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중고샵에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 신판 가운데 하나인 <미노스 (외)>가 올라왔기에 주문해 보았다. 이제이북스에서 완간을 코앞에 두고 있다가 갑자기 아카넷으로 출판사를 옮겼는데, 표지 디자인은 물론이고 판형까지 신국판 소프트커버에서 사륙판 하드커버로 바꿔버린 것을 보고, 참 신의 없는 행동이구나 싶어서 한동안 외면하던 차였다.


<미노스 (외)>는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구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서 구입했는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을 새롭게 펴내며"라는 두 번째 서문을 보면 이제이북스의 사정으로 출간을 중단하고 출판사를 옮기게 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검색해 보니 이제이북스는 2018년 이후로 신간을 내놓지 않았으니 사실상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출판사를 옮긴 사정까지는 감안하더라도, 판형까지 싹 바꿔서 재간행하는 것은 괘씸할 수밖에 없다. 이제이북스 구판을 가진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려 스무 권이나 모아 놓은 책들을 내버리고 다시 살 수도 없고, 막상 <미노스 (외)>처럼 원래 없던 책들만 구입해서 꽂아 놓으면 기존의 책들과 판형부터 다르니 "전집"이라기에는 영 꼴불견이다.


플라톤 전집의 구판과 신판 모두에는 후원회원인 개인과 단체의 명단이 서너 페이지에 걸쳐 나와 있는데, 거꾸로 보자면 졸지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구판을 떠안은 피해자 명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참여한 후원회원이라면 지금쯤 구판 스무 권에 신판 스물세 권까지, 완간되지 않은 플라톤 전집을 무려 두 종이나 갖고 있지 않을까.


출판계에서 한 작가, 또는 한 작품을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간하다 중단한다든지, 아니면 중간에 디자인을 바꾸어 통일성을 깨트린다든지, 최악의 경우에 한동안 출간을 중단했다 재개하여 완간하면서 디자인 변경은 물론이고 박스 세트나 가격 할인이나 특전 부록 같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꾸준히 구입한 독자를 농락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도 않다.


반면 한 작가의 작품을 두 출판사가 간행하면서 협의를 통해 판형은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똑같이 맞추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북스피어와 모비딕에서 나눠서 간행하는 마츠모토 세이초 시리즈가 그렇다. 이런 선례를 감안할 때 출판사를 옮기더라도 외양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배려 부족의 결과로 보인다.


<미노스 (외)>처럼 짧은 작품까지도 한 권으로 간행하는 것을 보면 아카넷의 플라톤 전집은 전30권 내외로 완간되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그중 스무 권은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것들이니, 권수로만 놓고 보면 60%가 중복 출판인 셈이다.(물론 분량으로는 전집의 4분의 1쯤을 차지할 법한 <국가>와 <법률>이 압도적이므로 그 비율도 더 떨어지겠지만).


물론 판형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책의 디자인은 읽기의 편의성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새로운 플라톤 전집을 굳이 작은 판형에 하드커버까지 씌워 가면서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현재 판형으로 <국가>나 <법률>을 간행한다면 거뜬히 1,000페이지에 육박할 테니까.


역시나 아카넷에서 간행하는 대우고전총서 역시 처음에는 사륙판으로 제작되다가 <순수이성비판>에 이르자 뒤늦게야 실책을 깨달았는지 신국판으로 돌아와서 이후 칸트 전집을 신국판으로 내고 있는데, 플라톤 전집에서도 <국가>와 <법률>이 그 선례를 따른다면, 결국 시리즈의 통일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꼴이 되어 버릴 터이니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여하간 정암학당이 출판사를 옮기고 뭐하는 와중에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는 엉뚱하게도 후발 주자인 천병희가 가져가고 말았으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고 또 한편으로는 쌤통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심지어 철학 전공자도 아니라며 무시당하던 천병희에게 뒤처졌으니 전공자 모임인 정암학당으로선 참 민망하지 않겠나.


우스운 것은 후발 주자였던 숲 출판사의 천병희 번역 플라톤 전집 역시 독자를 농락한 바 있다는 점이다. 즉 원래는 전집을 의도하지 않고 두세 편씩 쪼개서 조금씩 간행하다가, 뒤늦게 전집으로 명명하고 합본을 만들고 표지를 교체하여 나머지 두 권을 내서 완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입한 독자는 통일된 디자인의 전집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암학당/이제이북스나 천병희/숲 모두 플라톤 전집이라는 거창한 시도를 하면서도 장기적인 계획이나 전략 부족/부재로 독자를 농락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이십 년 넘게 지속된 사업이 판형이나 표지 같은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일관성 없이 뒤바뀌면 과연 어떤 독자가 순순히 받아들이겠나.


개인적으로는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가 박종현에게 돌아갔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서광사의 <국가>가 1997년에 나왔으니 벌써 사반세기 전인데, 처음에는 플라톤의 주요 저서를 여러 전공자들이 나누어 번역하기로 했다가, 세월이 흐르며 공역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떨어져 나가서 사실상 박종현의 단독 번역이 되었다.


박종현도 처음부터 단독 완간을 목표로 매진했다면 충분히, 어쩌면 더 일찍 달성할 수 있었겠지만, 번역 후기 중 하나에서 동참을 약속한 동료 학자들을 믿는다며 당분간 본인의 저술에만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신의가 보답을 얻지 못한 형국이어서, 박종현의 플라톤 전집은 맨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 진행 중인 상황이다.


물론 학술서 번역 출판은 올림픽도 월드컵도 아니니 누가 먼저고 나중이고를 따져보았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3파전으로 벌어진 플라톤 전집 완간 경쟁의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니 새삼스레 신의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어 한 마디 해본다. 부디 박종현 선생의 단독 번역이 무사히 완간되기를 빈다.(정암학당이야 뭐, 완간을 하든가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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