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장동 관련 대화 녹음 가운데 내용이 조작된 것이 있다고 해서 최초 보도 매체인 뉴스타파는 물론이고 관련 내용을 뒤따라 보도했던 여러 언론사에서도 사과 공지를 내는 일이 있었다. 대장동 사건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울러 도대체 어째서 수사하는 쪽이나 수사받는 쪽이나 간에 결정적인 증거라곤 내놓지 못하고 시간만 질질 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에서 딱 하나 관심이 갔던 대목은 무려 1억 6천 5백만 원짜리 책에 대한 언급이었다. 녹취록 조작 당사자인 전직 언론인이 대장동 관련자로부터 이런 거액을 받은 증거가 나왔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저서를 판매하고 받은 대금일 뿐, 다른 의도에서 대가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판매 가격이 그렇게 높은지 궁금했는데, 구글링해 보니 마치 정부 자료집처럼 밋밋하게 생긴 3권 1질의 책이 검색된다. 그런데 일반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으며, 무려 한국의 주요 재벌가 혼맥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기에 더욱 흥미가 생겼다. 출간 당시 인터뷰를 보니 저자는 이른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권력의 혼맥을 조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방대한 책을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주제 자체만 보면 충분히 흥미를 끌 만도 하고, 따라서 수요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의 고액을 내면서까지 선뜻 가져갈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만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와 유사한 기사며 저서는 예전에도 몇 가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90년대 초에 서울경제신문에서 게재한 특집 기사 "재벌과 가벌"인데, 그 내용을 나중에 묶어서 지식산업사에서 간행한 단행본을 나도 한 부 갖고 있다. 그 책의 서문을 보면 이런 주제의 연재물로는 최초이다 보니 일반 독자로부터는 물론이고 해당 재벌 기업의 종사자들로부터도 제법 반응이 좋았다는 회고가 수록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를 들어 삼성의 경우에는 창업자인 1대 이병철, 2대 이맹희와 이건희를 비롯한 아들, 딸, 며느리, 사위, 3대 이재현과 이재용과 정용진을 비롯한 (외)손자, (외)손녀, (외)손자며느리, (외)손녀사위를 망라한 가계도와 설명을 소개하는 식이었다.
한국 재벌 대부분이 사변 전후에 시작되었음을 고려해 보면, 연재 당시인 1990년대에는 보통 3대까지를 언급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2대까지도 대부분 사망하고 3대가 본격적으로 기업 경영을 도맡는 상황이다. 검색해 보니 그 증보판에 해당하는 기사도 다른 여러 언론사에서 몇 가지 간행되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서 "재벌과 가벌"처럼 본격적인 연재 기사나 단행본 출간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짐작컨대 3대 이후 4대와 5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직계뿐만 아니라 방계까지 포함해서 그 후손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을 터이니, 앞서 언급한 1억 6천 5백만 원짜리 책처럼 무려 3권 1질의 방대한 분량이 된 것도 굳이 이해해 보자면 나름대로는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전청조 사건에서 당사자가 재벌 3세 혼외자를 자처했다니, 어쩌면 자칭 피해자 겸 타칭 공조자인 남현희야말로 이 1억 6천 5백만 원짜리 책이 필요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물론 문제의 카지노 기업의 혼외자 정보까지 그 책에 정확히 나와 있었는지 여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 후덜덜한 가격을 생각해 보면 혼외자는 물론이고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재벌 9세와 10세에 대한 정보까지는 나와 있어야 제값을 할 것 같기도 하니까). 사실은 재벌 3세 사칭 자체가 워낙 허술했는데도 (나만 해도 여성지의 최초 보도/화보를 보자마자 그 외모와 주장 모두에서 위화감을 느꼈으니까) 의외로 거기 넘어간 사람이 많았다니 놀랄 일이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본인이 재벌 3세의 혼외자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점인데, 제아무리 재벌 가문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혼외자"라는 사실 자체는 딱히 부러움이나 신뢰를 얻을 지위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대외 활동이 드문 카지노 기업의 일원으로 자처해서 자신의 존재를 생소하게 여긴 사람들을 설득했던 모양인데, 그 기업 특유의 비밀주의를 고려해 보면 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정실 소생인 후손들도 외부 활동을 삼가는 판에 혼외자가 설치고 다닌다? 당장 삼성 이건희의 손자손녀만 해도 우연히 눈에 띈 것을 제외하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고려하면, 혼외자의 존재는 그야말로 대외비가 아닐까. 여하간 생각해 보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최근에는 재벌 3세와 4세의 각종 스캔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니, 혼외자가 그렇게 설치고 다닌다면 재벌 기업에서는 물론이고 언론에서도 자연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수법에 사람들이 손쉽게 넘어갔던 것으로 볼 때, 결국 남현희를 비롯해 전청조에게 놀아난 사람들 역시 무고한 피해자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단돈 만 원짜리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도 남들의 리뷰를 읽어보고 양이 많네 적네, 서비스가 좋네 나쁘네를 따지는 세상에서, 수천수억짜리 거래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결정했다면 거기 따르는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봐야 할 테니까. 아니면 재벌집 나오는 막장 드라마를 워낙 많이 봐서 그랬던 걸까.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편으로는 피카레스크 소설 애호가의 입장에서 "전청조로 살아남기" 각본을 직접 써보고 싶기도 하다. 과연 어떻게 하면 사기꾼 행각이 들통나지 않고 한몫을 챙겨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악역 영애물처럼 어쩌다가 환생해 보니 내가 전청조이고 마침 문제의 여성지 인터뷰가 당장 코앞인데, 어떻게 하면 그 상황을 모면하고 파멸 결말을 피할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이때까지 사기로 끌어당긴 돈을 합법적 투자금으로 전환하고 남현희의 인맥에 박세리의 부와 정유인의 힘과 한유미의 몸개그(?)까지 얻어서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의 에이전트가 되는 정도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현실은 이런 상상만큼 멋지게 전개되지는 않는 것 같지만...
[*] 참고로 대장동 녹음 조작 사건 직후에 열린 경매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다고 평가된 <진달래꽃> 초판본의 낙찰가가 딱 1억 6천 5백만 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