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수상쩍을 정도로 한 가지에 진심인 출판사들"이라는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곳이 바로 팀 오브라이언의 책을 줄줄이 내놓은 섬과달이라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의 구판을 하나 사서 읽는 와중이어서, 일단 이것까지만 읽고 나서 한꺼번에 정리하자 싶어 빼버렸던 셈이었다. 이후 차일피일 미루다가 꾸역꾸역 반쯤 남은 책을 다 읽어치우고 말았으니, 뭔가 한 번쯤 정리해도 괜찮을 법하다.
팀 오브라이언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명성을 접하고 대표작이라는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검색해 보았을 때에는 이미 국내 유일 번역본이 절판되어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비싼 값에 살 필요까지는 없었고, 딱히 아주 궁금한 것도 아니었으며, 여차 하면 간혹 나오는 중고 원서를 사서 읽으면 그만이 아닐까 싶어서 한동안 그 책이며 저자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알라딘 중고샵에서 그 절판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게 한 권도 아니고 무려 십수 권이었다! 이쯤 되면 원인은 단 하나, 즉 어디선가 신판이 간행되었다는 뜻이었다. 검색해 보니 섬과달이라는 처음 보는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기에 아니나 다를까 싶었다. 십중팔구 누군가가 절판본이라는 점을 감안해 재고를 잔뜩 쟁여놓고 있다가, 신판이 나온 것을 보고 더 이상은 배짱 장사가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뱉어놓지 않았을까.
여하간 내 입장에서야 구판이고 신판이고 쥐 잘 잡는 책이 좋은 책이므로, 일단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가격도 저렴해진 구판 중고로 하나 주문해 보았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었다는 문인이 번역했다고 하는데, 오타며 오역도 심심찮게 나와서 읽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저자의 이야기 솜씨 하나만큼은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짧은 단편 하나의 줄거리는 이렇다.
A와 B는 전투 중에 둘 중 하나가 중상을 입는다면 나머지 하나가 총으로 쏴서 고통을 덜어주기로 약속한다. 얼마 후 정찰 중에 A가 지뢰를 밟아 중상을 입는다. 부상자를 확인하러 동료들이 몰려들고, B도 친구가 걱정되어 달려간다. 그러자 고통에 신음하던 A는 B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며 "나를 죽이지 마!" 하고 애원한다.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도 오해를 받아 심란해 하던 B는 후방으로 이송된 A가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마음의 짐을 던다.
전쟁 중의 부상자를 다룬 단편이야 수두룩하겠지만 (어쩐지 토바이어스 울프의 단편 중에도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번역으로 4페이지에 불과한 이 작품이 각별히 인상적인 까닭은 삶과 죽음의 크나큰 무게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말이야 존엄한 죽음이며 안락사를 논한다지만, 정작 죽음이 목전에 닥치면 이성도 체면도 없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 것이니, 죽음의 무게는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산 자까지도 짓누르는 셈이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화자가 징병을 피해 캐나다로 넘어가려 시도했던 것을 회고한 단편이다. 입대 영장이 나오자 화자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 지대의 민박을 찾아가고, 아무 내색 없이 민박 주인인 노인의 일을 도우며 며칠을 보낸다. 어느 날 노인이 낚시나 가자며 화자를 보트에 태워서 캐나다 국경 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화자는 꿈에 그리던 캐나다 땅을 몇 미터 앞둔 상황에서 차마 내리지 못하고 펑펑 울기만 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서 입대한다.
이 단편을 읽은 때가 마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이다 보니, 자국을 벗어나는 국민 가운데 적령기 남성을 골라 징집하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조치로 일부 피난민이 국경에서 가족과 생이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뉴스를 떠올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옳지 않고, 살인은 꺼려지며, 죽음은 두렵지만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의한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체념했던 화자의 심리며 행동은 과연 옳았다고 해야 맞을까?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이처럼 베트남 전쟁을 다룬 20여 편의 연작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으며, 하나하나 독립적인 작품이면서도 인물과 사건이 반복 등장하는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나귀님은 이 단편집을 거의 1년에 걸쳐 한 편씩 띄엄띄엄 읽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그런 유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서술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연작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전통적인 서술 방식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때로는 앞의 단편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인물이 뒤의 단편에 등장해서 화자(소설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화자(소설가)가 이 소설들이 실화인지 허구인지를 자문자답하기도 한다. 자서전까지는 아니므로 100퍼센트 진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자가 짧은 삽화를 통해 반복해서 강조하듯 이 책의 내용은 실화이면서 허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법하다.
그나저나 섬과달이라는 출판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팀 오브라이언의 책을 한 권도 아니고 무려 네 권이나 간행했다. 지금까지 간행한 책이 모두 일곱 권이니 무려 절반 이상을 한 작가에 할애한 셈이다. 어지간히 큰 출판사도 한 작가에게 충성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인데,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아 보이는 신생 출판사에서 국내에서는 인지도도 높지 않은 외국 작가에게 이처럼 열심인 것은 특이한 일이다. 번역자 겸 발행인이 이 작가의 광팬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유야 어쨌거나 그 덕분에 좋은 작가의 작품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가만 보니 섬과달의 나머지 간행서들도 흔히 말하는 최근의 화제작과는 살짝 거리가 멀고 오히려 조금 세월이 지난 것들인데, 만약에 팀 오브라이언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만 간과되어 왔던 작가를 국내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이 출판사의 목표라면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워커 퍼시까지 간행한 것만 보아도 출판사의 선구안은 훌륭해 보인다.
워커 퍼시라면 아마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그가 서문을 써준 소설은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느 청년이 소설을 탈고했지만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자, 그 어머니가 무작정 유명 작가인 퍼시를 찾아와 원고를 떠넘기고 평가해 달라고 애원했다. 원고를 의외로 마음에 들어 했던 퍼시의 주선으로 저자 사후 11년 만에 간행되어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지금까지 컬트 클래식으로 통하는 그 작품이 바로 존 케네디 툴의 <바보들의 결탁>이다.
팀 오브라이언에 워커 퍼시라니... 매번 새로운 톨스토이라도 나온 듯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이며 영화화 계획을 광고로 떠들어 대지만 속 빈 강정이 대부분인 요즘 소설에 비해서는 훨씬 더 뛰어난 라인업이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이 출판사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나귀님처럼 막상 거기서 나온 책은 읽지 않고 구판만 중고로 사서 읽은 주제에 뭘 굉장히 아는 척 하는 염치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