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냥꾼의 죽음 클리프 제인웨이 시리즈 1
존 더닝 지음, 이원열 옮김 / 곰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엄마는 왜 '죽음' 책만 봐?"

아홉 살인 둘째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아이 말이 일리가 있다.

"책 사냥꾼의 죽음"을 며칠 째 보고 있다.

직전에 다 본 책은, 프랑스의 주목 받는 신인 프랑크 틸리에의 데뷰작 "죽은 자들의 방"이었다.

 

여름이면 자연스레 추리물과 스릴러에 손이 간다.

이런 책들은 특히 가독성이 높아서 일단 책을 쥐면

밥 하는 것도 미루고, 빨래도, 청소도 뒷전으로 하고,

심지어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도 마다 하고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죽음, 죽은 자...

아이에게는 공포감이 느껴지는 위협적인 제목인 모양이다.

(엄마가 그런 책만 들여다보고 하루종일 자기를 방치하는 게,

아이한테는 더 공포스러울 수도 있겠다.)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 때는 '책 사냥꾼'이라는 제목에 끌렸는데

원제를 알고 나니 더 흥미롭다.   

Booked to die.

원래 문장은 '죽음이 예약되다'로 옮겨야겠지만 '책 때문에 죽다'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의 후속작인 주인공 클리프 제인웨이 시리즈 2탄 '책 사냥꾼의 흔적'도

원제가 the Bookman's wake다. 전업작가 생활을 중단하고 고서적, 희귀서적 전문서점을 운영할 정도의 열정적인 북맨 존 더닝다운 작명이다. 

 

이 책이 전형적인 형사물이라거나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인공 클리프가 매혹적인 (전직)형사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사건 전개나 해결보다는 심리적인 전개에 치중하고 있으며 책 세계와 그와 관련된 인간들(북스카우트, 북맨, 북딜러... 등)을 소개하는 데 지면을 더 많이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매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숨 막히는 긴장,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공포를 기대한다면 그리 권할 만한 책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책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책은 나에게 소설(픽션)이 아니라 지식정보책(논픽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현대문학 거장들의 초판본에 목숨을 걸고, 면지에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는 책을 보물로 여기며 그것을 사냥하기 위해 거리를 누비는 북헌터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나도 이따금 신촌의 '숨어 있는 책'이나 신림동의 '흙서점', 그도 아니면 아주 세련되고 깔끔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헌책들을 거침없이 사 들인다. 그러나 내가 그 책을 사는 것은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하거나 서점에서 새 책을 사는 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저 '소비'이자 '구매'일 뿐이다. 물론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것은 예기치 않은 보물을 발견한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지만, 그 가치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다. 유통되거나 재물로 교환될 수 있는 가치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북스카우트들과 북맨들은 책의 '화폐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되팔기 위해 투자한다. 한마디로 골동품 소집과 비슷한 것이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석"을 찾는 마음으로 창고를 뒤지거나 헌책방을 탐험한다.

 

정말 이런 책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게 내게는 전혀 현실감이 없다.

그렇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면 이탈리아나 영국에 갔을 때, 그리고 맨하튼에 갔을 때도 헌책방을 들르거나 지나치기는 했다. 어차피 외국어인지라 나는 그저 어린이책이나 그림책 정도만 뒤졌을 뿐이지만 그 헌책방들에는 공통적으로 카운터 뒤쪽에 열쇠가 달린 유리장식장이 따로 있었다. 그안에 따로 고이 모셔진 책들이 어쩌면 이 작품에 나오는 희귀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같은 뜨내기 외국인 관광객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고, 가게 주인들은 왕궁의 수문장처럼 그 장식장을 지키는 인상을 받았다.

 

책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미국에는 그런 시장이 분명히 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너무 낯설다.

나는 책을 사랑하고, 그런 까닭으로 책 언저리를 서성이는 일을 하고 있지만

물체로서의 책을 숭배하거나 그것을 통해 큰 돈을 번다는 것이 어쩐지 꺼림칙하다.

집 가까이에 있는 공공도서관이 내가 가진 책들을 모두 보유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언제든 손쉽게 대출할 수 있다면 사실 지금 우리 집의 하중을 쓸데없이 높이는

이 책더미와 책장들을 당장 치워 버릴 것이다.

 

책에 대한 견해가 나와 다르기는 해도,

이토록 책에 집착하고 목숨을 거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

흐뭇하다. 찌뿌둥한 아침을 깨우는 진한 커피 한 잔처럼 아주아주 큰 위안이 된다.

 

p.s. 며칠전 알라딘종로점에 갔을 때 추리소설 코너에서 이 책과 함께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슬립"을 샀다. 챈들러가 탄생 시킨 하드보일드 탐정 '필립 말로'의 영향력은 엄청 나서 이후 탐정소설 캐릭터는 심하게 말하면 필립 말로의 변형이거나 오마주,라고 책 소개에 나와 있다.

뒷표지에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었다"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굵고 붉은 글씨로 인용되어 있다.

앞의 몇 챕터를 읽었는데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 묘사가 과하다. 그 묘사가 보여주는 풍경을 마음 속에 제대로 그릴 수 없다. 묘사를 건너뛰고 읽자니 묘사를 버린 나머지 문단은 너무 앙상하다.  아무래도 나는 비열한 캘리포니아 거리를 누비는 바바리 차림의 필립 말로를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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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3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체로서의 책을 숭배하거나 그것을 통해 큰 돈을 번다는 것‘은 ‘어쩐지 꺼림칙하‘지만
‘책에 집착하고 목숨을 거는 인간들‘ 에 ‘아주아주 큰 위안‘을 느끼는
그 마음이 손에 잡힐 것 같습니다.

반지하bnb 2023-07-31 09:46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시는 댓글, 감사합니다. 나님. 저에게, 정녕 가장 오래 사랑한 물체는 역시나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송구하고 꺼림칙하지만 버리고 싶지 않은 집착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