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락의 에세이를 보니, 1970년대에 박정희가 외화 획득을 위해서 기생 관광을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언급이 있다. 즉 화대를 1인당 60달러로 공식 책정하고, 관광 요정에 관대한 처우를 베풀었으며, 심지어 저축을 많이 한 기생들에게 퇴역식까지 열어주기도 하면서 성매매 산업을 관리했다는 것이다.
이때 최중락을 비롯한 경찰의 역할은 기생 관광의 질서 유지를 위해 여행사와 요정과 호텔 등의 관련자들이 화대 가운데 일부를 착취하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의 관광 요정 11개소(교북동 풍림각, 종로 3가 대하와 청풍, 성북동 삼청각 등)에는 기생 수만 3000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급기야 기생의 친절 서비스와 위생 관리(성병 예방)를 위해서 현직 의사는 물론이고 <수사반장>의 주인공 최불암까지 동반해서 강연을 다닌 끝에, 책임자였던 최중락은 "관광 산업" 진흥 공로로 표창까지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광부와 간호사까지 수출할 만큼 가난했던 나라 시절의 서글픈 일화라고나 할까.
일본인의 한국 기생 관광은 실제로 과거에만 해도 종종 사회 문제로 지적된 바 있었다. 88년 올림픽 이전까지는 굳이 한국을 찾는 외국인 자체가 드물었으니, 정부에서도 실상을 알면서도 묵인했을 법하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외교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과거사다.
그러다가 경제 상황이 나아지며 해외 여행이 쉬워지자, 이제는 한국인도 동남아시아 등지로 성매매 목적의 관광을 다녀오는 모양이니, 역사란 결국 반복되고 악행은 다시 모방되나 싶은 느낌도 없지 않다. 따지고 보면 가라유키상의 해외 원정 성매매로 외화를 벌어들였던 일본이야말로 기생 관광의 원조니까.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어느 후보의 과거 발언 중에 육이오 당시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이 제자들을 성 상납에 동원했다는 내용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아마도 모윤숙 등이 조직한 낙랑 클럽이라는 것을 가리켜 한 말인 듯한데, 관련자들은 어디까지나 품위 있는 사교 클럽이었다고 주장하여 증언이 엇갈린다.
다만 교양 있는 여대생을 모아서 건전한 의미의 접대에 집중했다 하더라도, 피차 청춘 남녀들인데다가 전쟁 중이라서 생활이 궁핍했음을 감안하면, 단순한 사교적 만남 이상의 깊은 관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인다. <빨간 마후라>와 <마부>에 나온 영화배우 윤인자의 사례가 딱 그러했다.
말년의 회고록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에서 밝혔듯이, 윤인자는 피난지 부산에서 해군 제독 손원일의 소개로 미 해군 장교 마이클 J. 루시(Micheal J. Luosey, 1912-1998)를 만났다. 이후 그녀는 손 제독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루시와 계속 교제하면서 한국군에 유리하게끔 일종의 로비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손원일의 부인 홍은혜가 모윤숙과 함께 낙랑 클럽의 핵심이고, 윤-루시 커플이 손-홍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음으로 미루어, 윤인자의 활동 역시 넓게 보면 낙랑 클럽과 연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접대에 동원된 사람 가운데 최소한 한 명은 미군의 애인, 또는 현지처 노릇을 했던 셈이다.
물론 윤인자의 사례 하나만 가지고 낙랑 클럽 전체를 위안부나 양공주라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보면 단순히 "사교"나 "외교"나 "로비"라는 단어만으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는 더 깊은 관계의 발전 가능성이 (아울러 국가 차원의 적극적 개입이) 있었음을 아주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전시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 보자면, 지금 와서 그들의 활동을 "성 상납"이나 "몸 로비"라고 단정하기는 조심스러워진다. 훗날 박정희의 기생 관광 묵인 및 활용이 부도덕하나 부득이했던 외화 벌이 수단이었던 것처럼, 낙랑 클럽의 활동 역시 당시의 맥락에서 상황을 참작할 여지가 있지는 않을까?
윤인자의 "로비" 상대였던 루시 대령은 훗날 "한국 해군의 은인"으로 추앙되어 2017년에 해군사관학교에 흉상이 놓였다. 반면 한때 이승만으로부터 "당신의 대한의 꽃"이라는 찬사를 얻었던 윤인자에 대해서는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루시가 은인이라고 치면, 윤인자는 뭐였다고 평가해야 맞을까?
이 대목에서 문득 (모파상의 "비곗덩어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희랍인 조르바>의 여관 주인 오르탕스가 생각난다. 프랑스인인 그녀는 젊은 시절 크레타를 위협하던 4개국 전함의 함장들과 번갈아 잠자리를 같이 하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에게 피해가 없도록 나름의 로비 활동을 벌였다.
"내가 이탈리아 사람에게 말했어요. 그가 제일 용기가 있었거든요. 그의 수염을 만지면서 말했죠. '카나바로.' 그게 그의 이름이었죠. '나의 사랑하는 카나바로, 쾅! 쾅! 하지 말아요. 제발 쾅쾅! 하지 마세요.'
내가 몇 번이나 크레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줬는지 아세요? 얼마나 많은 대포들이 준비되었고, 그때마다 내가 '째독' 수염을 붙잡고 쾅쾅 하지 못하게 한 줄이나 아세요? 하지만 누가 내게 고마워나 하나요? 당신들은 훈장을 본 적이 있겠지만, 나는 본 적도..."
마담 오르탕스는 사람들의 배은망덕에 화가 나서 부드럽고 주름이 많은 조그만 주먹으로 식탁을 때렸다.
(유재원 번역본, 78-79쪽)
크레타 출신도 아닌 외국인이 이웃들을 생각해 호의를 베푼 것은 갸륵한 일이었지만, 소설에서는 외국 전함이 떠난 뒤에 섬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가벼운 여자 취급을 받고 멸시당하며 살아갔다고 묘사된다. 어쩐지 그녀의 삶이야말로 앞에서 말한 여러 "그녀들"의 삶의 축소판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