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카우트는 그 명칭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군대에서 유래했다. 영어 “스카우트”(scout)가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상황을 파악하는 “정찰병”이나 “척후병”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창시자 로버트 베이든파월도 그 교본인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에서 자신이 군 복무 중에 거느렸던 “소년 하사관대”가 보이스카우트의 기원임을 밝히고 있다.
영국 태생의 베이든파월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식민지 인도와 남아프리카에서 근무했는데,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대령 계급으로 남아프리카의 소도시 마페킹(현재 명칭은 “마피켕”이다)에서 217일 동안 포위 공격을 견디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사실 이 방어전이 큰 승리나 결정적 전환점까지는 아니었지만, 사기 진작 차원에서 후하게 포상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마페킹 방어전 당시 영국군은 현저한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12세부터 15세까지의 소년들을 모아 “소년 하사관대”를 창설했고, 주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전령과 보초 등의 비교적 가벼운 임무를 담당하게 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베이든파월은 이때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소년 정찰병”, 즉 “보이스카우트”라고 이름붙인 청소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베이든파월이 애초부터 염두에 두었던 “보이스카우트”의 모범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킴>에 나오는 동명의 주인공 소년이었다. 심지어 보이스카우트 교본에서도 “킴”의 사례는 마페킹의 “소년 하사관대”보다도 먼저 언급될 정도인데, 이것이야말로 베이든파월이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스카우트”(정찰병)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키플링의 작품에서 킴은 인도에 사는 아일랜드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인도인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현지 언어는 물론이고 풍습에도 정통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그는 티베트에서 온 승려를 따라 일종의 안내인으로 인도 각지를 여행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의뢰를 받아 다양한 첩보 수집 및 전달 활동에 관여하게 된다.
줄거리만 보면 제법 흥미로운 모험 소설 같지만 (실제로도 상당히 재미있다!) 비슷한 식민지 체험을 지닌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대입해 놓고 보면 살짝 거시기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말하자면 조선 거주 일본인의 아들이 조선어와 조선 문화에 정통하다는 특기를 살려 총독부의 밀정 노릇을 하며 중국에서 온 스님을 따라 조선 팔도를 돌아다닌다는 내용의 소설인 거니까.
소설에서 킴은 두뇌 회전이 빠르고, 관찰력과 말솜씨가 뛰어나며, 임기응변 능력도 탁월하고,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영악한 꼬마로 묘사되는데, 베이든파월은 그를 “보이스카우트 대원의 훌륭한 본보기”라면서 추켜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이와 유사한 능력을 체득해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을 마치 보이스카우트의 이상적인 목표인 것처럼 내세운다.[*]
이쯤 되면 보이스카우트 운동 자체가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제국주의적 야욕과 식민주의적 탐욕과 애국주의적 맹목의 총합이라도 되는 것 같지만, 여기에다가 오늘날 보이스카우트의 특징이 된 야영과 생존 기술이라는 요소를 집어넣은 의외의 인물이 있었으니, 원래는 화가였지만 나중에는 <동물기>의 저자로 더 유명해진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었다.
시튼이라면 오늘날에는 커럼포의 늑대 로보 이야기를 비롯해 갖가지 실화에 근거한 동물 이야기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인디언 고유 문화에도 상당히 큰 관심을 보인 인물이다. 시튼은 보이스카우트보다 한 발 앞서 우드크래프트 인디언스라는 청소년 야영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이 단체를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과 합병하고 교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시튼은 불 피우기, 움막 짓기, 발자국 뒤쫓기, 식량 구하기 같은 인디언의 고유한 야영 기술 습득을 권장했는데,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생존(서바이벌) 기법”에 해당하는 이 내용을 정리한 논픽션이 <시튼의 숲>이란 번역서이고, 소설 각색으로는 <작은 인디언의 숲>이 있다. 베이든파월은 보이스카우트의 정식 출범 직전에 시튼을 만나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보이스카우트 교본의 첫머리에서 베이든파월은 “전쟁 스카우트 이외에도 평화 스카우트가 있으며, 이들은 평화 시 군대의 척후병 못지않게 민첩하고 기지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해나간다. 이들이 곧 세계의 개척자들이다”라고 정의한 다음, 각종 사냥꾼과 탐험가와 선교사(?)처럼 모험심과 아울러 오지에서의 생존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평화 스카우트”로 열거한다.
보이스카우트 교본에서는 스카우트의 기본 소양으로 야외 생활, 생존 기술, 기사도, 인명 구조, 인내심, 애국심, 절제력 등을 열거하며, 생존 기술 중에는 길 찾기, 헤엄치기, 보트 사용법, 신호법, 매듭법, 움막 짓기, 나무 베기, 거리와 높이 측정, 야영법, 관찰법, 추적과 잠행법, 동식물학, 운동과 청결 유지법, 사고 대비 및 응급 처치법 등을 개략적으로나마 설명한다.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일부 고리타분한 내용도 있는데, 특히 “자기 개선”에 관한 장에서 “절제 생활” 항목의 경우가 그렇다. 베이든파월은 “많은 소년을 사로잡는 이 은밀한 악습에 대한 한 마디의 충고”를 한다면서, 상스러운 “이야기나 하고, 쓸모 없는 책이나 읽고, 외설 그림이나 보는 것은 지각없는 소년을 자위행위로 유혹하며 이끌어 가기 쉽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이와 같은 것은 건강과 정신을 다 같이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런 욕구는 영양 과다나 더운 잠자리에서 비롯되므로 냉수욕이나 체조가 도움이 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자위행위보다 더 큰 문제는 보이스카우트 내부에 만연한 성폭력이 아니었을까.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에만 해도 2020년까지 9만 건 이상의 관련 신고가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한때 전세계적 인기를 끌었던 보이스카우트 운동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 부분 폄하를 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근저에 남아 있는 군대 요소는 물론이고, 예절과 선행을 앞세우다 보니 종종 순진한 녀석의 대명사가 되어서, 급기야 슈퍼히어로물에서는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자경단을 향해서도 알량한 선악 개념을 강요하는 “보이스카우트”로 폄하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보이스카우트 활동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람도 없지는 않다. 얼마 전 타계한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겸 개미 전문가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이 대표적이다. 자서전 <자연주의자>에서 윌슨은 부모의 이혼과 잦은 이사와 부분 실명 등의 악재가 겹치며 변변한 친구도 없이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다가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통해 비로소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미국의 보이스카우트란 조직은 바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윌슨은 보이스카우트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야영과 등산과 동식물학처럼 이때까지 학교나 교회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새롭고도 다양한 자연 지식을 터득했고, 그것이야말로 자기에게는 명문 과학고에 다닌 것에 버금가는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훗날까지도 여전히 애정을 드러내며 회고했다.[**]
오래 전에 아름다운가게에서 500원 주고 구입한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베이든 포우엘 지음, 김규영 옮김,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77 초판; 1983 2쇄)을 이제 와서 다시 꺼내 보게 된 계기는 당연히 최근 논란이 된 새만금 세계 잼버리 대회 때문이다. 개막 전부터 준비 부실로 뉴스에서 여러 번 언급되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역대급 실패 사례로 끝나는 모양새다.
그 책임 소재를 놓고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전 정권과 현 정권, 몇몇 인사가 언급되고 있는데, 보이스카우트의 구호가 저 유명한 “차리고 있다”(Always Prepared), 즉 언제라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임을 감안하면 더욱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에나 한국 보이스카우트 연맹에나 이런 기본 중의 기본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걸까?
“‘차리고 있다’라는 여러분의 표어를 기억하라.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에 접하여 할 바를 사전에 알아 둠으로써 사고에 대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베이든파월은 구호의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또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여기서는 어떤 사고가 일어날까?’ 그리고 ‘그런 사고가 났을 때 나의 임무는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어서 그는 한 여성이 물에 빠졌는데도 주위 사람이 수수방관하는 바람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던 일화를 거론하며 같이 덧붙인다. “그곳에 스카우트가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졌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태원 압사 사고에 뒤이어 또 다른 전세계적 “K-개망신”의 사례로 등극한 이번 새만금 잼버리 행사에 대해서도 아마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 가만 보면 키플링은 이처럼 영악한 소년을 애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당장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도 이에 못지않게 영악한 꼬마이고, <용감한 선장들>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등장인물은 원래 미국의 철도 재벌의 외아들이라서 워낙 싸가지가 없는 녀석인데, 사고로 여객선에서 떨어져 죽을 뻔하다가 대구잡이 어선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된다. 하지만 구조된 후에도 그 성질머리를 버리지 못하고 "내가 누군지 알아?"를 시전하다가 어선 선장에게 두들겨 맞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조업이 끝날 때까지 어선의 막내 선원으로 일하며 몸도 생각도 크게 변화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싸가지가 없다 뿐이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어서, 선원으로 일하면서부터는 눈치 빠르게 적응해서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해내는 것으로 나온다.
[**] 물론 그 당시 보이스카우트에 만연했던 성과 인종차별에 대한 보수적이고 양면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윌슨도 일침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