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제목부터 기상천외한 이 책은 국내 소개되는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다. 작가의 전작들은 강렬했다. 눈 덮인 산장이라는 클로즈드 서클의 본격 미스터리인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두 젊은 남녀의 순애보를 배경으로 강령회 트릭이 돋보인 <지나가는 녹색 바람>. 두 권 모두 기상천외한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반칙이냐 교묘한 테크닉이냐 말이 많았다. 물론 난 후자이지만...ㅎㅎ 이 책은 패러디, SF, 본격추리, 바카미스 트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가의 신선한 발상과 재치가 돋보이는 미스터리 단편집이다.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표제작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이다. 1944년, 태평양전쟁 말기, 전황이 불리한 일본의 신무기 개발 현장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루는데 흉기에 초점을 맞춘 해결책이 기발하다. 누구는 어이없다고 하겠지만 때론 이런 시공간을 뛰어넘는 고차원적인 발상이 유쾌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아주 맘에 드는 단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걸작 <ABC 살인사건>을 패러디한 <ABC 살인> 역시 재밌게 읽었다. A - B로 이어지는 묻지마 살인이 발생하자 빚에 쪼들리는 주인공이 범죄에 편승해 D 지역에 사는 동생 D를 죽여 재산을 가로채려는 범행을 계획하고, 그러기 위해서 C 지역에 사는 C를 살해한다는 얘기인데....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은 법...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예상치 못한 전개가 경악과 실소를 동시에 자아낸다. 아연실색이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인사 포함 모든 직장인을 통제, 관리하는 '마더컴'이라는 슈퍼컴퓨터의 변덕스러운 편애로 인해 사내에서 점점 고립돼가는 주인공의 비애를 그린 SF 단편 <사내 편애>는 씁쓸한 여운을 주는 블랙 코미디이다. 기계에 인간의 감정과 가치관까지 지배당하는 첨단 과학 문명의 부조리한 단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마지막 대사 한 줄이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원룸에서 피살된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의 머리맡에 놓인 케이크와 입에 꽂힌 기다란 파 한 대. 이 기묘한 현장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사이코패스 살인자의 광기에 찬 불순한 의도를 보여주는 섬뜩한 장면을 연출한다. 

휴가차 방문한 시골 할머니 댁의 늙은 고양이가 매일 밤 한 곳을 응시하는 이유를 차분히 추리해서 범죄 현장을 밝혀내는 <밤을 보는 고양이>는 가볍게 즐기기 좋은 정석 추리물이고,

전작들에서 뛰어난 탐정역을 소화한 네코마루 선배가 등장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은 기대치에 비해서는 다소 아쉽다. 범인의 정체와 트릭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초심자용 추리소설로 적당한 수준.

한마디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수록된 단편들이 모두 기본 이상의 재미와 완성도를 자랑하고, 일부 단편들은 기발한 착상과 흥미로운 전개,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기억에 남는다. 오랜만에 구라치 준의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어 유익한 독서였다. 그의 작품이 좀 더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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