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의 일치로 <맹자>에 나오는 소/양 교체와 백성/사직/임금 관련 인용문을 연이어 접하고 나니, 그 책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예전 명문당의 단권본 사서삼경에 수록된 번역으로 읽다 보니 문득 최근의 번역은 어떤가 궁금해서 검색한 결과, 마침 책세상 고전문고 가운데 하나인 <맹자>를 이미 갖고 있음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번역자는 정치사상사 연구자라 하는데 (비록 일부 역주에서는 살짝 의문도 없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무난하고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듯하다. 책세상 고전문고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역주와 해설 외에도 참고 자료를 여럿 추천해 두었다는 점인데, <맹자>에서는 이미 갖고 있는 김승혜의 <원시유교>와 소공권의 <중국정치사상사>를 언급한 점이 흥미로웠다.
소공권의 책을 보니 맹자와 순자를 한 장에 엮어서 설명했는데, 비록 맹자의 사상에 파격적으로 민주주의의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이므로 과대평가는 금물이며, 아울러 전국 시대 말기의 혼란한 정치 상황이라는 배경을 감안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매우 지당한 주장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유독 흥미로운 점은 역자 서문에서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최명이 공역자인 서원대 정치학과 전 교수 손문호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었다. 즉 본래 최 교수가 1부만 번역해서 간행했던 것을 손 교수의 협조로 2부까지 완역하게 되었는데, 출간 직전에 손 교수가 당시 몸담고 있던 서원대 재단 비리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해직되었다는 이야기다.
최 교수는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의연했던 손 교수의 모습에 감탄한 듯 "정의가 결국은 승리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사상의 역사가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손문호 교수의 조속한 복직을 바라면서"라고 역자 후기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내가 가진 책은 무려 사반세기 전인 1998년 초판이어서, 혹시 손 교수 관련 후일담이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서원대는 원래 청주사범대학이었던 학교가 1988년에 이름을 바꾸며 생겼는데, 이후 20년간 총장 8명이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흑역사를 겪었다. 특히 1998년에 전직 이사장이 학교 재산을 횡령해서 국외 도피에까지 나섰던 사건이 절정이라 할 만했는데, 아마도 손 교수가 재단 비리와 싸우다가 해직되었다는 사건도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지금 와서 '서원대 + 손문호'로 검색해 보니 희한하게도 '전 총장'이라는 직함이 함께 나온다. 알고 보니 2003년에 서원대 재단이 바뀌면서 제9대 총장으로 취임한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48세의 젊은 총장의 등장 자체가 파격이어서 큰 기대를 모았다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재단 영입의 일등공신이어서 선거 없이 지명된 것이 의아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후의 관련 기사를 보면 애초의 큰 기대는 금세 사라져 버리고 혼탁한 상황이 펼쳐진 듯하다. 2006년에 교수회에서 총장 사퇴 결의안이 통과되며 또 갈등이 시작되었고, 2007년에 서원대 역사상 최초로 총장 임기를 완주하고 평교수로 돌아갔지만, 2008년에는 이사장의 공금 횡령 혐의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고, 결국 2011년에 재차 파면되었다.
이후 소송을 제기한 모양이지만, 2012년에 파면 처분은 정당하다는 고등법원 판결이 나왔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관련 보도는 찾을 수 없었다. 이후 조선 시대 문인들의 서한을 엮은 편역서를 한 권 내놓은 모양인데, 거기 나온 저자 약력을 보니 고향 경주에 머무르면서 한문을 가르치고 집필 작업을 한다는 등 교직과는 거리를 둔 채로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구체적인 맥락이며 사정까지는 모르는 상태이지만, 여러 언론 기사를 통해 드러난 바를 가지고 판단하자면, 한때나마 사학 비리에 맞서 싸우던 사람이 훗날 또 다른 사학 비리에 관여해서 체면이 실추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첫 번째 해직에 대해 항변하는 동료 학자의 말이 고전 명저의 역자 서문에까지 박제된 상황이니 더 민망스럽지 않겠나.
소공권의 <중국정치사상사>는 그 분야의 명저답게 사반세기 뒤인 지금까지도 (무려 원래 정가의 2배 가격으로 가격이 인상되어) 여전히 간행 중인데, 과연 초판 역자 후기에서 최 교수가 손 교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학교의 위상과는 상반되게 허술하기로 소문난 그 대학 출판부의 성격상 수정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