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알라딘에서 책을 많이 안 사다 보니 쿠폰이나 적립금을 받아 놓고서도 시한을 넘겨 날리는 일이 잦다. 어제인가도 무슨 적립금 1천 원이 또 날아갔다기에 다시 이벤트 페이지까지 찾아가서 클릭클릭해서 또다시 쟁여놓았다. 십중팔구 또 날릴 것 같기는 하지만, 또 혹시나 하는 마음이라서...
그나저나 해당 이벤트 페이지를 보니 알라딘에서 9월 사은품으로 책모양 칸막이 정리함이라는 물건을 주는 모양이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또 다른 플라스틱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책 표지를 디자인에 응용했다니까 또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살펴보는데, 세부 정보 페이지에서 이상한 대목을 발견했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독일어판 표지를 응용한 케이스 전면에는 초록색으로 인쇄된 꽃화분 문양이 들어 있는데, 세부 정보 페이지에 그 확대 사진이 나와 있고 "제작 공정상 플라스틱 사출 부분의 홈에는 인쇄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는 불량이 아닙니다"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면 초록색 꽃화분 문양에서 잎사귀와 줄기 일부분이 인쇄되지 않고 동그랗게 파인 부분이 있다. 설명대로 사출구와 맞닿았던 부분의 플라스틱이 분리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움푹 꺼지게 되었고, 결국 초록색 꽃화분 문양을 인쇄할 때 그 부분만큼은 잉크가 묻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핏 보면 알라딘 측의 설명대로 제작 공정상의 부득이한 결함처럼 보이기도 하고, 원산지가 중국이라는 것까지 알고 나면 더욱 부득이한 결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문양이 인쇄되다 보니, 문제의 사출 구멍 자국이 멀리서 봐도 상당히 눈에 잘 띈다는 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프랑켄슈타인> 표지를 응용한 다른 두 가지 케이스의 경우에는 해당 부분에 마침 여백인지 흰색인지가 들어 있어서 별 티가 나지 않는데, <수레바퀴 아래서>만큼은 유난히 티가 난다. 그렇다면 제작 공정상의 결함만이 아니라, 오히려 디자인 단계의 잘못도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인가 하면, 사출 구멍 때문에 케이스 표면에 완벽한 인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알았다면, 차라리 여백이 적은 <수레바퀴> 대신 여백이 많은 <앨리스>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표지로 교체하든지, 아니면 문양을 수정해서라도 사출 구멍 부분에 여백을 두어야 했지 않느냐는 거다.
반대로 알라딘에서 샘플을 확인하고 디자인할 때에는 없었던 사출 구멍이 제작 단계에서 갑자기 추가된 셈이라면, 이건 누가 봐도 제작업체의 잘못이고 불량이므로 전량 반품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여하간 알라딘의 책임이건 제작업체의 책임이건 간에 불량품은 분명하다.
하자가 있는 물건이라면 사은품이건 상품이건 간에 아예 내놓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현재 알라딘은 '하자가 있다'는 공지만 올리고 사은품 배포를 강행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알라딘은 불량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솔직히 누가 봐도 불량이고 하자이니 말이다.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전에도 오랫동안 중고 서적 하자 문제로 고객센터의 문을 두들겼을 때의 전형적인 답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매입 과정에서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아 하자 있는 책을 보내고서도, 이에 대해 항의하면 맨 먼저 내놓는 말은 '중고 물품의 상태는 보기 나름'이라는 것이었다.
즉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요, 바로 네 마음이니라'라는 뜻이니, 하자가 있다는 것은 네 의견일 뿐이고 우리는 멀쩡한 물건 보냈으니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셈이었다. 이게 사실 무적의 논리이기 때문에, 이걸 논파하려면 물건의 구체적인 하자 사진이며 이유를 구구절절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고객센터의 말마따나 애초에 중고 물품의 상태 판정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면, 나귀님의 판정이나 알라딘의 판정이나 절대적이지는 않으니 애초부터 기준이 없어진다. 뒤늦게야 알라딘에서 품질 판정 기준을 만든 이유도 그래서이겠지만, 역시나 투표로 결정했으니 주관적인 기준일 뿐이다.
여하간 그간 고객센터와 지겹게 싸워 왔던 나귀님의 이력을 돌이켜 보면, 멀리서 봐도 딱 티가 날 만큼 중대한 하자가 있는 책모양 칸막이 정리함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제작 공정상의 불가피한 결과일 뿐 "불량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넘어가는 알라딘의 사고방식이 대범하다 못해 무섭게 느껴진다.
물론 연휴는 물론이고 평일에도 응급실을 못 찾아서 위급한 환자가 죽어 나가고, 부동산 가격이 널을 뛰고, 그 여편네가 명품백을 챙기는 상황에서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을 우두머리로 둔 나라이다 보니, 뭐, 알라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게 있겠느냐고 반문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