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디스 슈클라의 책을 구입한 것은 문재인 정권 당시 이른바 조국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법무부 장관 내정 직후 각종 의혹이 쏟아졌는데도, 과거의 자신만만하던 모습과는 달리 기자 회견이며 인사 청문회에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그의 위선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라딘 중고샵에서 <일상의 악덕>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무려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인간혐오처럼 사소하지만 짜증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기에 지금 상황에서 딱 읽기 좋은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니 내 예상과는 영 다른 내용이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슈클라는 일상의 악덕을 너무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었다. 위선과 속물근성은 짜증을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지만, 거기에만 집착하다 보면 인간혐오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결과 푸틴이나 트럼프처럼 화끈하지만 실상은 잔혹한 인물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논문 제목이기도 한 "잔혹성을 우선시하기"라는 원칙을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이것이야말로 "두려움을 토대로 삼는 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원칙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위선 같은 사소한 악덕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다 보면, 자칫 잔혹성이란 큰 악덕을 과소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잔혹성을 우선시하기"는 몽테뉴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살벌했던 시기 중 하나였던 종교 전쟁 당시에 살았음을 감안하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할 수 있는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잔인무도한 성격이기보다는 차라리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성격에 그치기 바란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물론 위선과 속물근성이라고 해서 항상 받아들이기가 더 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더욱 분노와 환멸을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 주디스 슈클라라고 해서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으로 상황이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었는데, 이후 지금까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슈클라의 주장이 지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지난 한국 대선이며 최근 미국 대선을 보아도 현 정부와 여당의 무능과 위선과 변명에 질색한 유권자가 오히려 직설적 말투와 과감한 행동이 돋보이는 다른 후보를 선택했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당선된 윤석열과 트럼프 같은 인물이 알고 보면 무지막지하게 잔혹한 성격이어서, 각자의 실책에 대해서 위선적인 변명조차 거부하고 도리어 무력 대응까지 불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두 대통령 모두 탄핵의 위기에 지지자를 부추겨 법원과 의회 같은 헌법기관을 공격하는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입증한 상태다.
푸틴도 마찬가지인데, 옐친 정부에서 정보 기관 출신의 무명 관료였던 그가 갑작스레 대권을 잡게 된 것 역시 이전 정부의 무능과 부패와 위선과는 무관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차례 과감한 조치로 화끈한 성격을 드러낸 것 역시 대중에게는 열광 요소였을지 몰라도, 결국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전세계를 고통에 빠트렸다.
하지만 슈클라의 "잔혹성을 우선시하기" 원칙에는 뚜렷한 한계도 있으니, 누가 잔혹한지 아닌지를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선택한 유권자는 불과 수년 뒤에 비상 계엄이나 법원 습격이 벌어질 줄 미리 알았을까? 아마 그때 이재명을 선택한 사람조차도 이것까진 몰랐으리라.
거꾸로 지난 대선에서 잔혹하다는 인상을 준 인물은 윤석열이 아니라 오히려 이재명이었다. 그간 제기된 각종 의혹을 통해 위선을 넘어 잔혹성까지도 그 속성으로 간주되다 보니, 로봇 개를 밀쳐 넘어트리는 시연조차 부정적인 여론을 자아낼 정도로 나쁜 인상이 각인되어 결과적으로는 대선 패배라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지난 대선이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평가를 얻은 것도 양대 후보 모두가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같은 일상의 악덕에 모조리 연루된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이었을 법하다. 그 결과만 놓고 보면 최우선적으로는 정권 심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어찌 보면 그 시점까지 부정적인 면모가 비교적 덜 드러난 인물이 승리한 셈이다.
따라서 "잔혹성을 우선시하기" 원칙도 현실에서 깔끔히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당장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거대 양당 모두 현재 상황에서는 강성 후보의 등판 가능성이 크니, 누구를 뽑더라도 잔혹성은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하는 부담이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선거가 아니라 도박이라 해야 하지 않을지...
[*] <일상의 악덕>은 현재 절판인데, 비전공자 번역인 관계로 해설부터 핵심을 짚지 못하고 두루뭉실한 편이고 오역도 없지 않으니, 재판을 간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번역자를 교체해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는 편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