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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학교 - 제10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35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내 인생에 가장 결정적이고 인상적인 거짓말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학년 때 엄마에게 한 거짓말이다.
20점이었나? 30점이었나? 형편 없는 수학(당시 산수) 과목 점수를 감추기 위해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쓴 점수에 같은 색 연필로 덧쓰기를 해
점수를 조작한 것이었다.(부모님의 확인 서명을 받아가야 했기에
엄마를 실망 시킨다는 것은 정말 처절한 상황이라 믿었던 나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런데 이 최초이자 최대의 시험이었던 거짓말은 완전한 실패로 끝난다. 방문을 닫고 공책을 몸으로 덮듯이하고 '점수조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쑥 엄마가 방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정은아, 방문 닫고 뭐 하니?"
10대 청소년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겠으나,
여직까지 "싫어." "안돼."라는 말을 별로 해 본 적 없는
말 잘듣는 여덟살 맏이가 굳이 제 방의 문을 꼭 닫고 책상에 앉아 있는 건 분명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육감이랄까, 촉이랄까. 아무튼 그것의 안테나는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나의 신체반응이었다.
나는 그순간 너무나 놀란 나머지 -이게 의지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코피가 말 그대로 펑 터져 버렸다.
엄마가 문을 열자마자 거의 0초의 반응으로 내 코에서 굵은 코피가 툭, 툭 털어졌다.
엄마는 너무나 놀라 거의 비명을 질렀다.
정작 엄마보다 놀란 건 나다.
엄마가 문을 열었기 때문에 코피가 터졌다... 단순히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 정리하기에는 초과학적인 현상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점수를 조직할 때 이미 너무나 두려움에 떨었고, 그만큼 혈압이 높아졌을 것이다. 빵빵하게 부푼 풍선처럼 내 온몸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내 핏줄들은 얇아졌다.
그때 문이 활짝 열렸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 천일하에 드러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극도로 긴장할 대로 긴장한 내 몸은 흥분과 공포로 콧구멍의 가느다란 혈관에 몰려 터져 버린 것이다.
코피가 터진 것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 이후의 일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아마 갑자기 터진 코피에 놀라 엄마가 물수건을 가져 오고, 코를 잡고 뒤로 목을 젖히고 -전에는 코피가 나면 머리를 뒤로 젖히도록 했다. 지금은 이것이 잘못된 대처법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졌다.-
책상에 떨어진 피를 닦느라고 내 받아쓰기 노트가 엄마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나의 점수조작은 자연스레 은폐되었을 것이다.
충격적이었던 그 코피분출 사건이 거짓말과 관련된 마지막 기억은 아니다. 아마 이후에도 몇 가지 거짓말을 했다가 엄마에게 들통이 나 된통 혼이 났던 듯 하다. 그것은 아마 지금 나이에 돌아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로, 왜 학교가 끝나고 제 시간에 집에 오지 않았는지, 거스름돈 남은 것이 왜 부족했는지, 양치질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관한 나의 진술이었다.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하는데 나는 별로 재능이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인가 아무튼 아주 어린 나이에 인생의 첫 번째 깨달음이라 할 만한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거짓말은 매우 귀찮고 번잡하구나.'
거짓말을 한 결과가 처벌이나 응징, 난감하고 불쾌한 상황으로 이어져서 거짓말을 그만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한 가지 하면, 그와 관련된 다른 것들도 연달아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번의 거짓말은 연쇄반응으로 다른 사실도 거짓으로 말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얻은 깨달음치고는 꽤 심오하달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내가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실용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게 매우 지적이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고도의 "정신노동"인데 당장 유리하자고, 나를 변호하자고 거짓말을 하면 그 일과 관련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는 것 뿐이다.
나는 게으르니까.
귀찮은 건 싫으니까.
단지 그거였다.
그래서 그뒤로 나는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는 말자....라는 결심을 했다고 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사람은 때로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니까. 심지어 자기가 한 말,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는 줄도 모른 채.)
물론 내가 생각하는 거짓말이 일반적인 거짓말의 범주와 같은지, 그건 자신이 없다. 나는 거짓말을 아주아주 자의적으로 정의하니까. 별로 어울리지 않은 새옷을 자랑하는 친구에게 "잘 어울려." 하거나, 상대를 격려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빈 말로 긍정적인 멘트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화이트라이 white lie 류의 거짓말은, 나는 거짓말로 치지 않는다.
사기꾼들이 다른 사람을 등치거나, 믿음을 배신하며 속이는 언동, 행위, 몸짓... 그런 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범죄행위에 가까운 그런 거짓말, 나 한몸 살자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뱉는 거짓말... 그런 거짓말에는 독이 있다.
단지 허공으로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의심과 절망으로 서서히 죽게 만드는 독.거짓말은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서로를 적으로 등돌리게 하는 어둡고 침울한 효능이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철퇴를 내리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정도로 독하다.
-이 책 156쪽에 나온 정치인의 거짓말 7단계는, 언제든 정치인이 연루된 사건에 적용해 보면 딱딱 들어맞을 만큼
절묘하다.-
"거짓말 학교"는 국가적인 규모로 거짓말 전문가를 영재로 기르는 학교가 있다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거짓말을 일삼고 무책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특권층을 보노라면, 거짓말 학교가 온전히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아니면, 이 책에서처럼 누구나 입학하기를 꿈꾸는 명문대나 특목고나 자사고가
실제로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잘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한 처세를 가르쳐서 배출하는 것이거나.
이야기는 신입생 인애와 나영이가 번갈아 1인칭 화자로 장을 바꾸며 이어간다.
인애가 친구라고 믿은 나영이, 그 누구도 믿지 않고 겉으로만 친한 척 나영이를 이용하는 인애.
이 둘의 사이는 위태롭다.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인애도, 딱 한 사람 진실학 선생님만은 믿고 따른다.
그러나 책의 끝에 이르러 진실학 선생님마저 인애를 뒤흔들어 놓는다.
진실학 선생님이 인애를 속인 것인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인애는 선생님을 끝까지 믿고 싶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흐른다.
그보다 더 딱한 것은 따로 있다. 인애는 이것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제까지 인애는 스스로 거짓말을 무기로 학교에서 '승리자' '강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인애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반대로 타인(여태까지 잘 속여 온 인애)도 자기를 믿지 않게 되었다.
거짓말로 상대를 속이며 잠깐 잠깐 이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될 수 없음을
무섭게 깨달은 것이다.
왜? 이에 대한 답을 3단논법 비스무레한 형식으로 풀자면 이렇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은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
그러므로 꾸준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결국 살 수 없다.
인애가 받은 충격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해지며 이 책의 뒷심이 된다.
이참에 나도 '거짓학'을 들입다 연구해서 세상을 움직이고 가두는 거짓된 힘을 낱낱이 밝혀 볼까?
혹은 진실이 가진 긍정의 힘, 희망의 파워를 연구하는 진실학을 전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