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맡에 쌓아 놓고 차일피일 먼지만 쌓여 가던 책더미에서 몇 개라도 읽고 치우자 싶어서, 사토 사토루의 코로보쿠루 시리즈 가운데 1권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와 2권 <콩알만한 작은 개>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서 완독했다. 지난번에 사무라 히로아키의 단편집에서 (물론 특유의 황당한 각색을 거치기는 했지만) 이 소인 전설을 접하고 새삼 흥미를 느껴 구입한 책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코다마 유키의 만화에도 비슷한 소인이 나온 단편이 있었고, <허니와 클로버>에서도 키가 작고 나이 어린 여주인공을 본 누군가가 "코로보쿠루다!" 하고 소리친 장면이 있었다. 토토로가 우산 대용으로 머리에 얹은 풀잎도 사실은 코로보쿠루의 상징인 "머위 잎"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 치면 숲의 수호신이라는 작품 속 설정과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위에 언급한 여러 작품에서도 코로보쿠루는 머위를 배경 삼아 나타난다고 묘사되는데,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언어로 그 이름 자체가 "머위 아래 사람"이란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지역의 머위가 사람 키보다 더 크기 때문에, 코로보쿠루도 반드시 소인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그 지역 원주민에 대한 기억이 설화로 변했다고 보는 모양이다.


사토 사토루의 소설은 1959년부터 1983년까지 총5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정신세계사에서 1-3권이 나오고, 나중에 논장에서 전권이 다시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소인을 다룬 작품이라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이 <마루 밑 바로우어즈>이지만, 코로보쿠루 시리즈도 일본 문화의 독특한 설정을 여럿 가미하여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1권인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현대로 접어들며 코로보쿠루도 점차 살 곳이 줄어들어 인적이 드문 작은 산을 중심으로 머물게 된다. 마침 도로 건설 계획이 추진되어 그 작은 터전마저 잃을 위기에서, 우연히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주인공이 공동의 노력 끝에 도로 건설을 저지하고 작은 산을 매입해서 생존을 보장해 준다.


유사한 내용을 다룬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는 결국 터전 지키기에 실패한 너구리떼가 인간으로 변신해 현대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기로 결정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버린다.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보다 한 세대 뒤에 나온 작품이니, 대기업의 개발 횡포 앞에서 개인의 환경 보호 노력도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새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콩알만한 작은 개>에서는 일본 민담의 또 다른 소재인 "대롱여우"가 "콩알개"로 재해석되어 나오는데 (이 요괴는 <음양사>나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작은 동물은 심지어 코로보쿠루 사이에서도 한때나마 "멸종" 되었다고 간주된다. 이쯤 되면 코로보쿠루나 콩알개 모두 존폐 위기에 처한 연약한 자연의 형상화라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사토 사토루의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환상과 현실이 공존할 수 있는 일종의 대안을 일찌감치 제안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인간과 이생명체의 공존과 갈등이라는 소재는 일본 만화에서 종종 접했는데,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코다마 유키의 인어 연작 단편인 <빛의 바다>이고, 최근에 본 작품으로는 <던전밥> 애니 때문에 다시 꺼내 본 쿠이 료코의 단편들이 있다.


<던전밥>도 마물에 대한 편견은 물론이고 인간, 엘프, 수인 등 여러 종족 간의 차별과 반목에 대해서도 종종 일침을 놓는 작품인데,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와 <용의 학교는 산 위에>라는 단편집은 용, 켄타우로스, 늑대인간, 인어 등을 소재로 삼아 그 주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공존의 방법을 묻는다는 점에서 사토 사토루와 유사한 주제 의식을 지니는 듯하다.


전설 속의 용이 실존하는 현대 일본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을 보면, 용을 직접 기르면서 생태를 연구하는 전공이 개설된 대학도 있지만, 막상 용 자체는 막대한 유지비에 비해 경제성이 없어 관련 산업도 전무하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반대로 켄타우로스는 탁월한 체력 때문에 유능한 자원이지만, 역량 면에서 자연히 뒤떨어지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대상이다.


이쯤 되면 쿠이 료코의 단편들은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각종 소수자가 처하는 상황에 대한 우의화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사토 사토루의 코로보쿠루 이야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겠다. 그 소인 전설의 유래인 아이누족이야말로 일본 역사 내내 차별과 탄압을 받은 소수 집단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한 점은 코로보쿠루의 입장에서야 아이누족이나 일본인이나 외부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토 사토루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작은 도사들"로 자처하던 소인족을 만나자마자 문헌 근거까지 들먹이며 '너희는 코로보쿠루다'라고 굳이 납득시킨 것도 뭔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샤모"(본토인) 특유의 저 유서 깊은 강압의 연장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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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넷플릭스를 들여다볼 때마다 쓸데없는 드라마 따위 볼 시간에 책이나 보라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이번에 <던전밥> 애니메이션이 방영된다기에 '그건 또 못 참지' 싶어서 바깥양반 태블릿을 빌려서 1회 시청하고, 일주일 기다렸다가 2회까지 시청했다.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림이 달라지거나 각색이 과도해져서 혹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 같은데, 이번 작품은 두 가지 모두에서 원작을 최대한 존중하는 듯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일주일에 한 회씩 즐겁게 시청할 만해 보인다.


주인공 일행은 던전 공략 중에 동료 한 명이 용에게 잡아먹히는 희생을 당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지상에 돌아온다. 희생된 동료를 되살리러 다시 던전에 들어가지만, 빈털터리 신세라 식량 대용으로 각종 마물을 잡아먹으며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줄거리다.


던전 공략이라는 게임/만화의 전형적인 소재에다가 요리라는 역시나 전형적인 소재를 접목시켜 의외의 장르를 창안했다며 격찬을 받은 작품인데,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마물 등 갖가지 생명체의 먹고 먹히는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아가 최종 흑막의 존재며 던전의 형성 과정을 통해서 생물체의 유한한 육신과 무한한 욕망의 불균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던전의 마물 형성과 관리를 통해서 생태 보호와 자급자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어서 이래저래 의미심장한 만화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만 해도 마물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를 혐오했던 엘프 마법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태도를 바꾸고, 급기야 삶과 죽음 모두를 긍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서, 애초의 목표였던 동료의 소생에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독려한다.


왜냐하면 일행이 동료를 살리려 각종 마물을 잡아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던 모든 행보야말로, 결국 생물의 기본 조건인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태도를 위한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설정을 현실에 적용해 보면 살짝 "불편"해 할 사람도 있겠다. 예를 들어 한국의 어느 무인도에 들어간 모험가 일행이 식량 조달을 위해 사슴과 멧돼지는 물론이고 개와 고양이, 뱀과 쥐, 심지어 바퀴벌레와 빈대까지 잡아 먹어치운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얼핏 보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법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괴식과 악식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부스럼 딱지처럼 혐오스러운 물질을 별미로 여겼다는 기록도 있고, 식품학자의 저서 <맛없어!>에도 이에 버금가는 각국의 실존 음식이 소개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한 안데스 산맥 조난자들의 식인 행위처럼 생존을 위한 처절한 악식도 있고,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 고든 리시가 꼭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싹싹 긁어 먹었다는 증언처럼 편집자라는 직업의 본질을 반영한 듯한 괴식도 있다.


괴식과 악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대목에서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는 개고기 식용 금지법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는데, 왜 갑자기 법안까지 통과되며 굳히기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개 식용이 좋건 싫건 오래 묵은 우리 식문화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굳이 금지한다는 것 자체는 불필요한 과잉 입법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사실 개고기 식용은 가만 내버려 두어도 어차피 사라질 식문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빌 브라이슨의 지적처럼 과거에 사슴, 멧돼지, 꿩, 비둘기 같은 다양한 육류가 소비되었던 것은 지금처럼 육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즉 극상의 별미라서 먹은 것이 아니었기에, 지금처럼 고기가 흔한 세상에서는 자연스레 외면당하는 것이다.


개고기도 마찬가지여서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소나 돼지나 닭에 비해서 딱히 큰 장점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기름이 적기 때문에 보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있지만, 냄새를 비롯한 조리 과정의 번거로움을 감안하면 아주 큰 장점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유독 개 식용을 겨냥한 반대에는 문화적인 편견의 기미도 없지 않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베트남계 등 아시아계 이민자가 늘어나자, 새로 온 동양인이 애완견을 훔쳐가 잡아 먹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급기야 개 식용 금지 입법 청원 운동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입법 청원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유언비어에 불과한 주장을 가지고 법까지 만든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이런 선례를 만들 경우에는 자칫 다른 육류의 식용 금지 주장으로까지 번질 가능성까지 있다고 우려했던 까닭이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식품 관련법이 개정되며 개와 고양이 식용을 딱 꼬집어 금지하는 법률이 생긴 모양인데, 이것도 미국 내 소비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동물 보호 단체의 주도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가의 개 식용 금지를 노린 포석이라 한다.


단적으로 자국의 소수 집단인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에는 개고기 식용도 고유 문화라며 법 적용의 예외로 두었으니 애초의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애초부터 외국 식문화에 대한 몰이해, 또는 차별적 의도가 있는 입법은 아니었는지 충분히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입법이야말로 애완 동물에 대한 과보호의 극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른바 동물 애호가는 "애완"이라는 단어조차도 질색팔색하며 "반려"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그들의 이런 호들갑 자체가 "애완"의 본래 뜻이다.


"완물상지"란 사자성어가 있다. 직역하면 "물건을 좋아하다 보면 뜻을 잃는다"인데, 그 출전인 <서경>에서 말하는 "물건"은 주나라 무왕이 외국에서 선사받은 개 한 마리였다. 왕이 개를 너무 물고 빨고 하니까 신하가 주의하라는 뜻에서 군주에게 간언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골동품, 현재에는 명품 같은 희귀품이 대표적인 "완물"이다. 즉 "애완" 자체가 이처럼 주위에서 걱정스레 생각할 만큼 뭔가를 애지중지한다는 뜻인데, 지금에 와서는 한자에 무지한 세대가 "애완"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희롱하는 뜻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대신 "반려"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데, 이게 보통 "배우자"를 가리켰음을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다. 세상에 무슨 "반려"를 상대방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 의지로만 곁에 둔단 말인가. 그것도 대개는 무려 "펫샵"에 가서 돈 몇 푼에 "구입"하는 주제에 말이다.[*]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 봐야 동물은 동물이지 사람이 아니다. 동물의 감정이며 언어라는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인간과의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십중팔구는 인간의 감정 이입에서 비롯된 착시가 대부분이다.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흐려진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물론 동물이라고 해서 잔혹하게 다룰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그런 행동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의 전조 증상이기 때문에 각별히 주목하고 단속해야 한다. 하지만 동물 보호 운동이며 단체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번 살처분 폭로처럼 자기네도 대책 없으면서 유독 "귀여운 털복숭이 동물"에게만 관대한 동물 보호 단체의 행동을 보면, 마치 <맹자>에 나온 어느 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딱하게 여겨 양으로 바꾼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일명 '법륜 스님 캣맘 참교육' 영상 내용처럼, 내가 좋아하는 뭔가에 남이 무관심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편협한 행동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이 천벌 받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천벌 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자연 보호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생물학자 제인 구달만 해도 '개는 똑똑하니 먹지 말아야 한다면, 돼지도 마찬가지니 먹지 말아야 한다. 개고기도 돼지고기처럼 식문화의 일종이니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유연한 태도를 보인 바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이나 쇠고기를 먹지 않는 힌두교도가 남들의 식문화를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거위 간 요리나 새끼 돼지 요리나 각종 고렙용 치즈나 기타 차마 입에 올리기도 싫은 나라마다의 고유한 괴식/악식에 대해서도 우리가 뭐라 하지 않듯이.


이 모든 식문화의 공통점은 바로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이다. 생물은 살기 위해서 다른 뭔가를 소비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동물이건 식물이건 다른 뭔가를 죽여서 섭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고 본능이기 때문에 거부하려 해도 감히 거부할 수 없다.


박완서가 아들을 잃고서 '나도 따라 죽으련다' 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어느 날 수녀원 식당에서 풍겨오는 된장국 냄새를 맡고 식욕이 용솟음쳐 걸신들린 듯 비빔밥 한 공기를 싹 비웠다는 일화를 떠올려 보면, 식욕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강한 본능이 아닐까 싶다.


식욕 못지않게 강한 본능인 성욕만 놓고 보면, 한때 "변태"라 손가락질을 받았던 갖가지 행위도 오늘날에 와서는 "취향"이라 긍정되고 보호받는 판에, 유독 식욕에 대해서는 혐오니 환경이니 정말 갖가지 이유를 들어 규제를 하려 드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삶은 죽음의 지연이고, 죽음은 삶의 종국이며, 그 사이에 먹는 행위며 크고 작은 집단의 식문화가 있다. 그러니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말라"는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타인의 "식사"에 대해서도 함부로 비웃지 말 일이다. 그 식사가 "마물"이건 "개"이건 간에...




[*] 오늘날 자칭 "반려" 동물보다 더한 진정한 "반려"이자 "애완"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스마트폰이 아닐까. 개나 고양이나 심지어 배우자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심지어 몸에 밀착한 상태로 보내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걸핏하면 갈아치우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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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이번 크리스마스는 산나 아누카의 그림책 두 권과 함께 보냈다. <호두까기 인형>은 꽤 오래 전에 구입했고 지금도 여전히 판매 중이지만, <눈의 여왕>은 절판이어서 한동안 헌책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며 제법 희귀본 행세를 하더니만 몇 달 전쯤에 운 좋게 중고 매장에서 구입한 것이다.


책을 구입하고 나서야 출판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 <눈의 여왕>은 2019년 7월에 문학수첩에서 간행되었다가 절판되었고, <호두까기 인형>은 2019년 12월에 아르테에서 간행되어서 여전히 판매 중이다. 그런데 후자의 권말에는 같은 삽화가의 <전나무>와 <눈의 여왕>의 표지가 한 쪽씩 들어 있다.


이를 토대로 짐작컨대, 애초에는 <눈의 여왕>의 판권도 문학수첩에서 아르테로 넘어가서 <호두까기 인형>과 <전나무>와 함께 3부작으로 출간되려던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도 간행되었다는 소식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 출간이 불발되고 만 것으로 추정된다.


산나 아누카는 핀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삽화가인데, 모국의 토속적인 장식 문양을 토대로 삼은 독특한 그림을 그려서 유명한 모양이다. 따라서 <눈의 여왕>과 <호두까기 인형> 모두 눈이 즐거운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막상 번역본에서는 바로 그런 디자인의 특성상 아쉬움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장식 머리글자로 시작되는 일부 페이지의 경우, 영어에서는 A, B, C처럼 알파벳 하나만 적어놔도 그만이지만, 우리말에서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꽃으로, 아버지는, 마리는"으로 시작되는 페이지가 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장식 머리글자는 "꽃, 아, 마"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번역본에서는 머리글자가 나올 부분에 자음 "ㄲ, ㅇ, ㅁ"만 나와 있고, 그 다음에 "꽃으로, 아버지는, 마리는"이란 어절이 또 등장해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왕 한글로 장식 머리글자를 만들었다면, 달랑 자음만 만들 것이 아니라 "꽃, 아, 마"라고 완전한 음절을 만들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알파벳 이외의 낯선 철자를 새로 디자인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시했을 수도 있지만, 설령 그 와중에 시간이나 비용이 추가되더라도, 제대로 된 한글 장식 머리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이 오히려 홍보 수단이 되었을 터이고, 그로 인한 가격 상승도 어느 정도까지는 충분히 용인되었을지 모른다.


과거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개봉 당시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글 제목을 직접 "그려" 주었을 정도로 한국 시장 공략에 정성을 들였던 사례도 있었으니, 산나 아누카의 책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조금만 더 정성을 들였더라면 진정한 명품 그림책으로 간행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그나저나 안데르센 원작인 <눈의 여왕>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어서 그런지 낯선 느낌이 많이 들었다. 어쩐지 졸지에 가진 것 많은 연상녀에게 휘말린 소년을 구하기 위한 소녀의 여정이라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최근 읽은 오카자키 교코의 <핑크>의 줄거리와도 유사한 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창작 동화의 줄거리 자체도 이른바 원형에 해당하는 민담의 모티프를 여럿 담고 있는 전형적인 내용이긴 하다. 납치-수색-탈출로 이어지는 친숙한 줄거리는 조지프 캠벨이 정립한 영웅의 여정 도식에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 소녀를 전형적인 영웅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 '왜 여성은 영웅이 될 수 없냐'고 따진 여학생에 대한 캠벨의 회고가 생각난다. 여성은 영웅을 이끄는 여신이라고 설명해도 영 불만스러워 하더라나. 마치 영웅의 여정에도 유리 천장인지 천장 유리인지가 있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기질상 누군가가 탱커보다 힐러로 더 유능하다 해서 잘못일 리야 없다.


미혼 여성이야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구분조차도 차별과 편견이라 느낄지 모르지만, 애엄마가 되고 보면 "개구리 + 달팽이 + 개꼬리 = 남자아이" 조합과 "설탕 + 향신료 + 좋은 것들 = 여자아이"라는 조합의 차이를 절감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후자는 파워퍼프걸의 제조 공식이기도 하다!


최근 파워퍼프걸 그림을 표지에 사용한 빼빼로가 편의점에 깔려 있기에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만, 지난번에 뉴진스와도 콜라보를 했던 것 때문인지 뜬금없이 유행을 타는 모양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예전에 부모님 댁에서 케이블만 틀면 나와서 "애니매니악"이니 "핑키와 브레인" 등과 함께 가끔 본 기억이 난다.


파워퍼프걸의 에피소드 가운데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은 그 안티테제에 해당하는 3인조 악당 남자아이들을 물리쳤던 내용이다. 힘으로는 철저하게 압도당해 패배했지만, 여자로서의 무기를 사용하라는 왕언니(?)의 조언을 따라서 므흣한 표정으로 뽀뽀를 해주자, 남자아이들이 질겁한 나머지 폭발해 자멸하고 만다.


이 대목에서 새삼 여자가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만큼 남자도 여자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캘빈과 홉스>에서 소년이 소녀에게 보인 적대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 못지않게 두려움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십중팔구 공격성으로 표출되다 보니 오해만 사기 십상인 것이다.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데, 최근에는 이런 태도를 성인이 되어서까지 유지하면서 마치 남녀가 서로를 혐오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선동을 일삼는 사람도 있으니 희한한 일이다. 오죽하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아둔한 유전자를 자연 도태시키려는 갸륵한 사람이라는 비아냥마저 나올까.


암수가 만나 짝짓기를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남녀를 함께 두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도니 종교니 인권이니 다양성이니 하는 온갖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니, 문명은 인간의 장점이기는 해도 뚜렷이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산나 아누카의 <호두까기 인형>은 분량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호프만의 텍스트 가운데 전투에 관련된 세부 내용을 일부 덜어내는 각색을 거친 듯하다. 내용 가운데 생쥐 군대의 "기마병"이니 "포격"처럼 일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인터넷에 올라온 영역문이며 다른 번역서와 대조해 보니 그러했다.


애초에 호프만은 생쥐 군대가 도구를 사용하는 지적 존재인 것처럼 서술해 놓은 듯한데, 정작 산나 아누카의 삽화본은 물론이고 로베르토 이노센티의 삽화본에서도 생쥐 군대는 그냥 육탄으로 싸우는 모습으로만 묘사되었으니, 과연 누가 맞는 것인지는 나귀님도 잘 모르겠다. 저자의 착각일까 삽화가의 오독일까.


내가 가진 완역본은 이노센티의 삽화본에 실린 것뿐이라 오랜만에 꺼내 보니 텍스트에 오타도 많을 뿐더러, 그림도 정교하긴 하지만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만한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냥 내다 버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호두까기 인형>의 다른 텍스트를 구입하기로 작정했다. 


1844년에 나온 <눈의 여왕>이 민담의 모티프를 여럿 포함한 반면, 한 세대 먼저인 1816년에 나온 <호두까기 인형>은 오히려 전형성을 벗어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마법-저주-시련-구원이라는 모티프는 유사하지만, 후반부에 인형이 소녀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대목은 다채롭다 못해 정신사납다.


또 하나 의아했던 대목은 호두까기 인형/사람의 작동 방식에 대한 작중 설명이었다. 저자는 인형/사람의 입을 벌리고 호두를 넣은 다음, 뒤통수에 매달린 "땋은 머리"를 잡아당겨서 껍질을 깬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입에 문 호두를 깨려면 차라리 턱이나 뒤통수를 탁 쳐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유튜브에 올라온 호두까기 인형의 작동 방식을 보면, 위턱/몸통과 아래턱/망토가 교차하면서 마치 펜치처럼 호두를 무는 방식이었다. 즉 책에서 망토라고 묘사한 부분이 실제로는 펜치 손잡이처럼 등 뒤로 길게 튀어나와 있어서, 그걸 꾹 누르면 아래턱이 위로 닫히면서 호두를 눌러 박살내는 원리였다.


그렇다면 원작의 "땋은 머리"도 이처럼 아래턱이 위로 다물리게 하는 장치가 되어야 맞을 테니, "길게 땋은 머리"나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호두가 깨졌다는 묘사는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앞부분에서는 "나무로 만든 튼튼한 머리채"를 턱에 연결해서 잡아당겼다고도 나오는데,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껍질 깐 호두가 흔하니 껍질 달린 호두를 만져 본 지도 오래다. 호두까기라면 개인적으로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빗속의 방문객>이라는 영화에 나온 찰스 브론슨의 모습이다. 범죄자를 쫓아 프랑스로 건너온 이 미국인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호두를 창틀에 던져서 깨먹는 기묘한 습관을 갖고 있다.


범인을 마지막으로 본 (하지만 어떤 이유로 차마 신고할 수 없었던) 어떤 여자 주위를 맴돌던 이 콧수염 기른 추남은 뜻밖의 순간에 등장해서 마치 상대방을 갖고 노는 듯 능글거리면서도 제법 예리하게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여자를 보호하려 한 발 물러나는 신사다운 태도를 보인다. 


영화에서 호두는 그의 개성뿐 아니라 심경 변화도 나타내는 소품이다. 평소에는 백발백중 창틀에 명중해서 깔끔하게 박살난 호두였건만, 여자를 보내고 쓸쓸히 뒤에 남은 그가 간만에 하나 꺼내서 던지자 완전히 겨냥이 빗나가 유리창이 박살나 버리기 때문이다. 놀란 그의 허탈한 표정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1990년대 중반쯤에 TV에서 브론슨이 출연했던 프랑스 영화인 <빗속의 방문객>과 <아듀 라미> 두 편을 연이어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저 못생긴 남자의 매력에 빠졌었다. 두 편 모두 웃통을 벗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만든 몸"과는 달라 보이는 단단한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듀 라미>에서도 브론슨은 찰랑대는 물컵에 동전을 몇 개나 넣을 수 있느냐를 갖고 내기하는 버릇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표면 장력 때문에 의외로 동전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매번 이겼지만, 궁지에 몰렸을 때에는 이조차도 뜻대로 안 되어 역시나 허탈해 하는 것이 결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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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니, 예전에 간행된 그의 자서전을 갖고 있었다는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이것저것 앞에 쌓아 놓은 물건을 치우고 먼지 자욱하게 앉은 책장을 들여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베켄바우어 자서전과 펠레 자서전, 그리고 축구에 관한 에세이 <피버 피치>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축구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고, 당연히 선수 이름이나 구단 이름이나 경기 규칙이나 포지션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며, 가끔 손흥민이 골을 넣었다면 뒤늦게 동영상만 한 번 틀어 보는 정도로 "축알못"인 나귀님이지만, 헌책방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나오는 관련 서적들을 호기심에 집어 들다 보니 결국에는 이런 책도 갖고 있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라면 지난 월드컵 당시에 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가 있다. 갖가지 일화를 정신없이 열거하는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에 걸맞게 축구 역사의 명장면을 짧게 소개한 내용인데, 때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결국 인터넷의 힘을 빌어 유튜브로 해당 경기 장면을 보고서야 알아듣곤 했었다.


베켄바우어에 대해서도 독일의 유명한 축구 선수이고 차범근의 친구라는 것 정도를 빼면 아는 바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그의 명성을 상기한 계기도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나온 아디다스의 광고 때문이니까. "호세와 축구 선수 10명"이란 이 광고가 시작되면 허름한 동네에 사는 꼬마 호세와 페드로가 축구를 하려고 편을 짠다.


두 꼬마가 내키는 대로 지단과 베컴 같은 현역 최고 스타들의 이름을 부르자 놀랍게도 "본인 등판"이 줄줄이 이루어진다. 급기야 호세가 은퇴한 지 오래인 "베켄바우어"를 소환하자 페드로가 황당하다는 듯 웃는데, 곧이어 베켄바우어가 (물론 합성이다) 뛰어와서 합류하고 경기가 시작되며 "불가능은 없다"는 아디다스의 표어가 나온다.


내가 가진 자서전은 번역 제목부터 <프란츠 베켄바우어>(박정미 옮김, 베텔스만코리아, 1999)인데, 원제는 "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Ich - Wie es wirklich war)이며 첫 번째도 아니고 무려 세 번째 저서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격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현역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사건을 회고하는 에세이에 가깝다.


목차를 보니 각 장의 제목이 "분데스리가와 나", "국가대표팀과 나", "월드컵과 나", "여자와 나", 심지어 "세무서와 나" 등으로 나온다. 전설의 골키퍼 야신을 비롯해 여러 선수며 명사를 만난 일화도 나오는데, 차범근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했지만 196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격파한 북한 선수 박두익에 대한 언급은 의외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고, 구글링해 보아도 국립중앙도서관 외에는 기록이 거의 없다. 어쩌면 베텔스만코리아가 본격적으로 출판 시장에 뛰어들기 전, 즉 국내 진출 초기에 북클럽용으로 제작해서 배포한 책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판권면에는 1999년 12월 1일에 간행된 북클럽 초판 1쇄로 나온다.


베텔스만코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업체가 철수한 지금에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을 테지만, 독일의 유명한 이 미디어 대기업의 모태는 바로 출판업이었고, 그중에서도 주력 사업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북클럽이었다. 아마 회비를 납부하면 북클럽에서 선정한 도서를 1년에 몇 권씩 회원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기억한다.


일단 북클럽에 선정된 책은 수천 부씩 판매가 보장되었지만, 출판사에서는 출고가를 낮춰 박리다매로 납품했기에, 자칫 북클럽에 납품한 도서가 서점으로 역류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북클럽용 판본을 별도로 제작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베켄바우어 자서전에도 가격 표시는 있지만 ISBN은 없고, 판권에는 북클럽용이라 명시되어 있다.


문제는 한국 출판 시장이 워낙 작아서 북클럽 사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급기야 베텔스만코리아는 직접 출판사를 차렸지만, 설립 6년만인 2005년에 대교에 매각하며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다빈치 코드>라는 베스트셀러도 있었지만, 나머지 간행 도서는 두드러진 것이 없어서 대부분 헌책방에 악성 재고로 남아 있다.


여하간 베켄바우어의 자서전 중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니, 이를 기억/소장할 만한 독자/팬도 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기록이 없으니 놀랍기만 하다. 나귀님이 가진 책은 무려 저자 서명본인데, 구글링으로 확인한 베켄바우어의 서명과도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뒷면에 배긴 볼펜 자국만 보아도 진짜임이 확실해 보인다.


베켄바우어는 1999년 12월 초에 내한하여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을 만나고 상암월드컵경기장 공사 현장을 둘러보았다고 하니, 아마도 베텔스만코리아에서는 이에 맞춰 자서전을 간행하고 사인회라도 개최했던 모양이다. 비록 서명된 유니폼이나 축구공까진 아니어도, 지금은 책 자체도 희귀해진 듯하니 수집 가치도 아주 없진 않을 듯하다.


베켄바우어가 평생 우상으로 여긴 펠레도 여러 차례 내한했었는데, 내가 가진 펠레 자서전 번역본에는 십중팔구 그때쯤 얻은 듯한 서명이 들어 있다. 이것 역시 유성 매직 자국이 뒷면에 배긴 것을 보면 진짜 사인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나저나 펠레와 베켄바우어 사인본조차 필요 없다며 선뜻 내다 버린 원래 주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 자서전에서 베켄바우어는 서독 대표팀을 이끌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해 체코와의 8강전에서 신승한 직후, 체력 고갈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또 한 번 멋진 경기를 펼쳐 보이려는 욕심에 무리를 했던"(193쪽) 클린스만을 힐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고한다. "클린스만, 자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펠레가 아니라 클린스만이고, 언제나 클린스만으로 남는다는 것을 모르나?"(193쪽)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부터 줄곧 무책임한 행보로 비판을 받는 클린스만에게 불만인 국내 축구 팬들에게는 어쩐지 "사이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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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샵에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 신판 가운데 하나인 <미노스 (외)>가 올라왔기에 주문해 보았다. 이제이북스에서 완간을 코앞에 두고 있다가 갑자기 아카넷으로 출판사를 옮겼는데, 표지 디자인은 물론이고 판형까지 신국판 소프트커버에서 사륙판 하드커버로 바꿔버린 것을 보고, 참 신의 없는 행동이구나 싶어서 한동안 외면하던 차였다.


<미노스 (외)>는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구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서 구입했는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을 새롭게 펴내며"라는 두 번째 서문을 보면 이제이북스의 사정으로 출간을 중단하고 출판사를 옮기게 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검색해 보니 이제이북스는 2018년 이후로 신간을 내놓지 않았으니 사실상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출판사를 옮긴 사정까지는 감안하더라도, 판형까지 싹 바꿔서 재간행하는 것은 괘씸할 수밖에 없다. 이제이북스 구판을 가진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려 스무 권이나 모아 놓은 책들을 내버리고 다시 살 수도 없고, 막상 <미노스 (외)>처럼 원래 없던 책들만 구입해서 꽂아 놓으면 기존의 책들과 판형부터 다르니 "전집"이라기에는 영 꼴불견이다.


플라톤 전집의 구판과 신판 모두에는 후원회원인 개인과 단체의 명단이 서너 페이지에 걸쳐 나와 있는데, 거꾸로 보자면 졸지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구판을 떠안은 피해자 명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참여한 후원회원이라면 지금쯤 구판 스무 권에 신판 스물세 권까지, 완간되지 않은 플라톤 전집을 무려 두 종이나 갖고 있지 않을까.


출판계에서 한 작가, 또는 한 작품을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간하다 중단한다든지, 아니면 중간에 디자인을 바꾸어 통일성을 깨트린다든지, 최악의 경우에 한동안 출간을 중단했다 재개하여 완간하면서 디자인 변경은 물론이고 박스 세트나 가격 할인이나 특전 부록 같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꾸준히 구입한 독자를 농락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도 않다.


반면 한 작가의 작품을 두 출판사가 간행하면서 협의를 통해 판형은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똑같이 맞추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북스피어와 모비딕에서 나눠서 간행하는 마츠모토 세이초 시리즈가 그렇다. 이런 선례를 감안할 때 출판사를 옮기더라도 외양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배려 부족의 결과로 보인다.


<미노스 (외)>처럼 짧은 작품까지도 한 권으로 간행하는 것을 보면 아카넷의 플라톤 전집은 전30권 내외로 완간되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그중 스무 권은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것들이니, 권수로만 놓고 보면 60%가 중복 출판인 셈이다.(물론 분량으로는 전집의 4분의 1쯤을 차지할 법한 <국가>와 <법률>이 압도적이므로 그 비율도 더 떨어지겠지만).


물론 판형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책의 디자인은 읽기의 편의성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새로운 플라톤 전집을 굳이 작은 판형에 하드커버까지 씌워 가면서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현재 판형으로 <국가>나 <법률>을 간행한다면 거뜬히 1,000페이지에 육박할 테니까.


역시나 아카넷에서 간행하는 대우고전총서 역시 처음에는 사륙판으로 제작되다가 <순수이성비판>에 이르자 뒤늦게야 실책을 깨달았는지 신국판으로 돌아와서 이후 칸트 전집을 신국판으로 내고 있는데, 플라톤 전집에서도 <국가>와 <법률>이 그 선례를 따른다면, 결국 시리즈의 통일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꼴이 되어 버릴 터이니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여하간 정암학당이 출판사를 옮기고 뭐하는 와중에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는 엉뚱하게도 후발 주자인 천병희가 가져가고 말았으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고 또 한편으로는 쌤통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심지어 철학 전공자도 아니라며 무시당하던 천병희에게 뒤처졌으니 전공자 모임인 정암학당으로선 참 민망하지 않겠나.


우스운 것은 후발 주자였던 숲 출판사의 천병희 번역 플라톤 전집 역시 독자를 농락한 바 있다는 점이다. 즉 원래는 전집을 의도하지 않고 두세 편씩 쪼개서 조금씩 간행하다가, 뒤늦게 전집으로 명명하고 합본을 만들고 표지를 교체하여 나머지 두 권을 내서 완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입한 독자는 통일된 디자인의 전집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암학당/이제이북스나 천병희/숲 모두 플라톤 전집이라는 거창한 시도를 하면서도 장기적인 계획이나 전략 부족/부재로 독자를 농락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이십 년 넘게 지속된 사업이 판형이나 표지 같은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일관성 없이 뒤바뀌면 과연 어떤 독자가 순순히 받아들이겠나.


개인적으로는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가 박종현에게 돌아갔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서광사의 <국가>가 1997년에 나왔으니 벌써 사반세기 전인데, 처음에는 플라톤의 주요 저서를 여러 전공자들이 나누어 번역하기로 했다가, 세월이 흐르며 공역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떨어져 나가서 사실상 박종현의 단독 번역이 되었다.


박종현도 처음부터 단독 완간을 목표로 매진했다면 충분히, 어쩌면 더 일찍 달성할 수 있었겠지만, 번역 후기 중 하나에서 동참을 약속한 동료 학자들을 믿는다며 당분간 본인의 저술에만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신의가 보답을 얻지 못한 형국이어서, 박종현의 플라톤 전집은 맨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 진행 중인 상황이다.


물론 학술서 번역 출판은 올림픽도 월드컵도 아니니 누가 먼저고 나중이고를 따져보았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3파전으로 벌어진 플라톤 전집 완간 경쟁의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니 새삼스레 신의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어 한 마디 해본다. 부디 박종현 선생의 단독 번역이 무사히 완간되기를 빈다.(정암학당이야 뭐, 완간을 하든가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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