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맡에 쌓아 놓고 차일피일 먼지만 쌓여 가던 책더미에서 몇 개라도 읽고 치우자 싶어서, 사토 사토루의 코로보쿠루 시리즈 가운데 1권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와 2권 <콩알만한 작은 개>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서 완독했다. 지난번에 사무라 히로아키의 단편집에서 (물론 특유의 황당한 각색을 거치기는 했지만) 이 소인 전설을 접하고 새삼 흥미를 느껴 구입한 책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코다마 유키의 만화에도 비슷한 소인이 나온 단편이 있었고, <허니와 클로버>에서도 키가 작고 나이 어린 여주인공을 본 누군가가 "코로보쿠루다!" 하고 소리친 장면이 있었다. 토토로가 우산 대용으로 머리에 얹은 풀잎도 사실은 코로보쿠루의 상징인 "머위 잎"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 치면 숲의 수호신이라는 작품 속 설정과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위에 언급한 여러 작품에서도 코로보쿠루는 머위를 배경 삼아 나타난다고 묘사되는데,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언어로 그 이름 자체가 "머위 아래 사람"이란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지역의 머위가 사람 키보다 더 크기 때문에, 코로보쿠루도 반드시 소인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그 지역 원주민에 대한 기억이 설화로 변했다고 보는 모양이다.
사토 사토루의 소설은 1959년부터 1983년까지 총5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정신세계사에서 1-3권이 나오고, 나중에 논장에서 전권이 다시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소인을 다룬 작품이라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이 <마루 밑 바로우어즈>이지만, 코로보쿠루 시리즈도 일본 문화의 독특한 설정을 여럿 가미하여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1권인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현대로 접어들며 코로보쿠루도 점차 살 곳이 줄어들어 인적이 드문 작은 산을 중심으로 머물게 된다. 마침 도로 건설 계획이 추진되어 그 작은 터전마저 잃을 위기에서, 우연히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주인공이 공동의 노력 끝에 도로 건설을 저지하고 작은 산을 매입해서 생존을 보장해 준다.
유사한 내용을 다룬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는 결국 터전 지키기에 실패한 너구리떼가 인간으로 변신해 현대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기로 결정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버린다.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보다 한 세대 뒤에 나온 작품이니, 대기업의 개발 횡포 앞에서 개인의 환경 보호 노력도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새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콩알만한 작은 개>에서는 일본 민담의 또 다른 소재인 "대롱여우"가 "콩알개"로 재해석되어 나오는데 (이 요괴는 <음양사>나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작은 동물은 심지어 코로보쿠루 사이에서도 한때나마 "멸종" 되었다고 간주된다. 이쯤 되면 코로보쿠루나 콩알개 모두 존폐 위기에 처한 연약한 자연의 형상화라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사토 사토루의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환상과 현실이 공존할 수 있는 일종의 대안을 일찌감치 제안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인간과 이생명체의 공존과 갈등이라는 소재는 일본 만화에서 종종 접했는데,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코다마 유키의 인어 연작 단편인 <빛의 바다>이고, 최근에 본 작품으로는 <던전밥> 애니 때문에 다시 꺼내 본 쿠이 료코의 단편들이 있다.
<던전밥>도 마물에 대한 편견은 물론이고 인간, 엘프, 수인 등 여러 종족 간의 차별과 반목에 대해서도 종종 일침을 놓는 작품인데,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와 <용의 학교는 산 위에>라는 단편집은 용, 켄타우로스, 늑대인간, 인어 등을 소재로 삼아 그 주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공존의 방법을 묻는다는 점에서 사토 사토루와 유사한 주제 의식을 지니는 듯하다.
전설 속의 용이 실존하는 현대 일본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을 보면, 용을 직접 기르면서 생태를 연구하는 전공이 개설된 대학도 있지만, 막상 용 자체는 막대한 유지비에 비해 경제성이 없어 관련 산업도 전무하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반대로 켄타우로스는 탁월한 체력 때문에 유능한 자원이지만, 역량 면에서 자연히 뒤떨어지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대상이다.
이쯤 되면 쿠이 료코의 단편들은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각종 소수자가 처하는 상황에 대한 우의화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사토 사토루의 코로보쿠루 이야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겠다. 그 소인 전설의 유래인 아이누족이야말로 일본 역사 내내 차별과 탄압을 받은 소수 집단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한 점은 코로보쿠루의 입장에서야 아이누족이나 일본인이나 외부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토 사토루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작은 도사들"로 자처하던 소인족을 만나자마자 문헌 근거까지 들먹이며 '너희는 코로보쿠루다'라고 굳이 납득시킨 것도 뭔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샤모"(본토인) 특유의 저 유서 깊은 강압의 연장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