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에 올라갔다가 책더미 맨 위에 올라앉은 레이 황의 <만력 15년>을 보니, 거기 부록으로 수록된 저자의 에세이 가운데 야채 가격 급등에 관한 일화가 들어 있었던 것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해당 글이 저자의 또 다른 저서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의 서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만력 15년>은 원래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구판으로 갖고 있었지만, 누군가 말하길 후자는 영어판의 번역이고 전자는 중국어판의 번역이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법하다기에, 뒤늦게야 중고샵에서 전자를 한 권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책을 사서 부록으로 첨가된 에세이를 읽다가 야채 관련 대목을 접했던 것이었다.


마침 수년 전 대파 가격이 왕창 뛰어서, 일각에서는 파테크라고 해서 직접 재배하는 사람도 나올 즈음이다 보니, 딱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인 1973년에 중동 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그때부터 문제였구나!) 미국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집집마다 마당에서 야채를 키워 자급자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 부부도 자연히 자급자족 대열에 동참해서 오이며 토마토를 직접 재배했지만, 흙을 일구는 일부터 갖가지 부대 비용을 감안하면 사실 이득까지는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그 지역은 일반적인 야채보다 사과 농사에 더 적합해서 집집마다 사과나무가 있었고, 수확철마다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와 사과를 따곤 했다.


물가 폭등으로 야채가 귀해지자 너도나도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다시 야채가 흔해지자 농사를 포기하는 미국인의 실리적인 행동이며, 사과 수확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동원하면서 숙식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인력 관리며 농업 경영을 지켜보며, 저자는 새삼스레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고찰해 본다.


결론적으로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삼아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경시한 까닭이라지만, 저자는 뒤늦게나마 중국이 자본주의 방식을 일부 수용했으니만큼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중국은 급속한 경제 발전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장기적 시야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인 듯하지만,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때에 중간중간 나타나는 역류나 정체를 겪으며 갖가지 고초를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식과도 유사해 보이는 이런 설명을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 법하다.


미국 동부 허드슨 강변 작은 동네의 야채 농사며 사과 재배는 그렇다 치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대파와 사과 가격 폭등의 현실에 대해서는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미 충분히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적인 야채와 과일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온 국민을 괴롭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농업과 유통이며 기후 문제까지 다양한 설명이 나오지만, 사실 이런 일이 이번 정부 말고 이전 정부 때부터 수년째 반복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찍이 허생이 이런저런 물건을 매점매석할 때마다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을 보고 작은 나라의 현실을 개탄했던 것과도 비슷하달까.


구매자는 비싸게 샀다며 난리이고, 생산자는 헐값에 팔았다고 난리이니, 중간 유통업자의 농간이 실제로 있다 치면 발본색원하는 것이 방책일 터인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대책은 고사하고 실상조차 알 수 없으니, 애초부터 개선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개선할 의지가 없는 것이었을까. 어쩐지 허생의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이 슈퍼마켓에 나타나자 한 단에 5천 원대를 오가던 대파 가격이 800원대로 다시 책정되어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보여주기를 하고 말았으니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포템킨 마을'의 변종인 셈인데, 지켜보는 눈이며 렌즈가 많은 세상에서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부터가 전근대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포템킨 마을'은 이전 정권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13평 아파트에 4인 가족이 살 수 있다'는 발언이 그렇지 않았나. 군대에서 높은 분이 시찰을 올 때마다 낙엽 하나 떨어지지 않게 청소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며, 과거 중국이나 소련의 독재 정권도 실적을 위해 조작된 장부상 수치 때문에 숱한 아사자를 낳은 바 있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도 겉모습은 발전했지만 속모습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현직 대통령이 검사 시절에 소문대로 강골이었다 치면 지금쯤은 악덕 중간상을 비롯한 각종 사회악의 근원들을 줄줄이 처단해야 맞지 않을까. 그렇게 보자면 이 나라도 진정한 '검찰 공화국'까지는 아직 아닌 모양이다.



[*] <허드슨 강변에서>는 현재 절판이지만 알라딘 말고 Yes24에서는 미리보기로 서문 전체를 볼 수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알라딘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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