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이번 크리스마스는 산나 아누카의 그림책 두 권과 함께 보냈다. <호두까기 인형>은 꽤 오래 전에 구입했고 지금도 여전히 판매 중이지만, <눈의 여왕>은 절판이어서 한동안 헌책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며 제법 희귀본 행세를 하더니만 몇 달 전쯤에 운 좋게 중고 매장에서 구입한 것이다.


책을 구입하고 나서야 출판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 <눈의 여왕>은 2019년 7월에 문학수첩에서 간행되었다가 절판되었고, <호두까기 인형>은 2019년 12월에 아르테에서 간행되어서 여전히 판매 중이다. 그런데 후자의 권말에는 같은 삽화가의 <전나무>와 <눈의 여왕>의 표지가 한 쪽씩 들어 있다.


이를 토대로 짐작컨대, 애초에는 <눈의 여왕>의 판권도 문학수첩에서 아르테로 넘어가서 <호두까기 인형>과 <전나무>와 함께 3부작으로 출간되려던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도 간행되었다는 소식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 출간이 불발되고 만 것으로 추정된다.


산나 아누카는 핀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삽화가인데, 모국의 토속적인 장식 문양을 토대로 삼은 독특한 그림을 그려서 유명한 모양이다. 따라서 <눈의 여왕>과 <호두까기 인형> 모두 눈이 즐거운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막상 번역본에서는 바로 그런 디자인의 특성상 아쉬움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장식 머리글자로 시작되는 일부 페이지의 경우, 영어에서는 A, B, C처럼 알파벳 하나만 적어놔도 그만이지만, 우리말에서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꽃으로, 아버지는, 마리는"으로 시작되는 페이지가 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장식 머리글자는 "꽃, 아, 마"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번역본에서는 머리글자가 나올 부분에 자음 "ㄲ, ㅇ, ㅁ"만 나와 있고, 그 다음에 "꽃으로, 아버지는, 마리는"이란 어절이 또 등장해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왕 한글로 장식 머리글자를 만들었다면, 달랑 자음만 만들 것이 아니라 "꽃, 아, 마"라고 완전한 음절을 만들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알파벳 이외의 낯선 철자를 새로 디자인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시했을 수도 있지만, 설령 그 와중에 시간이나 비용이 추가되더라도, 제대로 된 한글 장식 머리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이 오히려 홍보 수단이 되었을 터이고, 그로 인한 가격 상승도 어느 정도까지는 충분히 용인되었을지 모른다.


과거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개봉 당시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글 제목을 직접 "그려" 주었을 정도로 한국 시장 공략에 정성을 들였던 사례도 있었으니, 산나 아누카의 책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조금만 더 정성을 들였더라면 진정한 명품 그림책으로 간행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그나저나 안데르센 원작인 <눈의 여왕>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어서 그런지 낯선 느낌이 많이 들었다. 어쩐지 졸지에 가진 것 많은 연상녀에게 휘말린 소년을 구하기 위한 소녀의 여정이라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최근 읽은 오카자키 교코의 <핑크>의 줄거리와도 유사한 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창작 동화의 줄거리 자체도 이른바 원형에 해당하는 민담의 모티프를 여럿 담고 있는 전형적인 내용이긴 하다. 납치-수색-탈출로 이어지는 친숙한 줄거리는 조지프 캠벨이 정립한 영웅의 여정 도식에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 소녀를 전형적인 영웅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 '왜 여성은 영웅이 될 수 없냐'고 따진 여학생에 대한 캠벨의 회고가 생각난다. 여성은 영웅을 이끄는 여신이라고 설명해도 영 불만스러워 하더라나. 마치 영웅의 여정에도 유리 천장인지 천장 유리인지가 있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기질상 누군가가 탱커보다 힐러로 더 유능하다 해서 잘못일 리야 없다.


미혼 여성이야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구분조차도 차별과 편견이라 느낄지 모르지만, 애엄마가 되고 보면 "개구리 + 달팽이 + 개꼬리 = 남자아이" 조합과 "설탕 + 향신료 + 좋은 것들 = 여자아이"라는 조합의 차이를 절감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후자는 파워퍼프걸의 제조 공식이기도 하다!


최근 파워퍼프걸 그림을 표지에 사용한 빼빼로가 편의점에 깔려 있기에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만, 지난번에 뉴진스와도 콜라보를 했던 것 때문인지 뜬금없이 유행을 타는 모양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예전에 부모님 댁에서 케이블만 틀면 나와서 "애니매니악"이니 "핑키와 브레인" 등과 함께 가끔 본 기억이 난다.


파워퍼프걸의 에피소드 가운데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은 그 안티테제에 해당하는 3인조 악당 남자아이들을 물리쳤던 내용이다. 힘으로는 철저하게 압도당해 패배했지만, 여자로서의 무기를 사용하라는 왕언니(?)의 조언을 따라서 므흣한 표정으로 뽀뽀를 해주자, 남자아이들이 질겁한 나머지 폭발해 자멸하고 만다.


이 대목에서 새삼 여자가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만큼 남자도 여자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캘빈과 홉스>에서 소년이 소녀에게 보인 적대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 못지않게 두려움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십중팔구 공격성으로 표출되다 보니 오해만 사기 십상인 것이다.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데, 최근에는 이런 태도를 성인이 되어서까지 유지하면서 마치 남녀가 서로를 혐오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선동을 일삼는 사람도 있으니 희한한 일이다. 오죽하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아둔한 유전자를 자연 도태시키려는 갸륵한 사람이라는 비아냥마저 나올까.


암수가 만나 짝짓기를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남녀를 함께 두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도니 종교니 인권이니 다양성이니 하는 온갖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니, 문명은 인간의 장점이기는 해도 뚜렷이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산나 아누카의 <호두까기 인형>은 분량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호프만의 텍스트 가운데 전투에 관련된 세부 내용을 일부 덜어내는 각색을 거친 듯하다. 내용 가운데 생쥐 군대의 "기마병"이니 "포격"처럼 일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인터넷에 올라온 영역문이며 다른 번역서와 대조해 보니 그러했다.


애초에 호프만은 생쥐 군대가 도구를 사용하는 지적 존재인 것처럼 서술해 놓은 듯한데, 정작 산나 아누카의 삽화본은 물론이고 로베르토 이노센티의 삽화본에서도 생쥐 군대는 그냥 육탄으로 싸우는 모습으로만 묘사되었으니, 과연 누가 맞는 것인지는 나귀님도 잘 모르겠다. 저자의 착각일까 삽화가의 오독일까.


내가 가진 완역본은 이노센티의 삽화본에 실린 것뿐이라 오랜만에 꺼내 보니 텍스트에 오타도 많을 뿐더러, 그림도 정교하긴 하지만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만한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냥 내다 버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호두까기 인형>의 다른 텍스트를 구입하기로 작정했다. 


1844년에 나온 <눈의 여왕>이 민담의 모티프를 여럿 포함한 반면, 한 세대 먼저인 1816년에 나온 <호두까기 인형>은 오히려 전형성을 벗어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마법-저주-시련-구원이라는 모티프는 유사하지만, 후반부에 인형이 소녀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대목은 다채롭다 못해 정신사납다.


또 하나 의아했던 대목은 호두까기 인형/사람의 작동 방식에 대한 작중 설명이었다. 저자는 인형/사람의 입을 벌리고 호두를 넣은 다음, 뒤통수에 매달린 "땋은 머리"를 잡아당겨서 껍질을 깬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입에 문 호두를 깨려면 차라리 턱이나 뒤통수를 탁 쳐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유튜브에 올라온 호두까기 인형의 작동 방식을 보면, 위턱/몸통과 아래턱/망토가 교차하면서 마치 펜치처럼 호두를 무는 방식이었다. 즉 책에서 망토라고 묘사한 부분이 실제로는 펜치 손잡이처럼 등 뒤로 길게 튀어나와 있어서, 그걸 꾹 누르면 아래턱이 위로 닫히면서 호두를 눌러 박살내는 원리였다.


그렇다면 원작의 "땋은 머리"도 이처럼 아래턱이 위로 다물리게 하는 장치가 되어야 맞을 테니, "길게 땋은 머리"나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호두가 깨졌다는 묘사는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앞부분에서는 "나무로 만든 튼튼한 머리채"를 턱에 연결해서 잡아당겼다고도 나오는데,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껍질 깐 호두가 흔하니 껍질 달린 호두를 만져 본 지도 오래다. 호두까기라면 개인적으로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빗속의 방문객>이라는 영화에 나온 찰스 브론슨의 모습이다. 범죄자를 쫓아 프랑스로 건너온 이 미국인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호두를 창틀에 던져서 깨먹는 기묘한 습관을 갖고 있다.


범인을 마지막으로 본 (하지만 어떤 이유로 차마 신고할 수 없었던) 어떤 여자 주위를 맴돌던 이 콧수염 기른 추남은 뜻밖의 순간에 등장해서 마치 상대방을 갖고 노는 듯 능글거리면서도 제법 예리하게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여자를 보호하려 한 발 물러나는 신사다운 태도를 보인다. 


영화에서 호두는 그의 개성뿐 아니라 심경 변화도 나타내는 소품이다. 평소에는 백발백중 창틀에 명중해서 깔끔하게 박살난 호두였건만, 여자를 보내고 쓸쓸히 뒤에 남은 그가 간만에 하나 꺼내서 던지자 완전히 겨냥이 빗나가 유리창이 박살나 버리기 때문이다. 놀란 그의 허탈한 표정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1990년대 중반쯤에 TV에서 브론슨이 출연했던 프랑스 영화인 <빗속의 방문객>과 <아듀 라미> 두 편을 연이어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저 못생긴 남자의 매력에 빠졌었다. 두 편 모두 웃통을 벗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만든 몸"과는 달라 보이는 단단한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듀 라미>에서도 브론슨은 찰랑대는 물컵에 동전을 몇 개나 넣을 수 있느냐를 갖고 내기하는 버릇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표면 장력 때문에 의외로 동전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매번 이겼지만, 궁지에 몰렸을 때에는 이조차도 뜻대로 안 되어 역시나 허탈해 하는 것이 결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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