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으면 점심에 주로 면류로 한 끼를 때우는데 최근에는 스파게티를 해 먹는다. 분류하자면 알리오올리오이지만 면과 기름과 마늘 외에 부재료는 거의 없다시피하니 딱히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요리까지는 아니다. 조리법도 유튜브 몇 개 보고 흉내를 내는 것뿐이니 굳이 손님 불러 해 먹일 만한 별미까지도 아니다.


사실은 이마저도 작년에야 찬장을 뒤지다가 오래 된 올리브유가 나오기에 어쩔 수 없이 재료를 처분하느라 시작한 것이었다. 올 초까지 꾸역꾸역 만들어 먹어서 유통기한이 21년 5월까지인 올리브유 한 통을 간신히 처분했는데, 유통기한이 24년 4월까지인 2리터짜리 "단역 처녀"도 한 통 남아 있으니 이건 또 언제 먹나.


그나저나 올리브유라면 비교적 금방 산패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집에 남아도는 것들은 비교적 멀쩡한 듯해서 계속 먹으면서도 살짝 의아하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올리브유가 상한다는 이야기는 특이하게도 어려서 읽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왔던 어느 꼬마의 영리한 재판 이야기에서 처음 접했었다.


정확한 출처가 어딘지 궁금해 검색해 보니, 열린책들에서 나온 갈랑 판 <천일야화>에서는 5권 말미에 수록된 "바그다드 상인 알리 코지아 이야기"였다. 버턴 판에서는 "바그다드 상인 알리 크와자 이야기"(640번째 밤)로 나오는 모양인데, 이건 책 꺼내기 귀찮아서 아직 번역본까지 찾아서 대조해 보지는 않은 상황이다.


제목 그대로 바그다드에 사는 상인 알리 코지아가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전 재산을 금화로 바꾸어 항아리에 집어넣고 그 위에 다른 물건을 얹어서 위장한 다음 이웃집에 맡긴다. 그런데 7년 뒤에 돌아와서 이웃집에 맡긴 항아리를 도로 받아 열어보았더니, 금화는 온데간데 없고 위장용 물건만 하나가득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위장용 물건을 나는 '올리브유'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올리브 열매'로 나와 있었다. 즉 금화를 감추기 위해 올리브 열매를 위에 깔아 놓았는데, 이웃집 사람이 올리브 열매를 몇 개 꺼내 먹으려다가 시간이 너무 흘러 상했음을 깨닫고 항아리를 엎었다가 금화를 발견하게 되었던 거다.


이웃집 사람은 금화를 챙겨서 숨긴 다음, 올리브 열매를 새로 사다가 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얼마 뒤에 돌아온 상인에게 시치미를 떼고 내어준다. 뒤늦게 상인이 금화의 행방을 묻자, 애초에 올리브만 들어 있는 항아리라고 말하지 않았었느냐고 항변하고, 급기야 소송을 당했는데도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잡아뗀다.


양측의 증언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난감해진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평소처럼 신분을 숨기고 거리를 순찰하다 우연히 아이들이 이 유명한 사건을 가지고 모의 재판을 하며 노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재판관 역할을 맡은 아이가 내놓은 영리한 판결에 무릎을 탁 치고 아예 다음날 아이를 궁궐로 불러 재판을 맡긴다.


아이가 내놓은 판결은 간단했다. '어떻게 7년이나 지난 올리브가 이렇게 아직 신선할 수 있는가?' 즉 항아리 속의 올리브는 그 상태로 미루어 최근 수확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상인이 맡긴 몇 년 전의 올리브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결정적 단서에 이웃집 사람도 죄를 자백하고, 상인은 잃어버린 금화를 되찾는다.


결국 상한 것은 '올리브'이지 '올리브유'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귀님은 어째서 그 열매를 그 기름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어려서 읽은 책을 지금 다시 찾아낼 수는 없으니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함께 읽었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기름 항아리 이야기와 혼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올리브유의 정확한 유통기한은 얼마일까? 보통 6개월에서 1년 안에 최대한 빨리 소비하는 게 낫다던데, 그렇다고 해서 그 기간이 지나면 갑자기 상해버리는 것까지는 아닌 듯하니 다행이다. 마침 흉작 여파로 올리브유 가격이 전세계적으로 급등했다는 뉴스까지 접하고 나니, 미리 사놓기를 잘한 건가도 싶고...




[*] 그렇다고 해서 맛집만 골라 다니는 나귀님까지는 아니어서 딱히 가본 스파게티집이 많지는 않다. 그중 하나인 광화문 뽀모도로인가 하는 곳은 아무리 맛집이라 해도 식탁을 너무 다닥다닥 붙여 놓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예전에 몇 번 약속 때문에 부득이하게 찾아간 이후로는 가본 적이 없다. 길에서 우연히 보고 한 번 들어가 볼까 생각만 했다가 결국 못 가본 '초록색 문'에 해당하는 가게들도 몇 가지 생각나는데, 예를 들어 예전 을지로 쁘렝땅 백화점(!) 길가에 있었던, 상호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곳이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교보문고 옆 지금은 없어진 피맛골에 있었던 길거리(?) 스파게티집이다. 장의사 건물 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가판대처럼 폭이 좁은 스파게티집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주인이 음식을 내주면 손님은 등 뒤로 행인들이 오가며 쳐다보는 와중에 사실상 길가에 앉은 채로 먹어야 하는 구조라서 살짝 꺼려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았더니 특이하게도 2002년 1월 30일에 나란히 올라온 관련 기사가 두 개나 나온다. 가게 이름은 '종로한평'이고 홍익대 미대를 나온 도예가 최병진이 만들었다고 한다. 하루 30그릇씩 판매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문이 열려 있었던 때보다는 닫혀 있었던 때가 더 많았던 듯하다. 그냥 장난이나 변덕으로 영업한 것은 아닌 듯하고, 기사에 따르면 더 큰 가게를 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던 모양인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