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한국경제신문 뉴욕 특파원 나수지의 보도 동영상 가운데 "뉴욕엔 왜 유독 비계가 많을까?"가 있어서 눌러보았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그렇잖아도 지난번 <이서진의 뉴욕뉴욕>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내내 비계 밑으로 지나다니는 장면이 하도 많아서 '도대체 저기는 왜 이렇게 공사가 많지? 구역 전체를 재개발이라도 하나?' 하고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알고 보니 뉴욕의 비계는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민간의 얄팍한 꼼수가 어우러지며 생겨난 대환장 파티라고 할 만했다. 과거 건물 외벽이 파손되며 행인이 다치는 등의 사고가 생기면서 정기적인 외벽 검사가 의무화되었고, 그 결과 비계를 임시로 설치하는 곳이 늘어났는데, 한 번 설치하고 나자 또 이런저런 이유로 철거가 미루어져서 수년씩 유지되는 경우가 허다해졌다.


한 통계에 따르면 최근 뉴욕에는 무려 8300개의 비계가 있었다고 하니, 이것 자체로 이미 공해라 할 만하겠다. 미관상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어디까지나 임시 구조물인 비계 자체의 안전과 위생 문제도 제기되는 모양이다.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좋지만, 유연성 없는 행정 조치는 결국 지금처럼 부조리의 차원에 도달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는 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비계 이야기가 나왔으니 동음이의어인 돼지 비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제주도를 방문한 관광객이 식당에서 삼겹살을 주문했는데 비계가 대부분인 것이 나왔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다. 식당 주인이 뒤늦게 사과하며 마무리되나 싶더니만, 제주 지사가 뜬금없이 지역 특유의 식문화를 감안해야 한다며 실언하는 바람에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동음이의어는 서울의 지명이다. 흑석동에서 국립묘지로 넘어가는 언덕배기의 버스 정류장 이름이 '비계'인데, 처음 들었을 때에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궁금해서 노선표를 확인하기도 했었다. 정식 행정 구역명까지는 아니고 지역민 사이에서만 사용되는 이름이라니 삼양동과도 비슷한 셈인가 싶었는데... 지금은 삼양동도 장식 행정 구역명으로 부활한 모양이다!


이 지명을 새삼 떠올리게 된 까닭은 최근 재개발에 들어간 흑석동 일부 지구에서 뜬금없이 '서반포'라며 존재하지도 않은 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행정 구역상 반포와는 분명히 별개인 동네인데도 저 유명한 지역의 이름을 악용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나왔는데, 인터넷 댓글 중에서 '어떻게 거기가 서반포냐, 차라리 동노량진이라 해라'는 지적이 가장 사이다로 보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칭 서반포 재개발 지구 바로 옆에 조선일보 회장 자택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주택이라고 해서 유명한 곳인데, 한때 매일 두 번씩 지나다니던 곳이지만 커다란 대문과 언덕 위로 이어진 진입로만 봐서는 거기 누가 사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지금은 대문 옆에 조선일보 박물관이 있던데, 주택 보유세 회피용이라는 비판도 있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그 동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조선일보 회장 자택 바로 건너편에 있었던 작은 녹지였다. 지금은 명수대 현대아파트와 한강 현대아파트 사이의 스포츠센터 부지인데, 원래는 너비 50미터쯤 되는 작은 언덕 위로 나무며 풀이 우거지고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아마 인근 땅 전체를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려다가 협상이 결렬되어 그 녹지 부분만 남겨놓은 듯했다.


그런데 하루 두 번씩 그 앞을 지나가다 보니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사막에서 초록초록한 모습으로 꿋꿋이 버티고 있는 녹지의 모습이 점점 마음에 드는 거다. 마치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이 실사판 같았다고나 할까. 인도 옆 대문을 열고 돌계단을 꾸역꾸역 올라가면 나오는 작은 집의 모습은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나아가는 누군가의 고집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부디 그 푸릇푸릇한 곳이 누군지 모를 그 주인과 함께 오래 남아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이후 그쪽으로 한동안 발을 끊었다가 다시 가보니 언덕이며 녹지며 집은 결국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기에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남들은 그냥 흘려 듣고 말았을 법한 '비계'라는 희한한 지명이 아직까지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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