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이 친구들과 약속 있어 연남동에 간다기에 문득 희곡 전문 서점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1인당 1만 5천 원 정도로 생각하고 가면 배불리 읽을 수 있고, 추가 요금을 내면 노래를 곁들여 뮤지컬로 각색해 준다고도 하던데, 가보지 않았으니 진짜인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우연히 지만지 희곡선 가운데 '박준용 번역 희곡선'이라는 이름으로 전15권짜리 시리즈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90년대에 포도원이라는 출판사에서 '포도원 희곡선'이라고 해서 제1집 전20권, 제2집 전10권, 도합 30권으로 간행된 것 중 일부이다.
포도원에서는 서른 권이나 나왔는데 지만지에서는 그중 절반만 재간행된 것으로 미루어, 아마 절판된 사이에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저작권 계약이 불가한 작품이 있어서인가 짐작했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제2집 전10권 중에는 박준용의 번역이 아닌 것도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확인해 보니 전30권 가운데 박준용 번역은 스물두 권이고, 나머지 여덟 권은 다른 번역자가 담당했다. 참고로 포도원 희곡선 전30권과 그중 지만지의 박준용 번역 희곡선 전15권으로 재간행된 작품(* 표시)을 목록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번역자 이름이 없는 것은 박준용의 번역서다.
1. 세추앙의 착한 여자 (베르톨트 브레히트)
* 2. 서쪽나라의 멋쟁이 (존 밀링턴 씽)
* 3. 쥬노와 공작 (숀 오케이시)
4. 미스 쥴리 (아우구스트 스트린베리히)
* 5. 마라/싸드 (페테르 바이스)
* 6. 칭칭[헬로 굿바이] (시드니 마이클스)
7.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스본)
* 8. 미친 사람들 (존 오튼)
* 9. 바람둥이 알피 (빌 노턴)
* 10. 희한한 한 쌍 (닐 사이먼)
* 11. 굿 닥터 (닐 사이먼)
* 12. 플라자 스위트 (닐 사이먼)
* 13. 태양제국의 멸망 (피터 셰퍼)
* 14. 요나답 (피터 셰퍼)
15. 안내놔? 못내놔! (다리오 포)
* 16.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우디 알렌)
* 17. 리타 길들이기 (윌리 러셀)
18. 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19.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 20.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 (닐 사이먼)
21. 빌록시 블루스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2. 브로드웨이 바운드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3. 꿀맛 (샐라 딜래니) [정진수 옮김]
24. 스니키 휘치의 죽음 (제임스 로젠버그) [정진수 옮김]
25. M. 나비 (데이빗 헨리 황) [정진수 옮김]
26. 웃음 넘치는 교수대 (잭 리차드슨)
* 27. 폭력시대 (쥴스 파이퍼)
28. 나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닐 사이먼) [김철리 옮김]
29. 리틀 말컴 (데이빗 홀리웰) [김철리 옮김]
30. 프랭키와 쟈니 (테렌스 맥널리) [김철리 옮김]
결국 셰익스피어와 스트린베리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하고 현대 작가들 위주로 재간행된 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닐 사이먼의 걸작인 '브라이턴비치 3부작' 가운데 첫 작품만 박준용 번역인 관계로 지만지에서도 결국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만 재간행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나귀님은 포도원 희곡선 전30권 가운데 스물세 권을 갖고 있는데, 셰익스피어와 브레히트 등 중복되는 작품은 구입하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 다시 구글링해 보니, 몇몇 작품은 1980년대에 연극 전문 출판사 예니에서 '박준용 번역 희곡 선집'이라는 제목으로 합본 간행된 적도 있었던 듯하다.
재간행된 '박준용 번역 희곡선'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역시 닐 사이먼의 <희한한 한 쌍>이었다. 포도원 판본에서는 똑같은 페이지를 두 번 인쇄한 사고가 벌어져 한 페이지 분량이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결국 나귀님이 직접 번역하고 종이에 출력해서 오려 붙여놓았다!)
<에쿠우스>로 유명한 피터 셰퍼의 <요나답>도 요즘 분위기에서는 각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다윗 왕의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희곡은 그 과정에서 암논을 부추겼던 모사꾼 요나답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사태의 전말을 관찰한다.
<바람둥이 알피>도 최근 정우성 사생아 논란에 다시 생각난 작품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만나는 여자마다 줄줄이 임신시키지만 결혼은 거부하며 끝까지 얌체처럼 군다는 내용이다. 1966년 마이클 케인, 2004년 주드 로 주연으로 두 번이나 영화화되었고, 소니 롤린스의 사운드트랙도 유명하다.
그래도 최고의 걸작이라면 닐 사이먼의 '브라이턴비치 3부작'이다. 지난번 비상 계엄 당시 부당한 명령과 복종의 의무 앞에서 우왕좌왕했던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빌록시 블루스>의 내용을 떠올린 기억이 난다. 육군 훈련소를 배경으로 의무와 양심의 충돌을 보여주는 꽤 '웃픈' 내용이다.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도 3부작 모두의 주인공이자 닐 사이먼의 분신인 소년 유진의 관점으로 전개된다.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에 부모님과 형을 포함해 네 식구가 살던 집에 이모와 두 딸이 더부살이를 하게 되면서, 모두 일곱 식구가 복닥복닥 살아가며 갈등과 화해를 겪는다는 내용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주인공 소년이 사촌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려 한다는 대목이 지금으로선 불편과 분노를 자아낼지도 모르겠지만, 초연 당시에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냈던 것처럼 보인다. 초연 당시 주인공은 훗날 <패리스 뷸러의 휴일>로 스타가 된 배우 매슈 브로더릭이었다.
희곡으로만 읽을 때에는 몰랐는데, 유튜브의 연극 공연 영상을 보니 <브라이턴 해변의 추억>은 대사 하나하나마다 관객이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운 작품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갑분싸' 장면에서는 방금 전의 웃음소리가 싹 가시고 객석이 고요해지며 숙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떤 장면인가 하면, 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한 살림에 세 식구가 추가되어 일곱 식구가 식사를 하는데, 간(肝) 요리가 식탁에 나오자 모두들 이 맛없는 걸 왜 자꾸 내놓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막내아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자, 아버지도 거들며 왜 맨날 간만 사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어머니가 참다 폭발한 듯 이렇게 대꾸한다. "우리 돈으로 일곱이 먹으려면 간밖에는 못 사니까 그렇지!" 그러자 불평하던 식구들은 입을 다물고, 티격태격하는 것 외에는 별 문제 없어 보이던 가정의 힘겨운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도 놀란 듯 침묵을 지키면서 무대를 주시한다.
희곡은 어디까지나 뼈대일 뿐이고, 배우의 연기와 객석의 반응까지 곁들여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연극이 완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평생 단 한 번도 돈 내고 연극을 본 적은 없이 희곡만 열심히 사고 읽은 나귀님의 입으로 말하자니 뭔가 좀 민망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