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책 안 산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책은 가끔 한두 권씩 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주 잠실롯데월드타워점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니꼴라이 고골>이 중고로 나와 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구입했다. 마침 이마 이치코의 취호 연작 가운데 최근작(그래도 무려 2021년 간행본)이 같은 지점에 있기에 배송료도 지울 겸 함께 구매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잠실롯데타워점 구매 도서는 아무래도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이마 이치코의 만화는 (언제부턴가 살짝 억지스러운 전개와 급마무리가 일반화되는 것 같아 불만이긴 하지만) 예외라고 해야 되겠지만, 가장 기대했던 나보코프의 고골 연구서가 알고 보니 번역도 엉망이었고, 품질 등급도 상급이라지만 실제로는 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번역 문제부터 짚어보자. 이 책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펼쳐 본 부분은 당연히 단편 "외투"에 대한 분석인 제5장 "가면의 극치"였다. 1980년대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러시아 문학과 저항정신>이라는 책에 수록되어서 처음 접했던 글인데, 이전까지는 단순히 소아성애자 성향의 변태 불곰 영감님인 줄로만 알았던 양반의 비평가로서의 역량을 깨닫고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니꼴라이 고골>에 수록된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니, 내가 기억하는 내용과는 뭔가 다른 거다. 이상하다 싶어 영어 원문을 구글링해 보니 오역인 듯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도 꺼내서 대조해 보았는데, 강의록을 재구성한 그 책에서도 고골 부분만큼은 <니꼴라이 고골>의 내용 중에서 발췌했다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대목은 이렇다.
>>> 외투를 입지 않은 아까끼 아까까예비치의 유령으로 간주된 인물은 사실상 아까끼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아까끼 아까까예비치의 유령은 외투를 입지 않고 스스로의 힘에 의존한 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상야릇한 역설적인 상황에 푹 빠진 경찰관은 이 유령을 아까끼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이 아니라, 유력인사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김문황 번역, 208-9쪽) <<<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외투"의 줄거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가난한 하급 관리가 전재산을 털어 새 외투를 한 벌 장만하지만, 처음 입고 나간 바로 그날 밤에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빼앗기고 만다. 딱한 하급 관리는 외투를 찾게 도와달라며 고급 관리를 찾아가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냉대를 받자 절망 끝에 사망하고, 이후 유령으로 나타나서 고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한다.
그런데 나보코프는 여차 하면 기발한 환상 소설로 끝날 수도 있었을 법한 이 단편의 막바지에 달라붙은 여담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즉 고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하고 만족한 유령이 사라진 이후에도 관련 목격담은 끊이지 않았으며, 한 번은 심약한 경찰관 한 명이 우연히 목격하고 그 뒤를 쫓다가 오히려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유령으로부터 위협을 받아 도망쳤다는 거다.
나보코프는 마지막에 목격된 유령, 즉 경찰관을 위협하고 떠난 존재가 사실 하급 관리의 유령이 아니라 앞서 하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한 강도였다고 지적한다. 고골이 늘어놓은 갖가지 여담 때문에 독자가 간과하기 쉬운 이 뜻밖의 사실을 알고 나면, "외투"는 단순히 풍자와 환상을 버무린 작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생의 잔인함과 부조리함에 대한 씁쓸한 고발이 된다.
나귀님도 "외투"를 여러 번 읽었지만 맨 마지막 유령의 정체에 대해서는 줄곧 간과했던 참이어서, 나보코프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문황의 번역은 원문에도 없었던 첨언 때문에 문장이 난삽해져서 처음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참고로 위에 인용한 대목을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 외투를 잃어버린 아카키 아카카예비치의 유령으로 비춰진 사람은 사실 그 외투를 훔친 사람이다. 아카키 아카카예비치의 유령은 외투의 부재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순경이 이야기의 기묘한 역설 속에 빠져들어 정반대의 인물인 외투 도둑을 유령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혜승 옮김, 127쪽) <<<
이전에도 지적했듯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역시 오역이 적지 않지만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위의 인용문에서 가운데 문장만큼은 그럭저럭 옮겼다. 즉 하급 관리의 유령이 구천을 배회한 이유는 오로지 상실한 외투를 되찾겠다는 강한 집착이었기에, 고급 관리의 외투를 빼앗아 그 결여가 충족되자 만족하면서 성불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문황 번역본만 보면 이게 그런 뜻이라고는 해석하기 힘들다. 문제는 제5장 내내 이런 식으로 헛다리를 짚은 문장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특히 원문에도 없었던 첨언을 해서 오류를 자초한 경우가 많은데, "외투"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별개의 인물인 화자(나)를 주인공(아까끼 아까끼예비치)으로 오인해 "나(아까끼 아까끼예비치)"(200쪽)라고 써 놓은 것이 그렇다.
러시아어 전공자가 영어책을 번역했으니 어쩔 수 없는가 싶다가도, 정작 미국 대학에서 고골 전공으로 석/박사를 받았다는 역자 약력을 보면 의아할 수밖에 없다. 해설에서 나보코프가 한때 몸담았던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의 이름조차도 줄곧 "웨슬리"로 여러 번 적어 놓았을 정도이니, 무려 25년의 노력 끝에 내놓았다고 자부하는 번역서 치고는 너무 부실하다.
심지어 나귀님이 받은 책은 한 페이지(225-226쪽)의 윗부분이 접혀서 잘못 재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찢어져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알라딘에서는 상급이라고 판정해서 정가 28,000원의 60%인 16,400원으로 판매가를 책정했다. 이쯤 되면 알라딘 본사 차원에서 나귀님을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하자 있는 책들만 갖다 놓고 구입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나보코프 번역서는 왜 이렇게 오류가 많을까?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자들의 무능이다. 저자가 현학 취미에다가 워낙 의뭉스러운 성격이다 보니 독자 오도하기를 밥 먹듯 하는데, 그 지뢰밭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다 보니 지난 수십 년간 오역본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이번 잠실롯데타워점 구매 도서가 영 실망스러웠던 궁극적인 이유도 결국 그것이었고 말이다.
[*]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뒤져 본 "외투"의 비교적 최근 번역본인 민음사와 창비 책에도 오역이 심심찮게 눈에 띄니, 결국 대한민국에서 "외투"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도 같다. 어쩐지 이것 역시 나보코프의 말마따나 "고골스러운" 부조리의 한 가지 사례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