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중에 웨이드 데이비스의 책이 있기에 이 양반, 아직 안 돌아가셨나 싶어서 살짝 신기했다. 대표작이 어쩌다 보니 아이티 좀비의 실존 가능성을 연구한 <뱀과 무지개>(번역서 제목은 지나치게 노골적인 <나는 좀비를 만났다>)이기 때문인지, 살짝 사이비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책이야 여러 권 사 놓고도 외면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들춰봐야 하려나 싶다.


좀비라고 하면 지금은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이래로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형상화된 식인 괴물을 떠올리기가 쉽지만, 그 원산지(?)인 아이티의 좀비는 오늘날 유행하는 그런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알고 있다. 즉 인간이기는 해도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과정에서 사고력을 상실하는 바람에 로봇처럼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서 각종 노역을 떠맡는다.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아이티 좀비의 본질이 약물 중독을 통한 인위적 퇴행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즉 멀쩡한 사람에게 독극물을 주입해서 가사 상태로 만든 다음, 매장된 사람을 꺼내 해독제를 투여해서 살려내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멀쩡해지지는 않도록 독극물을 꾸준히 주입하면, 그 사람은 약에 취해 비몽사몽해진 상태에서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좀비를 만났다>는 데이비스가 실제로 아이티에 가서 좀비 전설의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이다. 다만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또는 믿거나말거나 싶은 내용의 책이 항상 그렇듯이, 확실한 증거를 파악해서 반박불가능하게 확답을 얻어낸 것까지는 아니고, 막판에 가서는 이런저런 차질과 문제로 인해 흐지부지 애매하게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데이비스의 책을 훗날 웨스 크레이븐이 영화로도 각색했는데, 이게 좀비 영화인지 드라큘라 영화인지 판가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워낙 싼티 나는 포스터이다 보니 공포 영화에 관심 많은 나귀님도 선뜻 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저자의 이름에 '서양 강시선생'이라는 별명을 자연스럽게 결부시켰던 것도 아마 그 영화 포스터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한때 홍콩 영화의 인기 장르 가운데 하나였던 강시 영화는 오늘날 거의 맥이 끊기지 않았나 싶은데, 처음에만 해도 쿵푸와 공포의 조합으로 상당히 큰 인기를 끌었다고 알고 있다. 이 시리즈의 주역은 도사님으로 나온 임정영이란 배우이지만, 그 원조는 몇 작품을 직접 감독까지 했던 홍금보라고 알고 있으며, 그 최초는 그가 주연한 <귀타귀>라는 영화라고 알고 있다.


얼마 전 <파묘>라는 영화가 한국의 무속 신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인기를 끌었다는데, 거기서 핵심 장치로 나온 맨살에 경문 써넣기 역시 <귀타귀> 시리즈 가운데 하나에서 이미 사용된 바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 담벼락에 붙은 숱한 포스터 가운데 하나에서 홍금보가 온 몸에 이상한 글자를 적은 모습으로 나온 것을 보고 상당히 기괴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야만인 코난>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데, 물론 퇴마용 방어책으로서의 불경이나 부적 써넣기는 일본 괴담 "귀 없는 호이치"가 원조일 듯하다. 장님 악사 호이치가 밤마다 공동묘지로 불려가 귀신들 앞에서 공연하자, 스님이 맨몸에 불경을 적어서 귀신의 눈에 안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깜박 잊고 귀에는 글자를 적지 않는 바람에 귀신에게 귀를 뜯겼다는 것이다.


웨이드 데이비스의 다른 저서를 보면 이른바 비서구 문명의 각종 전승을 재해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앞서 설명한 좀비 연구도 어쩌면 유사한 맥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연구를 놓고 숱한 논란과 비판이 제기된 것을 보면, 20세기에 동양의 영성이며 비서구의 지혜며를 추구한 다른 연구자들처럼 그 역시 살짝 균형을 잃지는 않았었나 싶기도 하다.



[*] 그나저나 웨이드 데이비스의 신간을 펴낸 아고라 출판사는 레닌 전집을 간행하다 말고 한동안 책을 내지 않는 것 같더니만 뜬금없이 강시선생 책이니, 이건 또 무슨 조홧속인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고전 공상과학소설 시리즈를 내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 다시 살펴보니 그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인 것을 보니, 결국 여기서는 레닌을 공상과학소설의 대표 작가 가운데 한 명 정도로 보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레닌 전집도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만, 진짜로 아까운 것은 그 공상과학소설 시리즈이다. 이번 기회에 시리즈 재간이나 속간을 한 번 기대해 보고 싶다. 필요하다면 레닌이나, 아니면 마르크스 책을 한두 권 슬쩍 집어넣어도 모른 척 해줄 의향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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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의도했던 것까지는 아니었고 어찌어찌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던 일종의 꼬리물기 글을 계속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궁리해 보니, 어찌어찌 아시모프와 어슐러 르귄을 거쳐 레비스트로스까지는 (어쩌면 그 이후에도 저 유명한 청바지 회사 창업주까지는) 쉽게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귄과 레비스트로스의 관계라면 전자의 아버지 장례를 후자가 치렀다는 일화가 가장 흥미로운데, 저 SF 작가가 이름 중간에 K라는 약자로만 표기하는 본래 성 '크로버'의 유래인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 부부가 (즉 르귄의 엄마아빠가) 파리에 가서 레비스트로스의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 디디에 에리봉과의 대담집에서 언급했던 것 같은데, 거기서는 급사한 인류학자를 목격한 일화가 무려 두 가지나 나와서 나귀님도 지난번에는 살짝 혼동했었다. 즉 강연 도중에 사망한 사람은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였고, 크로버는 다음날 만나기로 해놓고 밤사이에 호텔에서 사망했던 거다.


결국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졸지에 남편을 잃고 어쩔 줄 모르는 크로버 부인을 대신하여 레비스트로스가 각종 수속을 비롯해서 장례 절차를 밟아주었다는 것인데, 당시 어슐러는 이미 결혼하고 대학 교수였던 남편을 따라 제2의 고향이 된 포틀랜드에 정착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시모프와 르귄의 연결 고리는 무엇인가? 두 사람 모두 장기간 활동하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SF 작가라는 공통점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나귀님으로서는 지난번에 르귄의 에세이 가운데 하나에서 아시모프를 '냉전 사고방식의 수괴' 정도로 폄하한 대목이 문득 기억났던 거다.


최근 르귄의 에세이가 줄줄이 번역되기에 눈에 띄는 대로 사다 놓고 뒤적이다가 발견한 내용이었는데, 지금 막상 찾아보니 그 책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구글링해 보니 아마도 고양이 표지의 <남겨둘 것이 없답니다>에 수록된 "너무 필요한 문학상"의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르귄의 말에 따르면 냉전이 한창인 1977년에 미국 공상과학작가협회(SFWA)에서 폴란드 작가인 스타니스와프 렘에게 수여했던 명예 회원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반발한 르귄이 그 단체에서 수여하는 네뷸러상 중편 부문에 제출된 자기 작품의 출품을 철회하겠다고 맞섰다는 것이다.


뒤늦게 협회에서는 출품 철회를 번복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르귄의 태도가 워낙 요지부동이어서 결국 (그녀의 표현 그대로) "냉전 전사들의 수괴인 아시모프"의 차점작이 수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그 차점작이 아시모프의 대표작이며 영화화로도 유명해진 "200세를 맞이한 남자"이다.


그런데 아시모프를 냉전의 기수나 대변자로 폄하한 르귄의 태도를 놓고서는 해외의 SF 팬들 사이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아시모프로 말하자면 평생 자유주의자에 민주당 지지자였으며, 심지어 SF 작가들의 베트남전 반대 성명 등에서도 르귄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니까.


렘의 협회 축출도 사실은 르귄이며 렘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하지만 환각제 남용으로 음모론과 편집증에 사로잡혀 두 사람 모두를 괴롭혔던) PK 딕 등이 주동자였을 뿐 아시모프와는 전혀 상관 없었다는 지적도 있으니, 이래저래 르귄이 에세이에서 아시모프를 폄하한 의도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물론 이 사건을 나름대로 분석한 해외 SF 팬들도 지적했듯이, 렘의 축출과 르귄의 철회와 아시모프의 수상을 둘러싼 과거사를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최종 평가인지 반쪽 진실인지 모를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놓은 르귄이 현재로서는 최종 승자인 듯 보일 뿐이다. 




[*]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다음 차례인 "어슐러 르귄 대신 장례를 치른 레비스트로스"의 내용을 여기서 이미 쓰고 말았으니 시리즈는 일단 마무리하는 게 낫겠다.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서 계속 해볼까 싶기도 하지만 그냥 귀찮아서.... 사실은 어슐러 르귄 책만 찾았어도 아마 계속 할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또 말고, 뭐, 그렇기도 하고... 만사귀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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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바깥양반이 보는 미드 <영 셸던>에서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름이 나오기에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 곁눈질했더니, 주인공인 천재 (커서는 괴짜) 소년이 아시모프의 부고를 접하고 나서 자기 주위에 이 유명한 공상과학 소설가 겸 과학 저술가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문득 나귀님 역시 아시모프의 부고를 접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AFKN 라디오에서 매시 정각에 1분쯤 나오는 AP 네트워크 뉴스를 듣다가 그의 타계 소식이 나오기에 깜짝 놀라서 공상과학 소설 좋아하는 친구에게 전화하려던 차에, 마침 무슨 일 때문에 집집마다 전화 돌리던 교회 후배의 전화를 받고서 난감했나 그랬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있으니 클릭 한 번으로 부고를 접하거나 전달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전화나 편지밖에 방법이 없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저런 세상에서 잘도 살았구나 싶기도 하다. 그런 아날로그 시대에 갖가지 공상과학 소설을 쓴 아시모프의 상상력이 새삼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마침 어제 뒤적인 윌리엄 파운드스톤의 책에는 칼 세이건과 아이작 아시모프의 만남과 교제에 관한 내용이 몇 가지 수록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으니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법도 하다. 첫 만남은 1963년, 세이건이 27세이고 아시모프가 43세 때의 일이었다.


아시모프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컴퓨터 과학자 마빈 민스키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이건을 만나고 나니 이제 '두 명'이라 해야 맞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상대방을 후하게 평가해 주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되어 1968년 세이건의 재혼 당시 아시모프도 하객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이때 아시모프의 신경을 긁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손님보다 더 잘난 아들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던 신랑의 어머니였다. 이 양반으로 말하자면 일찍이 당신 아들 못지않게 똑똑했던 며느리에게 '졸업 일주일 만에 학사에서 유부녀라'는 비야냥인지 위로인지 모를 전보를 결혼식 당일에 보내기도 했었다.


세이건의 어머니는 아직 40대 후반이었던 아시모프에게 다짜고짜 손자들의 안부를 물었고, 당황한 아시모프가 아직 자기는 손자를 두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손자를 두는 게 뭐 어때서 그러느냐고 동문서답을 이어나갔다. 이에 아시모프가 발끈하자, 결국 그의 아내가 나서서 남편을 데리고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는 거다.


필립 로스 같은 유대계 작가의 소설에 묘사된 유대인 어머니를 보면 정말 민폐스러울 정도로 억척스럽게 묘사되는데, 세이건의 어머니도 딱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아시모프도 유대계인 만큼 자기 집에 가면 엄마한테 똑같이 당했을 법하니... 어쩌면 자기 엄마가 생각나서 더 짜증났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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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자 행성>은 "린 마굴리스가 들려주는 공생 진화의 비밀"이라는 부제처럼 과학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제2장에서는 기존 견해와 다른 이단적 발상을 떠올린 계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회고가 적잖이 곁들여지고 있다. 대표적인 일화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상의 없이 학교를 바꾼 것,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칼 세이건과 사귀고 결국 결혼한 것이다.


학교 이야기는 뭔가 하면, 원래 공립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에 사립학교인 시카고 대학 부설학교로 전학했는데, 어째서인지 적응하지 못한 끝에 8학년을 마치고 예전에 다니던 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돌하게도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재학 중인 학교나 새로 다닌 학교 양쪽에도 자신의 상황을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후 공립학교에서 이 사실을 먼저 알아내는 바람에 여차 하면 학교를 못 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읍소 끝에 결국 9학년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다. 본인의 말마따나 학교에 다니며 연애질에만 몰두한 까닭인지 오히려 성적은 예전보다 떨어졌다 하지만, 원체 신동이어서 14세에 대학에 들어가 3년 반 만에 학사 학위와 남편을 모두 얻어가지고 조기 졸업했다.


여기서 말하는 남편이 바로 <코스모스>의 저자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인데, 연애 중에나 결혼 후에도 줄기차게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만남에 대한 린 마굴리스의 회고에는 마치 무슨 영화나 애니의 한 장면 같은 애틋한 느낌도 없지 않다. "어느 날 수학 강의동인 에크하르트홀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나는 말 그대로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 "학우이자 신예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을 늘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니던 그는 키가 크고 멋있었으며 말을 유창하게 잘했다. (...)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세이건은 이제 막 천문학자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물리학과 대학원 학생이었고, 나는 그저 조급하고 열정적이며 무지한 소녀에 불과했다."(<공생자 행성>, 40쪽) <<<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지만, 천재인만큼 허세가 있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세이건과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신 아들이 천재인 것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당신 며느리가 천재인 것까지는 굳이 바라지 않았던 시어머니 역시 부부 관계에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린 마굴리스는 결혼 8년 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두 아이와 함께 남편 곁을 떠났다.



>>> "칼,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야. 나는 당신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당신이 진짜 성숙한 사랑을 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 하지만 나하고는 안 돼.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어. (...) 당신의 직업적, 사회적 성공에서 엄청난 기쁨을 얻을 여자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당신의 발전을 통해 내 자아를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나의 영원한 비극일 거야. 당신은 바로 그런 아내를 바라는 거니까."(<칼 세이건: 코스모스를 향한 열정>, 134쪽) <<<



1967년에 그녀는 결정학자 토머스 마굴리스와 재혼했지만 1980년에 또다시 이혼했다.('마굴리스'라는 성은 재혼의 결과물이다). "나는 아내라는 직업을 두 번이나 때려치워 봤어요. 좋은 아내 겸 좋은 엄마 겸 1급 과학자가 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지가 않아요.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뭔가를 희생해야만 하죠." 두 번의 결혼 체험에 대한 그녀의 평가다.


이쯤 되면 '나쁜 남자' 겸 '나쁜 남편' 칼 세이건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린 마굴리스와의 관계가 불구대천의 지경으로 번지지는 않은 듯, 과학자에게는 큰 영예인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의 회원 선발 과정에서 '지나치게 대중적'이라는 편견으로 전남편이 고배를 마시자, 이미 회원이었던 전처가 다음과 같은 위로 편지를 쓰기도 했다.



>>> "그들은 당신의 소통 기술, 매력, 좋은 외모, 뛰어난 외모와 특히 핵겨울을 질투해. 마누라에게 꼭 잡힌, 그렇게 높은 비율의 순응주의자들은 내 생각에 세 아내와 다섯 아이들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 신다윈주의적 용어로 말하자면 당신은 적응력이 너무 뛰어난 것이지. (...) 요약하면 당신은 여러 해 전에 이미 국립과학아카데미에 선출될 수 있었고, 아직도 그래. 당신을 넣어주지 않은 것은 인간의 가장 고약한 허약함, 곧 질투심이야."(<칼 세이건: 코스모스를 향한 열정>, 621쪽) <<<



세이건은 이 편지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때가 1992년으로 이혼한 지 사반세기가 넘은 뒤였으니 두 사람의 성격도 이전보다는 좀 더 누그러져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번번이 인습을 따르지 않고 이단적 견해를 지지했던 평소의 성격처럼 린 마굴리스가 이 방면에서도 성격 차이로 이혼한 부부의 일반적인 경우를 굳이 따르지 않기로 작정해서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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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에밀리 디킨슨 이야기를 꺼냈으니 결국 린 마굴리스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다. 시인과 생물학자라는 직업상 영 무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만남은 1988년에 마굴리스가 매사추세츠 대학 애머스트 캠퍼스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살게 된 집의 바로 옆집이 디킨슨의 생가 겸 박물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굴리스는 이웃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디킨슨의 시에 푹 빠져들었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에 간행한 <공생자 행성>에서는 각 장의 서두에 디킨슨의 시를 인용할 정도가 되었다. 사후에 간행된 기념 문집 <린 마굴리스>에도 "에밀리 디킨슨의 이웃"이라는 제목으로 테리 Y. 앨런의 회고가 수록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앨런의 증언에 따르면 마굴리스는 디킨슨에게 푹 빠진 나머지 갖가지 "이단적인" 주장까지도 기꺼이 포용하고 말았다. 즉 평생 독신이었던 저 여성 시인이 "주인님"이라 지칭한 남자에 대한 주장은 물론이고, 그녀의 시가 은밀한 성생활에 대한 암호화 기록이라는 주장까지도 옹호하며 출판까지 주선했던 것이다.


이렇게 파격을 좋아하다 못해 종종 무리수를 두는 것이야말로 린 마굴리스의 평소 성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업적으로 간주되는 세포의 공생 발생 이론이라든지, (제임스 러브록과의 공동 연구로 탄생한) 가이아 이론 역시 오늘날에는 상식처럼 되었지만 처음에만 해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이단적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 에이즈 부정론이라든지 9/11 음모론에 대해서까지도 찬동했다는 (심지어 기념 문집에 유일하게 수록된 마굴리스 본인의 글 역시 일각의 9/11 음모론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념 문집에 나온 또 다른 지인의 증언처럼 남성성과 여성성과 페미니즘을 죄다 싫어했고, 쿠바의 카스트로는 칭찬해도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싫어했으며, 웬델 베리의 강연을 듣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결국 서로 친해졌다는 등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보면,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 맞았던 것도 같다.


다만 만사를 편 가르는 데 익숙해진 지금의 관점에서 그녀의 행동은 마치 좌충우돌처럼, 또는 모두에게 미움받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치 작은 개체가 큰 덩어리를 이루어 생존한다는 점에서 공생의 좋은 사례라며 그녀가 사망 직전까지 각별히 애호했다는 큰빗이끼벌레가 한때 모두의 미움을 받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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