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두껍의 첫 수업 창비아동문고 254
김기정 지음, 허구 그림 / 창비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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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만나는 공상 세계

《금두껍의 첫 수업》을 읽으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상 세계로 들어가는 점이 우선 눈에 띄었다. 공상을 현실의 도피처로 이용한다든지 교훈적인 주제를 펼치는 도구로 삼지 않아서 좋았다.

<금두껍의 첫 수업>(이하 <금두껍>)에서 주인공 검지는 학교 가는 길에 처음 두꺼비를 만나서 가방에 넣어 데리고 간다. 이튿날 다시 늪에서 두꺼비를 만났을 때 두꺼비가 난데없이 사람 말을 하지만, 이때는 이미 검지에게 두꺼비는 친숙한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말하는 두꺼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두꺼비가 왜 나와야 하는지 어색하지 않고, 공상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도깨비 일기>(이하 <도깨비>)에서는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아이가 일기장을 편 순간에 공상 세계 ― 도깨비가 대신 쓴 일기 ― 가 등장하는 구성이 깔끔하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이야기라 조금 구닥다리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반면 <학교가 사라진 날>(이하 <학교>)에서는 조금 아쉬운 면이 보였다. 노야는 방학 숙제인 일기를 쓰지 않아서 개학날 학교에 가기가 싫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은 나머지, 예전에 선생님한테 들은 요술 주문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공책에 있는 학교 그림을 지우며 주문을 외워 봤다니? 너무 억지스럽지 않은가.


노는 아이들, 놀게 해 주는 어른들

김기정 작품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라는 작가의 굳은 믿음이다. 기존에 발표된 《박뛰엄이 노는 법》, 《뭐 하니? 놀기 딱 좋은 날인데!》 등의 작품 제목에서도 그 점은 뚜렷이 드러난다(물론 작품 속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놀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김기정은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작가의 생각이 작품 곳곳에서 강박으로 작용하는 느낌이 든다.

<금두껍>에서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은 금두껍이 친구들을 선동(?)해서 학교 선생님들이 출근하지 못하게 막는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난 금두껍은 교실을 놀이판으로 바꿔서 아이들을 놀게 해 준다. 뒤늦게 학교에 오는 선생님들이 헉헉대며 하는 말이 재미있다.

그런데 두꺼비들이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만들어 준 상황이 과연 아이들이 정말로 원하는 놀이였을까? 교실이 늪으로 변하고 학교 건물에는 아름드리나무와 폭포가 생기고 아이들은 갖가지 동물로 변해서 뛰논다. 이 부분은 <금두껍>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막상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작품 속에서 말하는 재미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놀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른(여기에서는 두꺼비들)이 한판 놀라고 자리를 만들어주는 식이라는 게 아쉽다.

또, 검지가 학교 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아기를 낳으러 간 담임선생님 대신 새로 올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 게 두려워서다. 두꺼비 선생님들이 벌인 한바탕 소동이 끝나도 검지의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을 텐데, 과연 검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도깨비>의 주인공 사내아이는 늘 심심하다. 일기도 억지로 지어내야 써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일기장 속에서 도깨비들이 나타나 교실 안의 비밀을 알려 준다. 담임선생님의 방귀 뀌는 버릇, 아이들이 몰래 숨겨서 가지고 있는 동물과 잡동사니,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야단하는 교장 선생님이 실은 예전에 말썽꾸러기였다는 사실 등. 그 후로 아이는 내일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감에 차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한다. 일기장을 통한 도깨비의 제보(!)가 없었어도 아이는 학교에서 한바탕 놀 수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고 아닐 것 같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그런 고민이 조금 덜하다. 어쨌든 노야가 만들어 낸 텅 빈 학교 자리, 또 새로 생긴 학교에서 아이들은 즐겁게 뛰어 놀았다. 노야 또한 사라졌던 학교가 돌아왔다는 즐거움으로 일기를 쓰지 않은 게 이미 그다지 문제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으므로.

일기 숙제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글쎄. 분명한 건, 이날 온종일 노야가 해죽해죽 웃고 다녔다는 사실이야. 어쩜, 선생님한테 혼났을 수도 있지. 그러나 노야한테 일기 숙제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라졌던 학교가 돌아오셨으니, 일기가 뭐 그리 큰일이겠어! (23쪽)

이처럼 어른들이 판을 벌여주기 때문인지 다 읽고 나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인상에 남는 작품이 많았다.

<학교>의 주인공은 지우개로 학교 그림을 지워서 본의 아니게 학교를 없앤 노야다. 그런데 노야 하면 학교를 지웠다가 다시 그린 것밖에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오히려 학교가 사라졌을 때 학교와 학생을 걱정하기보다 학교를 잃어버린 교장이라고 소문이 날까봐 걱정하는 교장 선생님, 새로 생긴 학교에서 새 책과 잔디 운동장이 생겨서 기뻐하는 선생님들, 진기한 요리를 할 줄 아는 요리사 등이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금두껍>에서 두꺼비가 학교에 선생님으로 나타날 때까지는 검지가 확실히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검지의 비중은 확 줄어들어 버린다. 다른 아이들이 다 동물로 변했을 때도 검지는 자기만 변하지 않는 것이 섭섭하다. 금두껍이 검지의 예쁜 목소리를 눈치채 줬을 때야 비로소 검지도 꾀꼬리로 변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금두껍의 비중이 너무 커서 검지는 금두껍이 나오도록 이끌어주는 조연 같다는 느낌을 준다. 글을 읽으면서 금두껍이 아이로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그럼 어른인 두꺼비가 주인공인가? 그러고 보니 제목도 <금두껍의 첫 수업>이네. 누가 주인공인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하나 덧붙이자면, <학교>, <금두껍>, <도깨비> 세 편에서 모두 교장 선생님이 등장하고 이야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라는 대상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친숙한 대상인가? 오히려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 하면 교장실에 있는, 선생님보다 높은 어른 정도로만 인식하지 않을지. 여기에 등장하는 교장 선생님은 어른들의 권위에 대한 일종의 풍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구수한 입담? 쓸데없는 잡담?

김기정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작가가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로 작품을 끌어나간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화자(김기정이 분명한)는 때로는 함께 웃고 때로는 참견하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미있는 표현도 많이 섞어 쓴다. ‘열아홉 바퀴나 돌고도 주차장을 찾을 수 없었지(14쪽)’, ‘꽃밭 왼쪽에서 열아홉 번째 장미 아래(20쪽)’, ‘천아홉 가지 진기한 요리(24쪽)’ 같은 대목에서 밑줄 친 말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척하면서 실은 일종의 말장난이라 읽는 재미를 준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입담이 쓸데없이 너무 나갔다 싶을 때가 있다. 작가는 ‘이거다’ 싶어서 힘을 실어 쓴 것 같은데, 정작 읽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예를 들면 <학교>에 나오는 요리사의 안내문 같은 게 그렇다.

니들 맘대로 골라 먹어라. 제발 찬찬히 꼭꼭 씹어 먹어라.
몹시 맛나서 둘이 먹다 다 죽어도 난 모른다.
쌀 한 톨 남기지 마라. 남기는 놈은 다 먹을 때까지 꿀떡 하나 더!
새로 온 꿀떡 요리사! (25쪽)

‘이거 재미있지? 이 대목에서는 웃으면 돼.’라는 작가의 생각이 빤히 보이는 이 대목을 과연 아이들이 재미있어할지. 게다가 음식이 맛있어서 ‘꿀떡꿀떡’ 삼키는 것에서 ‘꿀떡’ 요리사가 나오고 ‘꿀떡 하나 더’가 나왔지만, 그냥 읽어서는 ‘갑자기 웬 꿀떡?’이라고 느끼기 십상이다.

<금두껍>에서 두꺼비가 쓰는 사투리도 그렇다. 능청맞으면서도 우스운 두꺼비의 성격을 그리는 데는 잘 어울린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투리가 도리어 어색하게 느껴져 굳이 써야 하나 싶다는 의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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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2-04-28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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