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니, 예전에 간행된 그의 자서전을 갖고 있었다는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이것저것 앞에 쌓아 놓은 물건을 치우고 먼지 자욱하게 앉은 책장을 들여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베켄바우어 자서전과 펠레 자서전, 그리고 축구에 관한 에세이 <피버 피치>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축구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고, 당연히 선수 이름이나 구단 이름이나 경기 규칙이나 포지션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며, 가끔 손흥민이 골을 넣었다면 뒤늦게 동영상만 한 번 틀어 보는 정도로 "축알못"인 나귀님이지만, 헌책방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나오는 관련 서적들을 호기심에 집어 들다 보니 결국에는 이런 책도 갖고 있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라면 지난 월드컵 당시에 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가 있다. 갖가지 일화를 정신없이 열거하는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에 걸맞게 축구 역사의 명장면을 짧게 소개한 내용인데, 때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결국 인터넷의 힘을 빌어 유튜브로 해당 경기 장면을 보고서야 알아듣곤 했었다.


베켄바우어에 대해서도 독일의 유명한 축구 선수이고 차범근의 친구라는 것 정도를 빼면 아는 바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그의 명성을 상기한 계기도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나온 아디다스의 광고 때문이니까. "호세와 축구 선수 10명"이란 이 광고가 시작되면 허름한 동네에 사는 꼬마 호세와 페드로가 축구를 하려고 편을 짠다.


두 꼬마가 내키는 대로 지단과 베컴 같은 현역 최고 스타들의 이름을 부르자 놀랍게도 "본인 등판"이 줄줄이 이루어진다. 급기야 호세가 은퇴한 지 오래인 "베켄바우어"를 소환하자 페드로가 황당하다는 듯 웃는데, 곧이어 베켄바우어가 (물론 합성이다) 뛰어와서 합류하고 경기가 시작되며 "불가능은 없다"는 아디다스의 표어가 나온다.


내가 가진 자서전은 번역 제목부터 <프란츠 베켄바우어>(박정미 옮김, 베텔스만코리아, 1999)인데, 원제는 "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Ich - Wie es wirklich war)이며 첫 번째도 아니고 무려 세 번째 저서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격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현역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사건을 회고하는 에세이에 가깝다.


목차를 보니 각 장의 제목이 "분데스리가와 나", "국가대표팀과 나", "월드컵과 나", "여자와 나", 심지어 "세무서와 나" 등으로 나온다. 전설의 골키퍼 야신을 비롯해 여러 선수며 명사를 만난 일화도 나오는데, 차범근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했지만 196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격파한 북한 선수 박두익에 대한 언급은 의외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고, 구글링해 보아도 국립중앙도서관 외에는 기록이 거의 없다. 어쩌면 베텔스만코리아가 본격적으로 출판 시장에 뛰어들기 전, 즉 국내 진출 초기에 북클럽용으로 제작해서 배포한 책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판권면에는 1999년 12월 1일에 간행된 북클럽 초판 1쇄로 나온다.


베텔스만코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업체가 철수한 지금에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을 테지만, 독일의 유명한 이 미디어 대기업의 모태는 바로 출판업이었고, 그중에서도 주력 사업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북클럽이었다. 아마 회비를 납부하면 북클럽에서 선정한 도서를 1년에 몇 권씩 회원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기억한다.


일단 북클럽에 선정된 책은 수천 부씩 판매가 보장되었지만, 출판사에서는 출고가를 낮춰 박리다매로 납품했기에, 자칫 북클럽에 납품한 도서가 서점으로 역류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북클럽용 판본을 별도로 제작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베켄바우어 자서전에도 가격 표시는 있지만 ISBN은 없고, 판권에는 북클럽용이라 명시되어 있다.


문제는 한국 출판 시장이 워낙 작아서 북클럽 사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급기야 베텔스만코리아는 직접 출판사를 차렸지만, 설립 6년만인 2005년에 대교에 매각하며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다빈치 코드>라는 베스트셀러도 있었지만, 나머지 간행 도서는 두드러진 것이 없어서 대부분 헌책방에 악성 재고로 남아 있다.


여하간 베켄바우어의 자서전 중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니, 이를 기억/소장할 만한 독자/팬도 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기록이 없으니 놀랍기만 하다. 나귀님이 가진 책은 무려 저자 서명본인데, 구글링으로 확인한 베켄바우어의 서명과도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뒷면에 배긴 볼펜 자국만 보아도 진짜임이 확실해 보인다.


베켄바우어는 1999년 12월 초에 내한하여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을 만나고 상암월드컵경기장 공사 현장을 둘러보았다고 하니, 아마도 베텔스만코리아에서는 이에 맞춰 자서전을 간행하고 사인회라도 개최했던 모양이다. 비록 서명된 유니폼이나 축구공까진 아니어도, 지금은 책 자체도 희귀해진 듯하니 수집 가치도 아주 없진 않을 듯하다.


베켄바우어가 평생 우상으로 여긴 펠레도 여러 차례 내한했었는데, 내가 가진 펠레 자서전 번역본에는 십중팔구 그때쯤 얻은 듯한 서명이 들어 있다. 이것 역시 유성 매직 자국이 뒷면에 배긴 것을 보면 진짜 사인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나저나 펠레와 베켄바우어 사인본조차 필요 없다며 선뜻 내다 버린 원래 주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 자서전에서 베켄바우어는 서독 대표팀을 이끌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해 체코와의 8강전에서 신승한 직후, 체력 고갈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또 한 번 멋진 경기를 펼쳐 보이려는 욕심에 무리를 했던"(193쪽) 클린스만을 힐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고한다. "클린스만, 자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펠레가 아니라 클린스만이고, 언제나 클린스만으로 남는다는 것을 모르나?"(193쪽)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부터 줄곧 무책임한 행보로 비판을 받는 클린스만에게 불만인 국내 축구 팬들에게는 어쩐지 "사이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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