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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아저씨 ㅣ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8년 4월
평점 :
아놀드 로벨은 글과 함께 그림도 그리는 동화작가이다.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이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화려한 색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정말 그림이 멋진 것도 아닌데 그 그림과 함께 글을 읽으면 따뜻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더 많은 색을 쓴다고 해서, 그림의 기교가 더 뛰어나다고 해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어릴 때는 몰랐을까?
어린시절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36색 크레파스였다. 내게 있는 것은 12색 크레파스였는데 그것도 오빠가 물려준 거라 몽당 크레파스여서 엄마에게 조르지도 못하면서도 학교에 미술시간이 있는 날이면 등교하면서 소원을 빌고는 했다. 내 손에 든 크레파스가 36색으로 바뀌기를. 하지만 크레파스는 키가 커지지도 않았고 색이 늘지도 않았다. 색이 많은 크페파스를 갖고 싶었던 이유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였는데 반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의 크레파스가 36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럴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믿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난다.
크레파스에 얽힌 내 어린시절의 엉뚱함을 떠올리게 한 아놀드 로벨의 <코끼리 아저씨> 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기 코끼리는 부모님의 여행에 감기가 걸려 따라가지 못한다. 콧물도 나오고 목도 아픈 아기 코끼를 데려가기에는 바다여행이 너무 힘들 것 같아 아기 코끼리는 집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는 맑던 하늘을 감춰버리고 폭풍우와 바람으로 가득 채워 놓는다. 그날 아기 코끼리의 부모님은 돌아오시지 못하고 바다에서 실종되신다.
'나 혼자만 남았어요.'
혼자 남은 아기 코끼리는 커튼을 내리고 방문을 잠그고 슬픔을 꾹꾹 눌러 담는다. 아니, 슬프다고 울어버리면 정말 부모님이 돌아오시지 못할 것 같아 울지도 못한다. 그때 누군가 아기 코끼리를 찾아왔다.
"안녕, 난 너의 아저씨란다."
아기 코끼리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아저씨 코끼리는 주름이 너무 많았어요. 나무의 이파리보다 바닷가의 모래알들 보다 어쩌면 밤하늘의 별들보다 더 많아 보였어요. 아기 코끼리는 아저씨 코끼리의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코끼리 아저씨는 아기 코끼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고 했어요. 기차를 타고서요.
기차 안에서 아저씨 코끼리는 많은 것을 세었답니다. 빠르게 스쳐지나는 집들을 세고, 밭고랑을 세고, 전봇대를 세고. 하지만 모든게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아저씨는 결국 다 세지 못했답니다. 아저씨는 또 무언가를 세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다 세었답니다. 아기 코끼리가 먹고 있는 땅콩 껍질이었어요. 아기 코끼리는 아저씨를 위해 조금 천천히 땅콩 껍질을 깠는지도 모른답니다. 너무 많으면 세기 힘드니까요.
아저씨 집에 도착한 아기 코끼리는 마술 등잔과도 인사를 하고 아저씨한테 노래도 배웠어요.
늙은 아저씨가 아플 때면 걱정도 했답니다. 아저씨는 늙으셔서 팔과 다리가 아팠는데 신기하게도 쇼파에 앉고 발을 쿠션에 올리면 아픔이 사라졌어요. 아기 코끼리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아기 코끼리와 아저씨 코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실종된 부모님을 기다렸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행복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은 너무 예뻐서 들려주기도 어렵답니다.
부모님이 실종 되어 아저씨 코끼리와 살게 된 아기 코끼리를 보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추억을 만나게 된다. 참 이상한 것은 부모님이 함께 살지 않아 슬프고 화가 났을텐데도 내 어린시절에서 그 시간만큼 행복하고 따뜻하게 기억되는 다른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토닥여주시는 할머님의 손길과 아이 손인데도 안마를 해드리면 착하다고 자두맛 사탕을 주시던 할아버지의 따뜻한 미소 그리고 언제 봐도 멋지기만한 바다가 함께 했던 시간은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아마 책 속의 아기 코끼리도 아저씨 코끼리와 지낸 시간은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여서 그런걸까? 눈 앞에 있는 것에만 관심을 쏟아서 슬픔을 잊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아기 코끼리는 믿고 있었으니까. 부모님이 어딘가에 꼭 살아계시란 것을. 나도 믿고 있었으니까. 부모님이 언젠가는 꼭 돌아오시리라는 것을.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다. 돌아온다고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낸 아기 코끼리를 꼭 한번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착한 아저씨 코끼리에게는 푹신한 쿠션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