 상황에 내던져지면 누구라도 인기 작가,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리라. 첨에는 극렬한 저항의 몸부림을 치다가도 차츰 성취감에 빠져 저절로 그 특수한 환경의 포로가 되지 않을까? 내가 작가라면 나라도 그러겠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리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죽이러 오는 자>는 심오하고 섬뜩하다. 삼 년 전 절필한 비인기 컬트 작가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는 열혈 여고생 독자, 접점이라곤 보이지 않는 열 건의 묻지마 연쇄살인...그리고 죽이러 오는 자...악평에 대한 반응은 광기의 표출인가...마지막 피를 부르는 함축적인 장면이 오싹함을 더해준다.
<마감 이틀 전>은 본격추리 작가의 창작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 본격추리 작가에게 트릭의 개발은 숙명이다. 플롯은커녕 마땅한 트릭도 구상 못한 채 이틀 후 마감이라는 운명의 시계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 머리를 쥐어짜내며 괴로워하는 창작자의 고통이 책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더욱 애처롭다. 십 년간 창작 노트에 메모해둔 애교 수준의 다양한 트릭을 감상하는 재미가 이 단편의 포인트.
작가를 꿈꾸는 문예부 고등학생과의 인터뷰에서 인기 작가 <기코쓰 선생>은 출판계의 암담한 미래상을 들어 작가의 길을 반대하는데...책의 유통 구조 포함 출판업계의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는, 이 책에서 가장 사회성 짙은 단편.
무명 신인 작가가 편집자의 강압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고향 서점에서 사인회를 하면서 생긴 해프닝을 그린 <사인회의 우울>은 한마디로 엽기 코미디이다. 악몽의 사인회라고나 할까...사인받는 사람 중에 정상인이 없다. 이것은 사인회인가 주최측의 농간인가? ㅎㅎ 과연 숨겨진 진실은? 미친듯이 웃으면서 읽었다.ㅋㅋ
두 작가가 허물없이 대화하는 <작가 만담>은 작가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심사를 신변잡기식 나열로 허심탄회하게 주고받는 유쾌한 대담이고,
늘 이야기 소재에 목마른 에세이 작가는 택시 운전사로부터 묘한 경험담을 듣는다. 구미가 당겨 메모를 하는 그에게 택시 운전사는 <쓰지 말아주시겠습니까?>하고 정중히 부탁한다. 하지만 그 경험담은 친한 소설가에게 전해져 베스트셀러의 한 에피소드로 등장하는데...타인의 얘기를 함부로 외부로 발설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는 섬뜩한 단편.
한 소설가가 창작의 자극을 얻기 위해 드림박스라는 기계에 들어갔다가 의료 사고로 깨지 못하고 꿈 안에서 머무는 <꿈 이야기>는 다분히 동화적이다. 이야기란 개념 자체가 없는 꿈속 나라에서 대중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전파하며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소설가의 몽환적인 얘기.
짤막한 단편들을 곶감 빼먹듯 하나하나 재밌게 읽었다. 그동안 학생 아리스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로 대표되는 작가의 본격추리물만 읽다가 전혀 색다른 내용의 책을 접하니 무척이나 신선하다. 개인적 'BEST 3'은 <글 쓰는 기계>,<마감 이틀 전>,<사인회의 우울>이다. 작가라는 직업의 세계와 그들이 겪는 고충과 애환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 좋았고, 늘 본격추리물로만 접하던 작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만난 게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