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일반 라디오 대신 DMB 라디오의 음악 방송을 자주 듣는다. 진행자의 설명도, 청취자의 사연도, 심지어 협찬 광고도 없이 (물론 정시마다 캠페인이 하나씩 방송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지만) 음악만 나오기 때문에 배경 음악 삼아 틀어놓으면 딱이다. 가끔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도 아예 이걸로 배경 음악을 까는 모양이다.


가끔 운이 좋으면 한 가수의 앨범 전곡이 연이어 나오기도 하고, 시간에 따라서 팝이나 재즈나 클래식 등 장르가 바뀌기도 하니 하루 종일 듣고 있어도 심심하지는 않은데, 한 가지 단점은 가끔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이 나오더라도 정작 진행자나 선곡표가 전무한 까닭에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그 제목이나 가수를 알 길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 궁리하다 네이버 앱의 음악 검색 서비스를 이용해 봤는데, 이게 요즘 노래는 비교적 잘 맞히는 반면에 예전 노래는 도통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한 번은 (세상에!) 아나 토렌트의 영화 <벌집의 정령>의 주제가인 듯한 노래가 나왔는데도 인식을 못해서 놓쳤다!(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 <까마귀 키우기>의 주제가였다!)


다행히 네이버 앱에서 노래를 인식해서 검색 결과를 정확히 내놓은 덕에 처음 알게 된 곡도 있는데, 예를 들어 신승은의 "답답함"이나 정밀아의 "서울역에서 출발"이 그러했다. 인디 가수나 언더 가수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흔히 접하지 못하던 음악이다 보니 오히려 더 신선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네이버 앱으로 음악 검색을 하고 나면 맨 아래에 요즘 인기 있는 노래를 세대/성별로 구분해 놓은 목록이 나온다. 한 번은 거기서 뜬금없이 AK-47이라는 단어를 무려 제목으로 사용한 노래를 발견하고 의아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10대에서만 압도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모양이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다.


유튜브에서 그 노래를 찾아서 가사까지 확인해 들어 보니, 솔직히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내용까지는 없고 일종의 말장난, 또는 부조리를 의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힙합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단지 그 장르에서 종종 내세운다는 과시나 자랑의 일환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AK-47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신경 쓰였던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인 소련제 소총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발명가인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이름을 딴 정식 명칭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Avtomat Kalashnikova)의 약자가 AK이고, 47이란 숫자는 그 제작년도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마침 나귀님은 최근에 이 무기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구입해 들춰보던 참이었다. 작년에 광활한우주점에서 책을 하나 주문하려다가 배송료 지우려고 다른 책을 찾다 보니 호비스트에서 간행한 칼라시니코프 관련 화보집이 두 종이나 있었다. 마침 AK-47에 관한 단행본도 두 권이 있어서 졸지에 관련서를 네 종이나 구입하게 되었다.


사실 AK-47과 칼라시니코프의 이름을 환기하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 나폴리 범죄 조직 카모라에 대한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논픽션이었다. <고모라>의 한 장에서 카모라 고위 간부들 일부가 이 무시무시한 총기를 개발한 장본인을 워낙 우상시하는 까닭에 정기적으로 값비싼 선물을 보내며 친목을 다진다는 설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AK-47의 장점은 종종 가격이 저렴하고, 조작이 손쉬우며, 고장이 드물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래서인지 범죄 조직은 물론이고 무장 반군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되어서, 한때 국제적인 문제로 주목을 받은 소년병들이 들고 다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집으로 가는 길>의 표지에도 그 소총이 나온다).


약간 과장하자면 흙이나 물이 들어가도 멀쩡하고, 규격 외 탄환을 사용해도 발사된다니, 정말로 '흠좀무' 하다고 해야 맞겠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어깨를 나란히 한 미국의 M-16이 오작동을 줄이기 위해 틈새를 좁혀 촘촘하게 설계된 반면, AK-47은 소련의 낙후된 생산 기술을 감안해 틈새를 넉넉히 준 것이 장점이 되었다던가.


생전의 칼라시니코프는 자기가 개발한 총이 일신의 이익보다 조국의 이익에 이바지했다며 자랑스러워했던 듯하며, 간혹 그 무기의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칼도 쓰기에 따라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거나 한다'는 원론적/중립적 태도를 고수했다고 전한다. 물론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끊이지 않을 법하다.


다만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는 자부심을 끝까지 고수했던 칼라시니코프도 매우 당황했을 때가 있었다고 전한다. 냉전이 끝나고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서 유진 스토너를 만났을 때의 일인데, AK-47의 맞수인 M-16이 하나 팔릴 때마다 그 발명가가 대략 1달러씩 로열티를 받아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자료마다 설명이 약간씩 다르다. 우선 마쓰모토 진이치의 <역사를 바꾼 총 AK47>에는 칼라시니코프가 스토너의 행운을 부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나오는 반면, 래리 캐해너의 <AK47>에는 그가 상당히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으로 이후 수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테트리스>의 발명자가 소련 출신이라서 저 게임의 세계적인 흥행에도 딱히 이득을 챙기지 못했듯, 칼라시니코프도 자신의 발명품으로 국가적 영웅 대접을 받으며 명예를 챙겼지만 실속은 챙기지 못했다고 할 만하다. 사후 10년이 지나 AK-47이란 노래까지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면 또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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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으면 점심에 주로 면류로 한 끼를 때우는데 최근에는 스파게티를 해 먹는다. 분류하자면 알리오올리오이지만 면과 기름과 마늘 외에 부재료는 거의 없다시피하니 딱히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요리까지는 아니다. 조리법도 유튜브 몇 개 보고 흉내를 내는 것뿐이니 굳이 손님 불러 해 먹일 만한 별미까지도 아니다.


사실은 이마저도 작년에야 찬장을 뒤지다가 오래 된 올리브유가 나오기에 어쩔 수 없이 재료를 처분하느라 시작한 것이었다. 올 초까지 꾸역꾸역 만들어 먹어서 유통기한이 21년 5월까지인 올리브유 한 통을 간신히 처분했는데, 유통기한이 24년 4월까지인 2리터짜리 "단역 처녀"도 한 통 남아 있으니 이건 또 언제 먹나.


그나저나 올리브유라면 비교적 금방 산패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집에 남아도는 것들은 비교적 멀쩡한 듯해서 계속 먹으면서도 살짝 의아하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올리브유가 상한다는 이야기는 특이하게도 어려서 읽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왔던 어느 꼬마의 영리한 재판 이야기에서 처음 접했었다.


정확한 출처가 어딘지 궁금해 검색해 보니, 열린책들에서 나온 갈랑 판 <천일야화>에서는 5권 말미에 수록된 "바그다드 상인 알리 코지아 이야기"였다. 버턴 판에서는 "바그다드 상인 알리 크와자 이야기"(640번째 밤)로 나오는 모양인데, 이건 책 꺼내기 귀찮아서 아직 번역본까지 찾아서 대조해 보지는 않은 상황이다.


제목 그대로 바그다드에 사는 상인 알리 코지아가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전 재산을 금화로 바꾸어 항아리에 집어넣고 그 위에 다른 물건을 얹어서 위장한 다음 이웃집에 맡긴다. 그런데 7년 뒤에 돌아와서 이웃집에 맡긴 항아리를 도로 받아 열어보았더니, 금화는 온데간데 없고 위장용 물건만 하나가득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위장용 물건을 나는 '올리브유'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올리브 열매'로 나와 있었다. 즉 금화를 감추기 위해 올리브 열매를 위에 깔아 놓았는데, 이웃집 사람이 올리브 열매를 몇 개 꺼내 먹으려다가 시간이 너무 흘러 상했음을 깨닫고 항아리를 엎었다가 금화를 발견하게 되었던 거다.


이웃집 사람은 금화를 챙겨서 숨긴 다음, 올리브 열매를 새로 사다가 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얼마 뒤에 돌아온 상인에게 시치미를 떼고 내어준다. 뒤늦게 상인이 금화의 행방을 묻자, 애초에 올리브만 들어 있는 항아리라고 말하지 않았었느냐고 항변하고, 급기야 소송을 당했는데도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잡아뗀다.


양측의 증언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난감해진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평소처럼 신분을 숨기고 거리를 순찰하다 우연히 아이들이 이 유명한 사건을 가지고 모의 재판을 하며 노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재판관 역할을 맡은 아이가 내놓은 영리한 판결에 무릎을 탁 치고 아예 다음날 아이를 궁궐로 불러 재판을 맡긴다.


아이가 내놓은 판결은 간단했다. '어떻게 7년이나 지난 올리브가 이렇게 아직 신선할 수 있는가?' 즉 항아리 속의 올리브는 그 상태로 미루어 최근 수확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상인이 맡긴 몇 년 전의 올리브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결정적 단서에 이웃집 사람도 죄를 자백하고, 상인은 잃어버린 금화를 되찾는다.


결국 상한 것은 '올리브'이지 '올리브유'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귀님은 어째서 그 열매를 그 기름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어려서 읽은 책을 지금 다시 찾아낼 수는 없으니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함께 읽었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기름 항아리 이야기와 혼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올리브유의 정확한 유통기한은 얼마일까? 보통 6개월에서 1년 안에 최대한 빨리 소비하는 게 낫다던데, 그렇다고 해서 그 기간이 지나면 갑자기 상해버리는 것까지는 아닌 듯하니 다행이다. 마침 흉작 여파로 올리브유 가격이 전세계적으로 급등했다는 뉴스까지 접하고 나니, 미리 사놓기를 잘한 건가도 싶고...




[*] 그렇다고 해서 맛집만 골라 다니는 나귀님까지는 아니어서 딱히 가본 스파게티집이 많지는 않다. 그중 하나인 광화문 뽀모도로인가 하는 곳은 아무리 맛집이라 해도 식탁을 너무 다닥다닥 붙여 놓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예전에 몇 번 약속 때문에 부득이하게 찾아간 이후로는 가본 적이 없다. 길에서 우연히 보고 한 번 들어가 볼까 생각만 했다가 결국 못 가본 '초록색 문'에 해당하는 가게들도 몇 가지 생각나는데, 예를 들어 예전 을지로 쁘렝땅 백화점(!) 길가에 있었던, 상호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곳이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교보문고 옆 지금은 없어진 피맛골에 있었던 길거리(?) 스파게티집이다. 장의사 건물 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가판대처럼 폭이 좁은 스파게티집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주인이 음식을 내주면 손님은 등 뒤로 행인들이 오가며 쳐다보는 와중에 사실상 길가에 앉은 채로 먹어야 하는 구조라서 살짝 꺼려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았더니 특이하게도 2002년 1월 30일에 나란히 올라온 관련 기사가 두 개나 나온다. 가게 이름은 '종로한평'이고 홍익대 미대를 나온 도예가 최병진이 만들었다고 한다. 하루 30그릇씩 판매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문이 열려 있었던 때보다는 닫혀 있었던 때가 더 많았던 듯하다. 그냥 장난이나 변덕으로 영업한 것은 아닌 듯하고, 기사에 따르면 더 큰 가게를 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던 모양인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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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한국경제신문 뉴욕 특파원 나수지의 보도 동영상 가운데 "뉴욕엔 왜 유독 비계가 많을까?"가 있어서 눌러보았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그렇잖아도 지난번 <이서진의 뉴욕뉴욕>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내내 비계 밑으로 지나다니는 장면이 하도 많아서 '도대체 저기는 왜 이렇게 공사가 많지? 구역 전체를 재개발이라도 하나?' 하고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알고 보니 뉴욕의 비계는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민간의 얄팍한 꼼수가 어우러지며 생겨난 대환장 파티라고 할 만했다. 과거 건물 외벽이 파손되며 행인이 다치는 등의 사고가 생기면서 정기적인 외벽 검사가 의무화되었고, 그 결과 비계를 임시로 설치하는 곳이 늘어났는데, 한 번 설치하고 나자 또 이런저런 이유로 철거가 미루어져서 수년씩 유지되는 경우가 허다해졌다.


한 통계에 따르면 최근 뉴욕에는 무려 8300개의 비계가 있었다고 하니, 이것 자체로 이미 공해라 할 만하겠다. 미관상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어디까지나 임시 구조물인 비계 자체의 안전과 위생 문제도 제기되는 모양이다.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좋지만, 유연성 없는 행정 조치는 결국 지금처럼 부조리의 차원에 도달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는 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비계 이야기가 나왔으니 동음이의어인 돼지 비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제주도를 방문한 관광객이 식당에서 삼겹살을 주문했는데 비계가 대부분인 것이 나왔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다. 식당 주인이 뒤늦게 사과하며 마무리되나 싶더니만, 제주 지사가 뜬금없이 지역 특유의 식문화를 감안해야 한다며 실언하는 바람에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동음이의어는 서울의 지명이다. 흑석동에서 국립묘지로 넘어가는 언덕배기의 버스 정류장 이름이 '비계'인데, 처음 들었을 때에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궁금해서 노선표를 확인하기도 했었다. 정식 행정 구역명까지는 아니고 지역민 사이에서만 사용되는 이름이라니 삼양동과도 비슷한 셈인가 싶었는데... 지금은 삼양동도 장식 행정 구역명으로 부활한 모양이다!


이 지명을 새삼 떠올리게 된 까닭은 최근 재개발에 들어간 흑석동 일부 지구에서 뜬금없이 '서반포'라며 존재하지도 않은 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행정 구역상 반포와는 분명히 별개인 동네인데도 저 유명한 지역의 이름을 악용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나왔는데, 인터넷 댓글 중에서 '어떻게 거기가 서반포냐, 차라리 동노량진이라 해라'는 지적이 가장 사이다로 보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칭 서반포 재개발 지구 바로 옆에 조선일보 회장 자택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주택이라고 해서 유명한 곳인데, 한때 매일 두 번씩 지나다니던 곳이지만 커다란 대문과 언덕 위로 이어진 진입로만 봐서는 거기 누가 사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지금은 대문 옆에 조선일보 박물관이 있던데, 주택 보유세 회피용이라는 비판도 있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그 동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조선일보 회장 자택 바로 건너편에 있었던 작은 녹지였다. 지금은 명수대 현대아파트와 한강 현대아파트 사이의 스포츠센터 부지인데, 원래는 너비 50미터쯤 되는 작은 언덕 위로 나무며 풀이 우거지고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아마 인근 땅 전체를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려다가 협상이 결렬되어 그 녹지 부분만 남겨놓은 듯했다.


그런데 하루 두 번씩 그 앞을 지나가다 보니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사막에서 초록초록한 모습으로 꿋꿋이 버티고 있는 녹지의 모습이 점점 마음에 드는 거다. 마치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이 실사판 같았다고나 할까. 인도 옆 대문을 열고 돌계단을 꾸역꾸역 올라가면 나오는 작은 집의 모습은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나아가는 누군가의 고집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부디 그 푸릇푸릇한 곳이 누군지 모를 그 주인과 함께 오래 남아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이후 그쪽으로 한동안 발을 끊었다가 다시 가보니 언덕이며 녹지며 집은 결국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기에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남들은 그냥 흘려 듣고 말았을 법한 '비계'라는 희한한 지명이 아직까지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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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진스님' 이야기를 했으니 내친 김에 '뉴진스' 이야기도 한 마디 해 보자. 유튜버 곽튜브의 최근 영상 가운데 일본인 여사친에게 한국 여행을 시켜주면서, 오래 전부터 좋아했다는 한국 아이돌 아스트로의 멤버 한 명을 섭외해서 직접 만나게 해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나중에 소감을 묻는 곽튜브에게 여사친이 울면서 한 말이 꽤나 의미심장했다.


즉 자기는 일본에서 아스트로를 직접 만나려고 앨범을 잔뜩 구입한 적도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 것도 사지 않고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놀랍고 고마웠다는 거다. 그러면서 보여준 휴대전화 속 사진에는 실제로 시디 스무여남은 장이 찍혀 있었다. 문득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케이팝 아이돌 산업에서의 큰 문제점에 대한 간접적 고발은 아닐까 싶었다.


그렇잖아도 최근 일본에서 한국 아이돌 세븐틴의 앨범이 멀쩡한 채 길거리에 다량 폐기되어 논란이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아이돌을 직접 만나는 행사에서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이른바 '앨범깡'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전에도 아이돌 포토 카드를 구하기 위해 빵을 사서 먹지 않고 내버려서 논란이 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나귀님 보기에도 최근 카리나 연애 논란, 르세라핌 라이브 논란, 어도어 대 하이브 논란으로 3연타를 맞으면서 이른바 케이팝 아이돌의 여러 문제가 대거 부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애초부터 개별 가수의 재능보다 소속 회사의 역량이 성공을 좌우하는 판이었으니, 곪은 데가 터지는 것도 시간 문제가 아니었을까.


현재 진행형인 어도어 대 하이브 논란의 경우에는 당사자인 민희진의 육두문자 기자 회견이 큰 화제였다. 일각에서는 '속이 시원했다'느니, '할 말은 했다'느니, 심지어 '저렇게 경솔한 것을 보니 음모를 꾸밀 사람은 아닌 듯하다'는 평가도 나오는데, 현재 업계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지닌 회사의 대표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고용주며 모회사를 향해 육두문자를 날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내 새끼들'에게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방시혁으로부터 업계 최고 대우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민희진이 대뜸 쌍욕부터 박고 나서 수락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지금의 '내 새끼들'도 여차 하면 '개새끼들'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말한 사례들과 유사한 앨범 '밀어내기' 관행을 기자 회견에서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민희진에게 공감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수시로 '나'와 '내 것'과 '내 업적'을 강조하는 발언의 배후에는 혹시 소속 가수를 프로듀서나 회사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왜곡된 사고방식이 자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기도 했다.


마치 '강바오'가 판다월드를 에버랜드에서 독립시키려고 송바오며 오바오와 공모하다가 적발되자 '바오걸스는 사실상 내가 낳은 딸들'이고, '에버랜드는 해준 게 없다'면서, '나는 롯데월드에 갔더라도 충분히 너구리를 교배해 판다를 분만시켰을 만한 인재'라고 주장하며, '부산 가서 오뎅 국물이나 구걸하는 개저씨'를 저격한 셈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일각의 지적처럼 애초에 자기 돈으로 시작한 사업이 아니라면, 사주나 모기업의 눈치를 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정 의견이 맞지 않으면 조용히 나올 일이지, 이런 식으로 일파만파 사태를 키워서 도대체 무슨 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기자 회견에서 보여준 태도만 봐도 앞으로 그와 손을 잡을 투자자는 사실상 없지 않을까.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1990년대에 한국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했던 프로듀서 김창환이다. 신승훈, 김건모, 노이즈, 박미경, 클론, 홍경민, 채연에 이르기까지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오른 여러 가수와 명곡을 내놓아서 미다스의 손이라 평가되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 여러 논란을 겪으며 지금은 사실상 몰락한 상태이다.


자전적 에세이 <나와 함께한 천재들>에 따르면 원래는 대학 중퇴 후에 디스코장에서 DJ로 활동하며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어학 테이프를 제작하던 회사의 자회사에 음반 프로듀서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신승훈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음반을 제작해서 대박을 터트리고, 이후 연이은 성공으로 전성기를 누린다.


김창환의 시대까지만 해도 실력 있는 무명 가수를 발굴해서 스타로 육성하는 것이 음반 프로듀서의 주된 역할이었다. 노래보다는 춤과 외모, 라이브보다는 립싱크를 당연시하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아이돌은 김창환의 시대가 햐항세로 접어들던 1990년대 중후반에 이수만 등이 아이돌 그룹을 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봐야 맞겠다.


어떤 면에서 김창환은 여전히 주먹구구 방식으로 돌아가던 음반 제작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데에 기여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 단순히 성공담을 늘어놓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회사인 라인음향 소속 작곡가, 편곡가,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디자이너(강원래의 형 강원도)의 역할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


노이즈와 클론에 뒤이어 혼성 그룹 콜라를 데뷔시킨 직후인 1997년에 나온 자전적 에세이는 그들의 활약을 기대하며 마무리되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김창환의 하향세가 시작되었다고 봐야 맞겠다. 탈세 혐의로 세무 조사를 받은 모회사 라인음향과 결별하고 독립해서도 간간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수년 전 소속 가수 폭언과 폭행으로 완전 몰락했다.


비록 시기와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김창환의 흥망은 현재 연예계의 가장 뜨거운 논란 당사자인 민희진과 방시혁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아 보인다. 솔로부터 그룹까지 전설적인 가수를 여럿 제작했고, 심지어 작사작곡까지 담당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그의 업적이라면 지금의 두 유명 프로듀서에게 충분히 버금갈 만해 보이니 말이다.


맨 먼저 기억할 점은 제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한 미다스의 손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김창환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고 최소한 2000년대까지는 체면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니 대략 20년간은 거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셈이다. 넓게 봐서 한 세대인 30년이 그 시한이라고 보면, 이번 사태가 방시혁과 민희진 모두에게는 꽤나 의미심장해 보인다.


흥망은 세상만사의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두 사람 모두 20년 넘게 성공가도를 달렸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겠지만, 유행이 항상 바뀐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능력인지 행운인지가 마치 영원할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될 듯하다. 당장 이번 사태로 이미지가 급락한 것만 보아도 그들의 능력인지 행운인지는 이미 막다른 길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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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을 맞아서 '뉴진스님' 윤성호가 광화문 광장에서 디제잉을 한다는 뉴스가 나온다. 젊은 세대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것이니 좋다는 의견이 대부분인 듯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인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대상은 '불교'가 아니라 그저 승복을 입고 디제잉을 한다는 희화화에서 비롯되는 '개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다.


요즘 세상에서는 종교도 어떤 식이든지 홍보가 필요하겠지만, 진지함이 희석된 경쾌함만 남아서는 곤란할 것이다. 앞서도 불교에서는 현각이나 혜민처럼 학벌을 내세우는 홍보로 재미를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작용도 없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붓다 역시 신통력 같은 눈요깃거리로 대중을 모으는 행위를 긍정할 리 없었으니까.


종교의 핵심은 성과 속의 구분이다. 불교의 경우에는 사찰의 산문을 기준으로 양자가 정확히 구분됨으로 인해 외경심이 우러난다. 카톡과 유튜브와 풀소유가 대세인인 세상에서는 오히려 침묵과 마음챙김과 무소유라는 불교의 미덕이 더욱 돋보일 수 있지 않을까. 어설픈 방법으로 세상에 다가가기보다, 항상 거기 있으면서 세상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또 한편으로 보자면, 윤성호의 부캐 뉴진스님이나 그 이전의 일진스님이 보여준 승려의 속된 행동이야말로 각종 구설수가 끊이지 않는 한국 불교에 대한 야유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승가를 바로세우고 엄격한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저변을 넓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시선을 끈다는 것만으로 포교를 다 했다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여기서 문득 몰몬교를 소재로 한 뮤지컬 <몰몬경>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연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미국에서는 2011년에 토니상 9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압도적인 호평을 받은 걸작이다. 내용은 황당하지만 음악은 훌륭한데, 특히 "안녕하세요"와 "너와 내가 (대부분 내가)" 같은 노래가 그렇다.(전자는 2012년 토니상 시상식 개막 공연이 정말 걸작이다).


줄거리를 보면 몰몬교 선교사 두 명이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 가서 겪는 우여곡절이고, 결말만 살피면 '좋은 게 좋은 거'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신랄한 유머가 들어 있어서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하쿠나 마타타"를 패러디한 듯한 "하사 디가 이보와이"라는 노래가 그런데, 힘들 때마다 되뇌는 말이라기에 희망적인 격언인 줄 알았더니 "하느님 씹새끼"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대놓고 비꼬는 내용이다 보니 몰몬교 측 반발도 충분히 예상되었지만, 의외로 창작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요지의 조심스러운 반응만 나왔다. 나중에 뮤지컬이 인기를 끌자 몰몬교에서는 아예 <몰몬경>의 팜플렛 한귀퉁이를 빌려 "뮤지컬을 보셨으니 이제 그 원작도 읽어보세요! 항상 그렇듯이 원작이 더 훌륭하답니다!"라고 재치 있는 광고를 집어넣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음악과 내용 모두 유쾌한 뮤지컬 <몰몬경>이지만, 그렇다고 이걸 보고 나서 몰몬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역시나 이 뮤지컬을 보고 나서 몰몬경이나 몰몬교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경전 <몰몬경>과 뮤지컬 <몰몬경>의 차이란 결국 진짜 승려와 부캐 뉴진스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몰몬교에 대해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던 부분은 그 교리나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그 건축이었다.(아울러 저 유명한 몰몬교 합창단의 음악도 포함시켜야 맞을 것이다). 내가 본 몰몬교 건물들은 일반 교회와 달리 단층으로 아담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었는데, 마침 옆 동네에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몰몬교 지부가 철수하면서 내부를 구경할 기회가 생겼다.


어느 가구 판매 업체에서 그 교회 건물을 인수해서 전시장 겸 커피숍으로 개조해 놓았기 때문인데, 매번 밖에서만 보던 건물 내부가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요즘의 전형적인 교회 건축과는 또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문득 내가 몰몬교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저 유명 뮤지컬보다는 차라리 이 오래 된 건물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고나... 



[*] <몰몬경> 음악이 마음에 들어서 유튜브로 감상하다가 아예 씨디를 사려고 보니 알라딘에서 품절이었다. 한동안 중고가 없나 기웃거리다가 재작년에 운 좋게 구입했는데, <사우스파크> 제작진의 작품답게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작품이다 보니 씨디 비닐 포장에 미성년자 주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나중에라도 몰몬교 선교사들을 길에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의 유명한 대사("지금 종교를 바꾸시는 분께는 예수가 직접 쓴 책을 무료로 드립니다!" <겨울왕국>에서 올라프를 연기했던 배우가 뮤지컬 도입부에서 하는 헛소리다)를 읊어주려고 열심히 연습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앞서 말했듯이 인근의 몰몬교 지부가 없어지면서 이 동네에서는 더 이상 몰몬교 선교사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는 내가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또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니 몰몬교 선교사를 향해 뮤지컬 <몰몬경>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치 외국인이 처음 본 한국인에게 대뜸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들먹이며 한국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처럼 꼴불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몰몬경> 음반은 어째서인지 지금 검색해 보면 알라딘에서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구매한 기록이 있기에 해당 페이지 주소를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쩌면 이것 역시 알라딘의 숱한 '분명히 있지만 동시에 없는 책들'의 사례 가운데 하나인 걸까: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2316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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