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샤이러의 <제3제국의 흥망>이 새로 나온 모양이다. 원서가 1960년에 나왔으니 무려 환갑이 넘은 셈인데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노인 학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이 용어는 최근 아이패드2를 초기화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놈의 물건이 iOS 9.3.5 업데이트 이후로는 계속 버벅대서 주로 고전 에로책 읽기용으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저장 공간 부족 메시지가 나와 구글링해 보니 초기화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초기화를 해보니 의외로 쌩쌩 잘 돌아가기에 결국 노후 기기 수명 연장, 일명 "노인 학대"에 성공하긴 했는데, 문제는 백업을 안 해놓는 바람에 에로책이 모두 날아갔다는...)


이미 에디터 구판본 전4권도 갖고 있는데, 이건 일본어 중역에 오타도 많아서 읽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페이퍼백 원서도 하나 갖고 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 같은 저자의 <베를린 일기> 원서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역시나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최초의 번역서인 안동림 번역본도 예전에 어디선가 기념 삼아 구입해 놓았던 기억이 나서 책장을 뒤적뒤적 해 보았더니... 세상에! 아직 남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참 별놈의 책을 다 안 버리고 갖고 있었구나 싶어서 나 스스로가 살짝 징그러워졌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런 징그러움 덕분에 또 하나 끄적끄적 적어볼 수 있게 된 셈이기는 하지만.


안동림 번역본은 원서가 간행된 이듬해인 1961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는데, 다섯 권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 아니라 3개월마다 순차적으로 간행되었다. 즉 1권은 1961년 6월, 2권은 1961년 9월, 3권은 1961년 12월, 4권은 1962년 3월, 5권은 1962년 6월에 간행되었으니 완간에 딱 1년 걸린 셈이다. 내가 가진 책은 다섯 권을 박스 하나에 한꺼번에 담아 놓은 세트인데, 결국 완간된 1962년 6월 이후에나 제작된 물건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1-2권의 표지 디자인이 3-5권과는 다르다는 점인데, 아마 간행 도중에 변경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울러 1권은 1962년 6월의 재판본, 4권은 1962년 11월의 재판본이다.


안동림 번역본은 분권 형식과 디자인부터 십중팔구 1961년에 간행된 일본어 번역본의 중역으로 추정되는데, 구글링해 보니 일본에서도 반세기가 다 되었던 2008년에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되었으니, 이래저래 "노인 학대"는 어느 나라에서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검색해 보면 안동림 번역본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출판사를 옮겨 간행된 적이 있었다고도 나오는데, 이건 나도 실물을 구경한 적은 없다. 에디터 번역본은 단어 선택과 문장 구조가 대동소이하고 심지어 오역한 부분조차 똑같다는 점에서 정황상 안동림 번역본을 베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드는데, 물론 확증까지는 없고 그저 심증일 뿐이다.


윌리엄 샤이러는 히틀러가 한창 대두하던 시절에 베를린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의 소유자로 (그 시절의 이야기가 바로 <베를린 일기>라고 알고 있다), 전후에 미군이 노획한 대량의 독일어 문서를 토대로 <제3제국의 흥망>을 저술했다고 알고 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학술적인 차원에서 (아울러 비판자의 여러 가지 입장을 반영하여) 여러 가지 내용상의 단점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 저술 자체가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이미 저자 스스로도 서문에서 시인한 바 있으니 크게 비난할 거리가 되지는 못하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 "노인 학대" 급의 지속적인 인기야말로 "현대의 고전"의 다른 표현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나저나 새로 나온 번역본은 무려 7만 원짜리이다 보니 선뜻 손이 나가지도 않을 뿐더러, 과연 제대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앞설 수밖에 없다. 이런 의구심은 알라딘 미리보기로 대조한 몇 군데 번역문에서 살짝 미심쩍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공짜 알바해 줄 생각은 없으니 가장 확실한 실수 두 가지만 일단 지적질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첫째는 "역사서로 손꼽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9쪽)라는 대목인데, 원서와 대조해 보니 "위대한 역사서로 손꼽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라고 되어야 정확하다. 교정 중에 단어가 하나 달아난 모양인데, 안동림/에디터 중역본 모두에서는 정확히 옮긴 대목이기도 하다.


둘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소도시 브라우나우 암 인의 수수한 집에서 태어났다"(22쪽)고 옮긴 대목인데, 안동림 중역본에는 "수수한 집에서"를 "수수한 여관 가스토프 줌 포메르에서"라고 (에디터는 "수수한 여인숙에서"라고) 옮겼기에, 원서를 대조해 보니 후자가 정확한 번역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간행된 존 톨랜드의 히틀러 전기에서도 세관원이었던 아돌프의 아버지가 당시 부임지의 "포메르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었으니, 이것 역시 사소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누락/오역이라고 지적할 만한 부분이다. 이밖에도 몇 가지 문맥을 착각한 듯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귀찮아서 더 이상은 파고들지 않기로 하고 말았다.


물론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대목에서 해당 역사서를 소설책이라 오독할 독자가 생길 리는 없을 것이며, 히틀러가 "여관"이 아닌 "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대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는 잘못된 인상을 받을 독자가 생길 리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안동림/에디터 중역본이 "거리명"으로 오역한 "브라우나우암인"을 "도시명"으로 정확히 옮긴 것은 확실히 더 나아진 점이다. 하지만 7만 원이라는 가격을 감안해 보면, 아울러 "정식으로 완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정확하고 깔끔한 번역"이라는 출판사의 자평을 감안해 보면, 뭔가 어울리지 않는 잔실수같아 해 보는 말이다.



[*] 그나저나 이번 책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나온 나치 관련서에서 표지에 하켄크로이츠를 턱하니 박아 놓은 것을 보면, 새삼스레 일본 욱일기에 대한 그간이 여론몰이/선동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쪽과 서쪽에서 저마다 악명을 떨쳤던 전범국의 상징인데, 우리가 기분 나쁘니까 너네도 욱일기는 쓰지 말라고 지랄발광을 하면서도, 정작 저쪽에서 기분 나빠할 만한 하켄크로이츠는 스스럼없이 써먹기도 하고, 심지어 골빈 연예인들 중에는 나치 경례며 군복까지 입는 경우가 없지 않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독일 내에서는 오랜 세월 간행조차도 금지되었던 <나의 투쟁>을 "고전"이라는 미명으로 오래 전부터 간행해 온 나라가 바로 이 잘난 대한민국이다. 위안부며 징용이며 각종 전쟁 범죄는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음모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갖가지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도 없는 것이 이놈의 나라이다. 따지고 보면 욱일기에 대한 양놈들의 인식은 하켄크로이츠에 대한 조선놈들의 인식과 대동소이하다고 봐야 무방할 것이다. 즉 어떤 나라나 정권이나 시대를 상징하는 것뿐이지, 그걸 쓴다고 해서 그 나라나 정권이나 시대를 지지하고 옹호한다는 뜻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심지어는 욱일기도 아니고 그냥 태양광선 묘사에 불과한 경우인데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흔하다). 자기네는 남의 역사에 아무 관심도 없고 심지어 왜곡이나 폄하까지도 서슴없이 행하면서도, 전혀 상관도 없는 동네까지 찾아가서 결의안이니 소녀상이니로 수요 없는 K-역사를 공급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K-모순이자 K-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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