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이 친구들과 약속 있어 연남동에 간다기에 문득 희곡 전문 서점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1인당 1만 5천 원 정도로 생각하고 가면 배불리 읽을 수 있고, 추가 요금을 내면 노래를 곁들여 뮤지컬로 각색해 준다고도 하던데, 가보지 않았으니 진짜인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우연히 지만지 희곡선 가운데 '박준용 번역 희곡선'이라는 이름으로 전15권짜리 시리즈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90년대에 포도원이라는 출판사에서 '포도원 희곡선'이라고 해서 제1집 전20권, 제2집 전10권, 도합 30권으로 간행된 것 중 일부이다.


포도원에서는 서른 권이나 나왔는데 지만지에서는 그중 절반만 재간행된 것으로 미루어, 아마 절판된 사이에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저작권 계약이 불가한 작품이 있어서인가 짐작했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제2집 전10권 중에는 박준용의 번역이 아닌 것도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확인해 보니 전30권 가운데 박준용 번역은 스물두 권이고, 나머지 여덟 권은 다른 번역자가 담당했다. 참고로 포도원 희곡선 전30권과 그중 지만지의 박준용 번역 희곡선 전15권으로 재간행된 작품(* 표시)을 목록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번역자 이름이 없는 것은 박준용의 번역서다.


1. 세추앙의 착한 여자 (베르톨트 브레히트)

* 2. 서쪽나라의 멋쟁이 (존 밀링턴 씽)

* 3. 쥬노와 공작 (숀 오케이시)

4. 미스 쥴리 (아우구스트 스트린베리히)

* 5. 마라/싸드 (페테르 바이스)

* 6. 칭칭[헬로 굿바이] (시드니 마이클스)

7.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스본)

* 8. 미친 사람들 (존 오튼)

* 9. 바람둥이 알피 (빌 노턴)

* 10. 희한한 한 쌍 (닐 사이먼)

* 11. 굿 닥터 (닐 사이먼)

* 12. 플라자 스위트 (닐 사이먼)

* 13. 태양제국의 멸망 (피터 셰퍼)

* 14. 요나답 (피터 셰퍼)

15. 안내놔? 못내놔! (다리오 포)

* 16.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우디 알렌)

* 17. 리타 길들이기 (윌리 러셀)

18. 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19.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 20.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 (닐 사이먼)

21. 빌록시 블루스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2. 브로드웨이 바운드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3. 꿀맛 (샐라 딜래니) [정진수 옮김]

24. 스니키 휘치의 죽음 (제임스 로젠버그) [정진수 옮김]

25. M. 나비 (데이빗 헨리 황) [정진수 옮김]

26. 웃음 넘치는 교수대 (잭 리차드슨)

* 27. 폭력시대 (쥴스 파이퍼)

28. 나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9. 리틀 말컴 (데이빗 홀리웰) [김철리 옮김]

30. 프랭키와 쟈니 (테렌스 맥널리) [김철리 옮김]


결국 셰익스피어와 스트린베리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하고 현대 작가들 위주로 재간행된 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닐 사이먼의 걸작인 '브라이턴비치 3부작' 가운데 첫 작품만 박준용 번역인 관계로 지만지에서도 결국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만 재간행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나귀님은 포도원 희곡선 전30권 가운데 스물세 권을 갖고 있는데, 셰익스피어와 브레히트 등 중복되는 작품은 구입하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 다시 구글링해 보니, 몇몇 작품은 1980년대에 연극 전문 출판사 예니에서 '박준용 번역 희곡 선집'이라는 제목으로 합본 간행된 적도 있었던 듯하다.


재간행된 '박준용 번역 희곡선'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역시 닐 사이먼의 <희한한 한 쌍>이었다. 포도원 판본에서는 똑같은 페이지를 두 번 인쇄한 사고가 벌어져 한 페이지 분량이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결국 나귀님이 직접 번역하고 종이에 출력해서 오려 붙여놓았다!)


<에쿠우스>로 유명한 피터 셰퍼의 <요나답>도 요즘 분위기에서는 각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다윗 왕의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희곡은 그 과정에서 암논을 부추겼던 모사꾼 요나답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사태의 전말을 관찰한다.


<바람둥이 알피>도 최근 정우성 사생아 논란에 다시 생각난 작품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만나는 여자마다 줄줄이 임신시키지만 결혼은 거부하며 끝까지 얌체처럼 군다는 내용이다. 1966년 마이클 케인, 2004년 주드 로 주연으로 두 번이나 영화화되었고, 소니 롤린스의 사운드트랙도 유명하다.


그래도 최고의 걸작이라면 닐 사이먼의 '브라이턴비치 3부작'이다. 지난번 비상 계엄 당시 부당한 명령과 복종의 의무 앞에서 우왕좌왕했던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빌록시 블루스>의 내용을 떠올린 기억이 난다. 육군 훈련소를 배경으로 의무와 양심의 충돌을 보여주는 꽤 '웃픈' 내용이다.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도 3부작 모두의 주인공이자 닐 사이먼의 분신인 소년 유진의 관점으로 전개된다.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에 부모님과 형을 포함해 네 식구가 살던 집에 이모와 두 딸이 더부살이를 하게 되면서, 모두 일곱 식구가 복닥복닥 살아가며 갈등과 화해를 겪는다는 내용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주인공 소년이 사촌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려 한다는 대목이 지금으로선 불편과 분노를 자아낼지도 모르겠지만, 초연 당시에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냈던 것처럼 보인다. 초연 당시 주인공은 훗날 <패리스 뷸러의 휴일>로 스타가 된 배우 매슈 브로더릭이었다.


희곡으로만 읽을 때에는 몰랐는데, 유튜브의 연극 공연 영상을 보니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은 대사 하나하나마다 관객이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운 작품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갑분싸' 장면에서는 방금 전의 웃음소리가 싹 가시고 객석이 고요해지며 숙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떤 장면인가 하면, 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한 살림에 세 식구가 추가되어 일곱 식구가 식사를 하는데, 간(肝) 요리가 식탁에 나오자 모두들 이 맛없는 걸 왜 자꾸 내놓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막내아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자, 아버지도 거들며 왜 맨날 간만 사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어머니가 참다 폭발한 듯 이렇게 대꾸한다. "우리 돈으로 일곱이 먹으려면 간밖에는 못 사니까 그렇지!" 그러자 불평하던 식구들은 입을 다물고, 티격태격하는 것 외에는 별 문제 없어 보이던 가정의 힘겨운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도 놀란 듯 침묵을 지키면서 무대를 주시한다.


희곡은 어디까지나 뼈대일 뿐이고, 배우의 연기와 객석의 반응까지 곁들여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연극이 완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평생 단 한 번도 돈 내고 연극을 본 적은 없이 희곡만 열심히 사고 읽은 나귀님의 입으로 말하자니 뭔가 좀 민망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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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엔가 우연히 알라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니 <초역 부처의 말>이라는 낯선 책이 1위로 올라 있다. 이건 또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동경대 나온 스님이라고 해서 유명했던 일본인 저자의 책이었다. 제목 그대로 불경에 나온 부처의 발언을 현대적으로 서술하고 해석하는 모양이다.


최근 갑작스러운 쇼펜하우어 열풍을 감안하면 부처 열풍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왜 하필 이 책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 구글링해 보니 너무나 단순한 이유라서 살짝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최근 장원영이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와서 이 책을 요즘 읽었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결국 인기 연예인이 읽었다는 소문 때문에 너도나도 구매하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뿐인데, 심지어 요지부동의 한강 소설조차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으니 (지금은 다시 한강에게 1위를 빼앗겼지만 여전히 상위권이다) 아이돌 최강자 럭키비키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겠다.


그런데 마침 알라딘에서는 '21세기 최고의 책'을 선정해서 발표한 직후이다 보니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선정 도서 809권 중에 한강 책을 제외하면 베스트셀러 순위 100위권에 <사람, 장소, 환대>, 150위권에 <멀고도 가까운>, <정의란 무엇인가>, <사피엔스>가 들어 있을 뿐이니까.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인 기획이 럭키비키의 한 마디에 압도당한 셈이니 알라딘에서도 살짝 현타를 느끼지 않겠나. 이럴 거면 '21세기 최고의 책' 대신 '아이돌 선정 최고의 책'을 발표했어야만 화제성은 물론이고 서점 매출 면에서도 훨씬 더 압도적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나저나 '21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서적 중에는 이미 절판된 것도 상당수이니, 새삼 책의 수명이 생각만큼 길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25년간의 미디어 추천 도서며 '올해의 책' 목록을 살펴보아도 대부분 절판이었으니, 그런 책 대부분은 시의적인 것뿐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이쯤 되면 초판 간행 이래 절판된 적 없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 같은 고전의 위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인기에 비하면 장원영이며 <초역 부처의 말>의 인기야 머지않아 사그라질 터이니 참 허무하지 않나 싶다가도, 새삼 카리나는 또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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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최근 완독한 로알드 달의 회고록 <단독 비행>에서도 동체 착륙 체험기가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에 자원 입대한 저자가 속성 조종사 훈련을 받고 나서 단독 비행으로 임지를 찾아 나서는데, 잘못 전달된 정보 때문에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결국 해질녘이 되어 동체 착륙을 시도하게 된다.


역시나 사막 불시착 체험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발표한 셍텍쥐페리와 유사하게, 로알드 달도 이때의 체험 이후 두뇌가 색다른 자극을 받으면서 창작열이 불타오르게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회고록 말고 전기에 따르면 이야기꾼 특유의 말솜씨로 불시착 체험부터 실제와는 영 딴판으로 윤색한 부분이 적지 않다지만 말이다.


아동서 저자로서 로알드 달의 명성을 감안하면 <단독 비행>도 지금처럼 청소년물로 간행되는 것이 온당해 보이기는 하지만, 부조리 고발 위주인 내용상 솔직히 성인쯤 되어야 제대로 공감할 만하지 않나 싶다. '스핏파이어'를 '스핏파이터'로 오기한 부분 등을 보면, 후반부 공군 복무담에는 '밀덕'의 감수도 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최인호와 이우범, 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또는 와다 하루키)의 경우처럼, 로알드 달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사실상 전담 삽화가인 퀜틴 블레이크인데, 마침 알라딘 북펀드에서 이 양반 전기를 간행한다며 한동안 광고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서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결국 간행되기는 간행된 모양이다.


그런데 북펀드 광고에서 살짝 의아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저 삽화가의 또 달라진 이름이었다. 원래 QUENTIN은 "퀜틴"으로 쓰고, 실제 발음도 네이버 사전에는 미국과 영국 공히 "퀜튼"(/ˈkwɛntn/ 또는 /kwéntn/)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 간행된 전기의 제목처럼, 이제는 "퀜틴" 대신 "퀸틴"이란 표기가 이미 대세인 듯하다.


사실 QUENTIN이라는 이름은 출판계에서 꽤 오래 전부터 골칫거리로 간주되었다. 컴퓨터가 출판 편집에 도입된 것이 1990년대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완성형 한글에서 "퀜"이라는 표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이제는 외면한다는 아래한글이 대세가 된 까닭도 조합형 한글로 "퀜"과 "뚫훍" 표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출판 편집 프로그램은 조합형이 아니라 완성형만 지원해서, "퀜틴"을 표기하려면 "퀜"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만들어서 본문의 해당 위치에 놓아두어야 했다. 그 와중에 그림 위치가 잘못되어서 글자가 사라지는 문제도 빈번했으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제인에어> 초판에서도 "하얬다"가 "하_다"로 여러 번 잘못 나왔다.


그러다 보니 편의상 고유명사 표기를 바꾸기도 했으니, QUENTIN이라는 이름을 "쿠엔틴"으로 쓰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퀜틴"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지금도 "쿠엔틴 타란티노"와 "퀜틴 스키너"처럼 표기가 제각각이 된 이유는 그래서였다. QUENTIN BLAKE 역시 "퀜틴"과 "퀀틴"과 "퀸틴"까지 출판사마다 제각각이다.


현재 알라딘 국내도서에서 QUENTIN BLAKE로 검색하면 중복 포함 77종이 나오는데, 그중 "퀜틴"은 23종, "퀸틴"은 23종, "퀀틴"은 31종이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살림어린이의 표기법인데, <세계 최고의 동화는 이렇게 탄생했다>에서는 "퀜틴", <단독 비행>에서는 "퀀틴",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에서는 "퀸틴"으로 제멋대로이다.


그래도 달과 블레이크 콤비의 책을 가장 많이 간행한 시공주니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퀜틴"에서 "퀸틴"으로 갈아타는 것이 대세로 보인다. 하지만 사전의 발음과 다르면 잘못 아닌가 싶어 유튜브에서 BBC 뉴스를 들어 보니 진짜 "퀸튼"처럼 들리기도 한다. 결국 사전의 발음 표기보다는 현지 발음을 반영한 결과일까.


그렇다면 한때 "퀜"을 그림 파일로 만들어서 일일이 갖다 붙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출판사 편집자들로서는 살짝 억울할 수도 있겠다. 외국어 표기 원칙이야 어쨌거나 간에, "퀜"을 "퀀"이나 "퀸"으로 (또는 "하얬다"를 "하얗다"로) 살짝 다르게 표기하며 편리하게 작업했어도 굳이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았을 법하니 말이다.


오래 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듯이 처음에는 "알라딘"도 "앓랉딚"이었고, "나귀님"도 "낪궱닋"이었지만 표기가 어려운 까닭에 지금처럼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국가를 운영하는 법과 원칙마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지금의 시점에 와서 돌아보면 "퀜"의 표기 하나를 가지고 절절 맸던 과거지사야말로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 국내 최고의 서점 YES24에서 고화질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퀸틴 블레이크>의 22-23쪽에 나온 <스펙테이터> 표지에 대한 캡션에는 잘못된 부분이 있다. 영어 원서에는 아마 캡션이 없었겠지만 국내 독자의 편의를 위해 집어넣은 듯한데, 각 권의 표지에 나온 특집 기사명을 잘못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8쪽 왼쪽의 표지를 "<롤리타>, 1959"라고만 썼는데, 실제로는 나보코프의 소설이 아니라 "킹즐리 에이미스의 <롤리타> 서평"이 수록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19쪽 아래 오른쪽의 표지를 "소비에트 작가들, 1965"라고만 썼는데, "데즈먼드 스튜어트의 기고문 '소비에트 작가 마을에서'"가 수록되었다는 뜻이다. 특집 기사가 부각된 호도 있고 아닌 호도 있으니 (예를 들어 캡션에서 빠진 19페이지 아래 왼쪽의 표지에서는 <스펙테이터>를 잔뜩 가진 아저씨가 그 호의 기고문 가운데 하나인 "아동서"를 꼬마에게 건네주는 장면을 재치 있게 묘사했다) 차라리 특집 기사가 있는 경우에만 내용을 요약하고, 주간지임을 감안하여 날짜 표기는 "1959년 11월 6일자"와 "1965년 8월 27일자" 등으로 써 주면 어땠을까 싶다. 그나저나 "퀸틴 블레이크 버전 '롤리타'"라니... 지금은 아동서 삽화가로 더 유명하지만, 잡지 표지로 경력을 시작한 퀸틴 블레이크의 폭넓은 활동 반경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다.(물론 지금쯤 어느 한구석에선가는 '변태 아동성애자 그림쟁이의 책 불매 운동'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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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특급> 리메이크가 나온 1985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어메이징 스토리>라는 유사한 시리즈도 나왔다. 역시나 공포와 환상을 소재로 하는 단편 드라마로 우리나라에서는 비디오로 나왔다가 나중에 TV에서도 방영되었는데, 비록 2시즌에 그쳤지만 원래는 <어메이징 스토리>가 <환상특급> 리메이크보다 먼저였다고 한다.


여기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스필버그가 직접 감독하고 무명 시절의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미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가 출격했다 돌아오는데, 하필 랜딩기어가 고장나서 동체 착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폭격기 하단의 기관총 포탑에 대원 한 명이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칙상으로야 한 명의 희생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맞지만, 조종사와 지휘관을 포함해 10여 명에 달하는 다른 대원들은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불가피한 죽음을 앞둔 포탑 속 대원은 흥분한 나머지 최면 비슷한 상태에서 평소의 특기대로 지금 자신의 가장 간절한 소원을 스케치북에 그림으로 그린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난다. 랜딩기어가 망가진 폭격기의 앞부분에 만화 그림체로 커다란 바퀴 두 개가 달린 것이다. 대원들은 눈을 의심하면서도 그 바퀴에 의존해 안전하게 착륙하고, 최면 비슷한 상태에 빠진 포탑 속 대원을 안전하게 구출한다. 그리고 대원이 정신을 차린 순간, 만화 바퀴가 사라지며 비행기가 털썩 주저앉는다.


그런데 나중에 <사냥개 탐정>의 원작자인 이나미 이쓰라의 단편집 <세인트 메리의 리본>을 읽다 보니, 거기 수록된 "보리밭 미션"이라는 단편의 내용이 앞에서 설명한 "미션" 에피소드의 내용과 똑같았다. 즉 전투 중에 고장으로 동체 착륙을 해야 하는 폭격기 하단의 포탑에 사람이 하나 갇혀서 뭔가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타니구치 지로의 만화 각색으로 처음 접했지만 결국 원작까지 찾아볼 정도로 좋은 인상을 받은 작가였는데, 이쯤 되면 표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구글링해 보니 "동체 착륙하는 비행기 하단 포탑에 갇힌 사람"에 대한 일화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크게 유행한 것으로,지금은 도시 전설 취급을 받는 듯하다.


즉 <어메이징 스토리>와 이나미 이쓰라 모두 같은 소재를 각색한 것은 맞지만, 양쪽 모두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를 재활용한 것이므로 굳이 표절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저 일본 소설가도 <어메이징 스토리>의 각색을 십중팔구 알고 있었겠지만, 그 일화의 매력 때문에라도 나름의 변주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지난 연말 일어난 여객기 참사에서도 동체 착륙 장면을 보자마자 "미션"과 "보리밭 미션"의 내용이 떠올랐었다. 두 가지 창작물 모두 기적적인 성공을 서술했지만, 현실은 그런 드라마나 소설 같지는 않아서 참담하게도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그런데 오늘은 여객기 화재 소식까지 전해지니 이건 또 무슨 노릇인가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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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즐겨 보던 <틈만 나면>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즌이 또다시 마무리된 모양이다. 유재석과 유연석이 게스트를 대동하고 사연 신청자의 틈새 시간에 찾아가서 간단한 게임으로 상품을 전달하는 내용인데, 지금은 실내에만 틀어박힌 <유퀴즈 온 더 블록>의 과거 진행 방식을 연상시킨 탓에 친밀감이 든 모양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게임에 걸린 상품을 소개할 때에 행운의 과자를 이용한다. 만두처럼 길쭉한 과자를 쪼개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가느다란 띠에 이런저런 격언과 조언이 적혀 있는 물건이다. 예전에 미국 드라마를 보면 중국 음식점의 후식으로 종종 등장했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정통 중국 문화까지는 아닌 모양이다.


행운의 과자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1980년대에 방영된 <환상특급>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인 "불운의 쿠키"이다. 독설로 유명한 어느 신문의 음식 평론가가 어느 중국 음식점을 방문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식후에 내놓는 행운의 과자 속 쪽지에는 손님의 가까운 미래를 예언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4월이니 좋은 소식 예감"이라는 쪽지를 꺼낸 주인공은 지금이 9월인데 말이 되느냐고 짜증을 내며 일어났지만, 다음날 우연히 길에서 만난 멋진 여성에게 도움을 주고 데이트 약속까지 하고 보니 그녀의 이름이 바로 '에이프릴'(4월)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주인공은 아예 그녀를 데리고 중국 음식점에 다시 찾아간다.


하지만 식후에 여자가 꺼낸 행운의 과자 속 쪽지에는 '사람을 가려 만나라'는 경고가, 남자가 꺼낸 행운의 과자 속 쪽지에는 '당신은 곧 죽는다'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격분한 음식 평론가는 중국 음식점 직원의 멱살을 잡는 등 행패를 부리고, 의외의 모습에 상대방의 실체를 깨달은 여자는 재빨리 작별을 고하고 나가버린다.


그런데 씩씩대며 밤거리로 나온 음식 평론가는 몇 걸음 못 가서 어마어마한 허기를 느끼며 배를 움켜쥔다. 때마침 저 앞에는 처음 보는 을씨년스러운 느낌의 중국 음식점이 나타나고, 남자가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등장해서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히고 음식 접시를 날라온다. 주인공은 허겁지겁 음식을 손으로 퍼먹기 시작한다.


잠시 후, 빈 접시가 수북이 쌓일 정도로 게걸스레 음식을 삼키던 주인공은 영 허기가 가라앉지 않는 것에 이상한 느낌을 받는데, 곧이어 직원이 가져온 행운의 과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서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라는 쪽지가 나온다. 음식이 계속 쌓이는 가운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구글링해 보니 "불운의 과자"는 <환상특급>의 첫 리메이크(1985-1989)에서 1시즌 14번째 에피소드였고, <프렌즈>에서 모니카 아빠로 출연한 엘리엇 굴드가 성미 고약한 음식 평론가 역을 맡았다. 레이 브래드버리 원작의 "엘리베이터"며, 스티븐 킹 원작의 "할머니"와 함께 특히나 기괴한 내용으로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그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하루아침에 언어가 달라진 세상에 떨어진 남자의 이야기인 "말장난"이다. 나중에는 다른 인물의 대사가 문장 대신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로 대체되는데, KBS 방영분에서도 그걸 그대로 옮기는 바람에 ('바닷물 굴러간다 프라이팬 자갈') 진짜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작품은 "어린이 동물원"이다. 하루 온종일 말다툼을 벌이는 부부가 딸의 학교 숙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린이 동물원에 함께 온다. 입구에서부터 보호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된다는 안내에 만족스러워하며 말다툼을 재개하던 부부였지만, 알고 보니 이 동물원은 무자격 부모를 가두고 길들이는 곳이었다!


마치 수족관을 연상시키는 동물원 안에는 수많은 무자격 부모들이 유리장 속에 갇혀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부는 당장 문을 열라고 아이에게 윽박지르는 반면, 들어온 지 한참이라 자기네 행동을 반성한 듯한 부부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면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결국 아이는 다정한 목소리로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한 부부를 골라서 새로운 엄마아빠로 데려가고, 함께 왔던 친부모는 유리장 속에 갇힌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한동안 무자격 부모의 아동 학대 뉴스가 나올 때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었던 에피소드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린이 동물원" 에피소드를 감독한 사람이 로버트 다우니라는 점이다. 지금은 같은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아들(주니어) 때문에 아버지(시니어)라는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데, 앞서 언급한 "말장난"에는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구글링 끝에 새삼스레 저 추억의 '미드'의 나이를 실감하게 되었다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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