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과 홉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연히 책은 아직 오지 않았다) 거기서 주인공의 주요 공격 대상은 또래 여자친구인 수지(Susie)와 베이비시터인 로잘린(Rosalyn)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나마 베이비시터는 월등한 신체 조건으로 꼬맹이 캘빈을 종종 제압하지만, 동갑내기 수지는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캘빈이 수지에게 거는 장난은 대부분 이유 없이 자행하는 것이니 만큼, 요즘 분위기에서는 이 만화 속 꼬맹이조차도 개저씨에 한남충 소리를 듣고도 남을 것 같지만, 사내아이들이 종종 관심을 표현한답시고 계집아이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거는 것이야 예전부터 왕왕 있었던 일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짜증나고 황당하겠지만.


언젠가 김필원 프로에서 (이 양반 요즘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한 청취자가 보낸 사연 중에, 어린 시절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서 노심초사하다가 나름대로는 관심을 끌어 보겠답시고 버스에서 졸고 있는 여자아이 눈 밑에다가 물파스를 발랐다가 이후로는 완전히 미친 놈 취급을 받고 외면당했다는 게 있었다.


당시 방송 중에는 진행자며 청취자 모두 웃음이 터졌다는 반응이었고, 나 역시 듣다 말고 웃음을 터트리기는 했지만 막상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을 터이니 딱히 웃음이 나올 리는 없었을 것도 같다. 심지어 진짜 성범죄의 경우조차도 "장난"으로 둘러대어 유야무야되는 불합리한 경우도 십중팔구 있었을 터이니까.


다만 예전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 보면, 세상을 살다 보면 (앞서 캘빈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에피소드처럼) 뭔가 내 뜻대로는 풀리지 않는 일이 있게 마련이고, 이른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의 상황이라든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의 상황이 있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만사를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고, 지혜는 뒤늦게야 찾아오니 훗날에 가서야 예전 일을 돌아보며 아쉬움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흔히 말하는 인생 n회차가 되면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상상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맥락일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늘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수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작년엔가 구입해서 뒤적이다가 안방 머리맡에 놓아둔 책더미 밑에 깔려 있던 <인사이드 세른: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풍경>이라는 책의 기묘한 표지에 나온 또 다른 "수지"가 생각난다. 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자 존 엘리스의 사무실 모습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종이로 만든 해골이 책장에 걸려 있는 것이다.


해골의 가슴팍에는 I spoke bad about SUSY 라는 종이 명패가 걸려 있는데, 번역하자면 "나는 수지(SUSY)를 안 좋게 말했습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SUSY란 Supersymmetry, 즉 "초대칭"의 약자인데, 해당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했다는 물리학자 박인규는 권말에 붙인 해제에서 이 해골과 명패의 내용에 담긴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 앨리스의 연구실에는 해골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해골은 목에 종이 하나를 걸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I spoke bad about SUSY’라 적혀 있죠. ‘SUSY’는 초대칭이론(supersymmetry)을 말합니다. ‘존 엘리스가 초대칭이론에 악담을 했다’는 것인데, 결과는 두고 봐야 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엘에이치시(LHC)에서 초대칭입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열화당의 인스타그램 홍보 게시물 중에서. https://www.instagram.com/p/BjVsvn8AcVe/?hl=fr)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박인규의 설명과는 정반대가 되어야만 정확할 것만 같다. 존 엘리스야말로 SUSY의 지지자인데 왜 그가 SUSY에 대해서 악담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 해골은 "SUSY를 악담하는 자의 최후는 이러할 것"이라는 뜻으로 존 엘리스가 걸어 놓은 일종의 경고 표시라고, 아울러 명패의 내용은 곧 죄목이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심슨 가족>의 오프닝에서 매번 바트가 학교 칠판에 "앞으로는 00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자기 죄목을 반성문 삼아 쓰는 처벌을 받는 것과도 유사한 상황인 셈인데, 막상 존 엘리스와 그의 물리학적 입장에 대해서 분명히 잘 알고 있었을 법한 한국인 물리학자가 해골과 명패에 대해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은 뭔가 좀 신기하다.


문제의 초대칭 이론은 아직까지 가설이라서 CERN에서 실험을 통해 입증 노력을 하고 있다는 모양인데, 일각에서는 여러 차례 실험에도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회의적인 반응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 이론의 옹호자인 엘리스가 자기 연구실에 가짜 해골까지 걸어 놓으면서까지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도 그런 맥락 때문일 수 있겠다.


엘리스의 "수지" 애호와는 달리 캘빈은 "수지"에게 항상 적의와 경멸만 드러내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둘이 앞에서는 서로를 욕하다가 뒤돌아서서는 미소짓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 에피소드도 있었던 듯하니, 그들의 다툼과 장난도 그들 (또는 "저자") 나름대로는 이른바 꽁냥꽁냥의 한 가지 형태라고 봐야 맞을 듯하다.(최소한 물파스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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