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개정판이 나왔기에, 과거에 신문 기사에서부터 오기되었던 "마크 타이슨"과 "세이쇼 나곤"이 제대로 수정되었나 살펴보았더니, 각각 "마이크 타이슨"과 "세이 쇼나곤"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페이지의 같은 문단에서 "세이쇼 나곤"이라는 오기가 두 번이나 더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해당 에세이에서는 "세이쇼 나곤"이라는 오기가 모두 세 번 등장하는데, 맨 앞의 원문 병기 부분만 "세이 쇼나곤"으로 수정하고, 바로 밑에 두 번 더 나오는 부분은 무심코 넘기는 바람에 여전히 "세이쇼 나곤"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애초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름은 왜 들먹여서 초판과 개정판 모두에서 망신을 자초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 그렇잖아도 지난번에 미치쓰나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되는 헤이안 시대 여류 문인의 계보를 정리하다가 말았는데, 기회가 되면 마무리해야 되겠다. 세이 쇼나곤과 무라사키 시키부는 서로를 '디스'(?)하는 사이였고, 무라사키는 직장 동료 이즈미 시키부를 싫어하고 후지와라 사이쇼(미치쓰나의 어머니의 손녀, 즉 미치쓰나의 딸)를 좋아했다는 등의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비슷한 계보가 혜경궁 홍씨의 풍산 홍씨 가문에서도 확인되던데, 이건 좀 더 자료를 찾아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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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에 올라갔다가 책더미 맨 위에 올라앉은 레이 황의 <만력 15년>을 보니, 거기 부록으로 수록된 저자의 에세이 가운데 야채 가격 급등에 관한 일화가 들어 있었던 것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해당 글이 저자의 또 다른 저서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의 서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만력 15년>은 원래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구판으로 갖고 있었지만, 누군가 말하길 후자는 영어판의 번역이고 전자는 중국어판의 번역이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법하다기에, 뒤늦게야 중고샵에서 전자를 한 권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책을 사서 부록으로 첨가된 에세이를 읽다가 야채 관련 대목을 접했던 것이었다.


마침 수년 전 대파 가격이 왕창 뛰어서, 일각에서는 파테크라고 해서 직접 재배하는 사람도 나올 즈음이다 보니, 딱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인 1973년에 중동 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그때부터 문제였구나!) 미국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집집마다 마당에서 야채를 키워 자급자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 부부도 자연히 자급자족 대열에 동참해서 오이며 토마토를 직접 재배했지만, 흙을 일구는 일부터 갖가지 부대 비용을 감안하면 사실 이득까지는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그 지역은 일반적인 야채보다 사과 농사에 더 적합해서 집집마다 사과나무가 있었고, 수확철마다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와 사과를 따곤 했다.


물가 폭등으로 야채가 귀해지자 너도나도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다시 야채가 흔해지자 농사를 포기하는 미국인의 실리적인 행동이며, 사과 수확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동원하면서 숙식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인력 관리며 농업 경영을 지켜보며, 저자는 새삼스레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고찰해 본다.


결론적으로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삼아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경시한 까닭이라지만, 저자는 뒤늦게나마 중국이 자본주의 방식을 일부 수용했으니만큼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중국은 급속한 경제 발전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장기적 시야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인 듯하지만,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때에 중간중간 나타나는 역류나 정체를 겪으며 갖가지 고초를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식과도 유사해 보이는 이런 설명을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 법하다.


미국 동부 허드슨 강변 작은 동네의 야채 농사며 사과 재배는 그렇다 치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대파와 사과 가격 폭등의 현실에 대해서는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미 충분히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적인 야채와 과일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온 국민을 괴롭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농업과 유통이며 기후 문제까지 다양한 설명이 나오지만, 사실 이런 일이 이번 정부 말고 이전 정부 때부터 수년째 반복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찍이 허생이 이런저런 물건을 매점매석할 때마다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을 보고 작은 나라의 현실을 개탄했던 것과도 비슷하달까.


구매자는 비싸게 샀다며 난리이고, 생산자는 헐값에 팔았다고 난리이니, 중간 유통업자의 농간이 실제로 있다 치면 발본색원하는 것이 방책일 터인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대책은 고사하고 실상조차 알 수 없으니, 애초부터 개선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개선할 의지가 없는 것이었을까. 어쩐지 허생의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이 슈퍼마켓에 나타나자 한 단에 5천 원대를 오가던 대파 가격이 800원대로 다시 책정되어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보여주기를 하고 말았으니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포템킨 마을'의 변종인 셈인데, 지켜보는 눈이며 렌즈가 많은 세상에서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부터가 전근대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포템킨 마을'은 이전 정권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13평 아파트에 4인 가족이 살 수 있다'는 발언이 그렇지 않았나. 군대에서 높은 분이 시찰을 올 때마다 낙엽 하나 떨어지지 않게 청소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며, 과거 중국이나 소련의 독재 정권도 실적을 위해 조작된 장부상 수치 때문에 숱한 아사자를 낳은 바 있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도 겉모습은 발전했지만 속모습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현직 대통령이 검사 시절에 소문대로 강골이었다 치면 지금쯤은 악덕 중간상을 비롯한 각종 사회악의 근원들을 줄줄이 처단해야 맞지 않을까. 그렇게 보자면 이 나라도 진정한 '검찰 공화국'까지는 아직 아닌 모양이다.



[*] <허드슨 강변에서>는 현재 절판이지만 알라딘 말고 Yes24에서는 미리보기로 서문 전체를 볼 수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알라딘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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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검색하다 그랬는지, 하여간 평소에는 정신 없는 홈페이지 디자인 때문에 외면하던 예스24에 들어가 보니 그린비에서 나온 마르셀 모스 전기를 재정가로 원래 정가의 40%에 파격 할인 판매 중이었다. 혹시 알라딘에서도 파는가 싶어 확인해 보니 여기도 마찬가지이기에, 잘 되었다 싶어서 다른 책과 섞어서 얼른 구입해 어제 받아 보았다.


그린비 인물 시리즈는 푸코와 홉스봄 전기라든지, 일전에 한 번 살펴보았던 리쾨르 대담집처럼 흥미로운 자료가 제법 많았다고 기억하는데 지금은 더 이상 간행되지 않으려는지, 시리즈 2번으로 간행된 모스 전기를 재정가로 할인 판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뒤쪽 책날개에 적힌 근간 예정 도서 가운데 몇 권은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고 말았다.


모스 전기와 리쾨르 대담집을 번역한 변광배는 사르트르 전기를 비롯해서 사르트르와 카뮈, 말로와 드골, 사르트르와 아롱 등의 공동 전기도 번역한 것으로 미루어 전기 분야에 각별히 흥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여차 하면 충분히 흥미로운 시리즈를 만들어낼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도 번번이 출판사를 옮겨 다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마르셀 모스 전기의 경우, 나귀님 역시 <증여론>밖에는 아는 바가 없는 상태였지만, 역자 해설에서 밝힌 것처럼 저 인류학자의 생애를 스쳐가는 수많은 학자들의 이름만 일별해도 충분히 흥미로워 보이기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모스가 뒤르켐의 조카이자 아롱의 당숙이라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지만 말이다.(아롱 자서전을 확인해 봐야겠다).


역시나 변광배가 옮긴 사르트르와 아롱의 공동 전기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 두 사람이야말로 평생의 라이벌이라고 해야 하나 싶은 느낌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학문적 엄밀함이나 통찰의 정확함 면에서는 아롱이 앞서지만, 전반적인 명성이나 영향력 면에서는 사르트르가 단연 앞선다. 사르트르는 알아도 아롱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우리의 입장에서 사르트르와 아롱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 대목은 아마도 한국전쟁의 원인을 둘러싼 양측의 분석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련이며 공산당에 현혹되었던 사르트르와 대부분의 프랑스 지식인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한의 북침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던 반면, 아롱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이라고 정확히 추론해냈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아롱과 함께 옳은 편에 서느니, 사르트르와 함께 그른 편에 서는 편이 더 좋다"는 일종의 구호로 잘 표현될 만했다고 전한다. 나귀님은 이 구호를 디디에 에리봉의 레비스트로스 대담집에서 처음 접하고 놀랐는데, 나중에 아롱의 대담집을 살펴보았더니 그 역시 이 구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직접 언급하기까지 했다.


사실에 입각한 합리적 판단과는 동떨어진 억지 주장일 뿐이지만 그 당시 소련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던 상당수 프랑스 지식인이 이런 식의 동지애, 또는 팬심에 동조하고 있었다니 딱한 일이다. 오죽하면 아롱이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저서에서 그런 작태에 대해서 일침을 가했을까. 하지만 현실은 아롱이 사르트르의 그늘에 가려 있는 상태다.


이제 본격적인 총선 유세가 시작되었다. 나귀님의 기준으로는 하나같이 위선자에 불과한 사람들이 근거 없는 막말과 허위 공약을 일삼는 혼탁한 선거판이지만, 또다시 팬심이 발동하면 역시나 아롱보다는 사르트르라는 식의 여론몰이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아롱에 해당하는 후보자가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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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넷플릭스에서 "위아더월드" 녹음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겠다며 틀어놓기에, 뭐, 예전에 제인 폰다가 해설한 비슷한 다큐멘터리도 이미 봤었는데, 거기서 더 나올 이야기가 있나 싶었더니만, 막상 보고 있자니 새삼 반가운 얼굴도 있고 뜻밖의 이야기도 많아서 의외로 흥미진진하게 시청했다.(이놈들아, 리즈 시절의 실라 E를 그렇게 푸대접했다니! 알고 보니 알 재로와 스티비 원더가 빌런! 밥 딜런은 자기 노래밖에 못 부르는 바보...). 


제인 폰다 해설 다큐멘터리와 일부 겹치는 내용도 있었지만, 일부 빠진 내용도 있으니 (예를 들어 스티비와 레이의 추가 녹음 장면 같은 것) 넷플릭스를 본 사람이라면 유튜브에서 이것도 함께 찾아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녹음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지켜본 바깥양반의 총평은 "퀸시 존스가 고생했네"라는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 역대급 포함 당시의 최고 스타 40여 명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통솔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넷플릭스에서는 마침 퀸시 존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있기에 앞부분만 잠깐 보다 말았는데 (중간에 전혀 안 닮아 보이는 아가씨들이 나타나서 아빠라고 부르기에 무슨 영문인가 생각해 보니, 한때 캣피플 언냐랑 살면서 낳은 아기가 이제는 다 커서 어른이었다. 혹시 정준영이 말한 "퀸시 존스 딸"이 바로 그 딸이라도 되었던 건지?) 나중에 알라딘에 들어와 보니 퀸시 존스 자서전 북펀드가 뜨기에, 혹시 돌아가셨나 싶어 확인해 보니 아니었다.


그런데 알라딘 북펀드에 근간 예정으로 나온 책은 퀸시 존스의 "자서전"이라고 광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세이"라거나 "자전적 에세이"에 불과해 보인다. 왜냐하면 존스의 공식 자서전은 2002년에 나온 <큐: 퀸시 존스 자서전(Q: THE AUTOBIOGRAPHY OF QUINCY JONES)>이고, 이번에 나올 책은 인생론이나 예술론에 해당하는 <12음: 인생과 창의성에 관하여(12 NOTES: ON LIFE AND CREATIVITY)>라서 원제부터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자전적 에세이에도 저자의 인생에 대한 회고담은 들어 있겠지만 본격적인 자서전만큼 상세하지는 않을 터이니, 혹시나 퀸시 존스의 인생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1차 자료의 번역서를 보기 위해 북펀드에 참여하거나 구매에 동참하는 독자가 뒤늦게나마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일이 없도록 "자서전"과 "자전적 에세이"를 정확히 구분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쉽게 말해 퀸시 존스가 "직접 쓴 책"이 모두 "자서전"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최근 나온 책들 중에는 "자서전"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닌가 싶은 것들도 없지 않다. 또 다른 북펀드인 엄인호와 안치환의 "자서전"도 실제로는 "대담집"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무하마드 깐수의 "회고록"도 실제로는 이런저런 쪽글을 엮어 만든 "자전적 에세이"에 가까워 보이니 말이다. 어쩐지 "유모차"와 "미망인"을 문맥 무시하고 직독직해해서 어그로만 끌었던 무지와 악의가 "자서전"에까지 적용된 결과인가 싶기도 하고...




[*] 책이 결국 나왔기에 살펴보니 출판사에서도 "자서전"이라는 말을 슬그머니 "자전적 에세이"로 바꿔놓았다. 애초부터 좀 제대로 알고 쓸 것이지... 그나저나 미리보기로 확인하니 요상한 비문도 들어 있고 해서, 딱히 제대로 만든 책 같지는 않더라만... (이것도 알려주면 슬그머니 고치고 입 싹 닫겠지!) 이놈들아, 알바비 내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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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에 <스탈린의 서재>라는 것이 눈에 띄기에 눌러 보니 제목 그대로 저 악명 높은 소련 독재자의 독서 생활에 관한 책인 모양이다. 문득 히틀러와 마오쩌둥에 대해서도 비슷한 책이 나오지 않았었나 싶어 검색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히틀러의 비밀 서재>와 <마오의 독서 생활>이라는 책이 각각 간행되었다가 지금은 모두 절판된 모양이다.


세 명 모두 역사에 부정적인 족적을 크게 남긴 사람들이다 보니, 독서라는 외관상 무해하고 종종 바람직한 행동과 연관지어 생각하기가 쉽지 않을 법도 하다. 십중팔구 그렇게 어마어마한 범죄와 실책으로 큰 후유증을 남긴 사람들의 인물됨을 이해하려는 다각도의 노력 가운데 하나로써 평소의 독서 습관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2만 5천 권, 히틀러는 1만 6천 권에 달하는 장서를 수집했고, 마오쩌둥도 도서관 사서로 경력을 시작해서 말년까지도 독서를 즐겼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세 명 모두 만만찮은 독서 이력을 소유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만하다. 다만 현재 세 명 모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만 놓고 보면, 과연 책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이건 사실 오늘날의 우리나라 정치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데, 명목상으로는 이 나라에서 제일 똑똑하고 제일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대통령실이고 국회고 법원이고 검찰이고 정부종합청사고 기타 각종 기관에서는 수시로 실책이며 억지며 궤변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책으로 상징되는 상식과 지식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정치인이다 하면 최소한 <군주론>이나, 하다못해 <삼국지>는 한 번쯤 읽어보았음직 한데, 지난 정부나 현 정부에서나 그런 필독서에 나온 지혜나 조언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에는 유명한 "읍참마속"의 일화가 나오고, <군주론> 서두에도 신하를 희생양 삼아 백성의 환심을 사라고 나왔는데 말이다.


어쩌면 책과 현실의 괴리야말로, 이론과 실천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니, 이런 점에서 보자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3인의 삶을 이들의 독서 습관에서 찾으려는 시도 자체도 딱히 의미까지는 없을 수 있다. 제아무리 훌륭한 조언과 지혜를 수없이 이론으로 접했더라도, 정작 이들의 결정과 실천은 수백수천만 인류의 불행을 야기하고 말았으니까.


<전쟁터로 간 책들>에 나오듯, 히틀러에 맞서 싸운 미군 병사들도 진중문고를 통해 독서를 즐겼지만, 어떤 전투나 작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나 노래처럼 팍팍한 삶에서 위로와 재미를 얻기 위해서였다. 쉽게 말해 현직 대통령이 아무리 책이며 영화나 노래를 많이 접해도, 정작 미쳐 돌아가는 사과며 대파 가격에는 별 영향이 없을 수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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