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북펀드에서 <미로, 길을 잃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고 흥미가 동했다. 저자는 영국 펭귄 출판사의 편집자 출신이라는데, 미로의 개념과 역사부터 시작해서 이 소재에 매료된 작가와 예술가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잖아도 미로에 관한 책을 몇 권 사다 놓은 나귀님으로서는 흥미로운 자료가 또 하나 생기는 셈이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텍스트 말고 사진 속의 광고 문구를 살펴보니, "미로에 빠진 예술가, 문학가, 철학자"의 명단에 "카프카, 보르헤스, 피카소, 큐브릭, 델 토로, 캐럴"을 열거하고 나서 "미로의 왕 그렉 브라이트"를 덧붙여 놓았다. 그렉 브라이트? 혹시 예전에 사다 놓은 <미로의 책>의 저자가 아닌가 싶어 이전에 찍어 놓은 "책장 사진"을 뒤져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 사람이었다!
책장 사진이 뭔가 하면, 최대한 많이 넣으려고 신국판 단행본 두 권 깊이로 책장을 만들다 보니, 앞에 있는 책들은 기억하기 쉬워도 뒤에 있는 책들은 기억하기 힘들어 가끔씩 앞뒤로 위치를 바꿔주어야 하는데, 맨 아랫칸 책들은 책장 앞에 쌓인 또 다른 책더미 때문에 꺼내기가 쉽지 않다 보니, 가끔 뭐 하나 꺼내 보는 김에 아예 사진으로 찍어 두고 참고하는 거다.
내 기억에 <미로의 책>은 제목 그대로 저자가 창작한 미로를 독자가 풀어보는 퍼즐북이었는데, 권말에는 저자가 직접 땅을 파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초대형 미로를 실제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까지 들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단순한 게임북인 줄로 알고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진성 미로 덕후인 사람이라니 감탄하다 못해 살짝은 징그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 지금은 뭘 하나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의외로 나오는 자료가 많지 않았다. 알고 보니 1970년대에 혜성같이 나타나서 미로업계(?)를 대대적으로 혁신하고 홀연히 사라졌으며, 이후 종적이 밝혀지지 않아 지금은 사실상 전설에 가까운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런 그를 수십 년 만에 찾아내 인터뷰한 사람이 바로 이번 책의 저자라는 거다.
즉 저자가 미로에 대한 책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그렉 브라이트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도통 실마리를 잡을 수 없어 안타까워했는데, 하루는 펭귄 출판사 책에 대해 문의하는 독자 편지가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기에 뜯어보니, 세상에, 그걸 보낸 사람이 바로 '그' 그렉 브라이트 본인이었다는 거다. 이후 엘리엇은 브라이트의 집을 찾아가 인터뷰를 수행했다고 한다.
1951년생으로 인터뷰 당시 60대였던 그렉 브라이트는 여전히 미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건재했다던데, 갑자기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한 이유며 근황에 대해서는 엘리엇의 책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는 모양이다. 여하간 이쯤 되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책더미를 헤치고 책장 맨 아래칸 구석에 꽂혀 있던 <미로의 책>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았다!
정확한 제목은 <그렉 브라이트의 미로의 책: 모두가 즐기는 퍼즐>(편집부 옮김, 우신사, 1983)이고, 원서의 제목은 GREG BRIGHT'S MAZE BOOK: PUZZLES FOR EVERYONE(1974)이며, 인명 표기의 오류로 미루어 일어중역본으로 보인다. 제목처럼 저자가 제작한 30여 종의 미로 퍼즐을 풀어볼 수 있는 책이며, 권말의 사진과 해설은 1971년에 제작한 "참호 미로"를 보여준다.
원래는 펜 대신 사용할 "대나무 바늘"이 가름끈에 달려 있었다던데, 나귀님이 중고로 산 책에는 바늘이 떨어져 나가고 가름끈만 남았다. 하지만 함께 첨부된 "투명지"(습자지) 두 장은 아직 들어 있다. 가급적 대나무 막대기로만 미로를 풀어 보게 하고, 굳이 펜을 사용하고 싶으면 미로를 덮은 습자지에다가 대신 그리라는 것이니, 역시나 미로 덕후다운 배려심이라 하겠다.
흥미롭게도 32번째 미로는 "미로 제작용 기본 패턴"이기 때문에, 이 페이지를 복사해 상하좌우로 덧붙이면 더 커다란 미로를 계속 만들 수 있다. 그의 독창적인 발상으로 간주되는 "구멍 뚫린 미로", 즉 곳곳에 난 구멍을 통해 앞뒷면을 오가며 푸는 양면 미로도 하나 수록되었는데, 어째서인지 일련번호는 매겨지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는 33종의 미로가 들어 있는 셈이다.
북펀드에 올라온 출판사의 소개 글에도 나와 있듯이, 미로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고 널리 퍼진 상징물이다. 오늘날에는 단순한 놀이로 여겨지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의외로 심오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저 보기에 예쁘고 신비로운 장식 미술의 일종인 것 같다가도, 누구나 경험하게 마련인 인생의 여정이나 심지어 영혼의 여정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신의학자 융은 평소에 미로와 유사한 만다라를 그리는 취미가 있었고, 스위스 호반의 자택 볼링엔도 손수 지었다고 전한다. 미로를 종이에만 그리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땅을 파서 구현하기까지 했던 그렉 브라이트의 행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자아를 탐색/실현하는 과정의 일종은 아니었을까. 마치 나귀님이 아직도 종종 레트로 미로 게임 "로드러너"를 즐기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