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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엘리엇 ㅣ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6
그레이엄 가드너 지음, 부희령 옮김 / 생각과느낌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꼭 번역자가 아니라도
원작의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의 어려움쯤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책 "새로운 엘리엇"의 표지에는
영어로 "Inventing Elliot"라는 원제가 같이 적혀 있다.
이 소설(청소년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제목으로 Inventing Elliot가 얼마나 절묘한가를 다시 깨닫게 된다.
하지만 원제의 의미를 살린다고 해서 "엘리엇 발명하기"라든가
에둘러 "엘리엇, 엘리엇을 발명하다" 뭐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자기 안의 다른 자기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나의 가면을 쓴다... 이 페르소나의 문제가 사실 이 책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는 엘리엇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1인칭은 아니다. (이런 것을 3인칭 전지자시점이라고 하던가? 인칭과 시점, 이 문제는 요즘 나를 가장 괴롭히는 주제다.)
거칠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학교라는 조직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 하는 어떤 중학생 남자 아이의 이야기이다. 엘리엇의 단란했던 가정에 어느 날 불행이 덮친다. 한창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의욕적이던 아버지가 한밤중 주차장에서 강도를 당한 것이다. 강도들은 돈을 빼앗으면서 아버지를 무참히 가격했다. 의식을 잃었던 아버지는 생명은 건졌지만 뇌 손상으로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어떤 목소리에도 굴하지 말아라. 너 자신의 힘을 믿고 바꾸어라!”라는 것을 신조처럼 말하던 아버지는, TV 앞 안락의자에서 하루종일 침을 흘리고 앉아 있는 지방덩어리가 된 것이다. 엘리엇은, 범죄라는 이름의 폭력이 아버지를 ‘죽였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 역시 탈의실에서, 샤워실에서, 선생님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교실에서 학생들이 공공연하게 자행하는 폭력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한다.
엘리엇의 어머니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이사를 감행한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엇은, 그래도 뭔가가 달라지기를 바란다. ‘홀민스터’라는 명문학교, 그 이름 자체가 그대로 권위가 되는 그 학교로 옮기면서 엘리엇은 새로운 가면을 쓰기로 한다. 엘리엇의 목적은 희생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표적 말이다. 그러나 폭력의 현장에서 침묵하는 것은 곧 공범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엘리엇은 공범이 되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학교의 비밀스러운 실세 ‘수호자’이 엘리엇을 다음 세대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조지 오웰의 《1984》도 그런 맥락에서 인용된다. 그러나 그 책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의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수호자의 우두머리 격인 리처드는 이 책이 ‘권력 그 자체가 권력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즉, 그들에게 이 책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자들을 위한 바이블이다. 하지만 엘리엇을 설레게 한 여자 친구, 엘리엇의 여러 개의 가면을 부술 수도 있는 루이즈는, 이 책에서 자유의 메시지를 읽는다. 주인공은 체제에 저항한다,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처형 당한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 주인공은 자유로웠다. 아무도 그의 생각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를 삭제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도 모든 사람은 매일매일, 매순간 내면의 투쟁을 겪는다. 그것이 얼마나 격렬한가,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차이는 있다. 사람이라면 공동체, 조직에 순응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체제의 하나가 될 것인가, 튀어나온 송곳이 될 것인가 하는 번민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생명이 지니고 난 숙명이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포기하는 것이 많아질 뿐이다. 마음속의 소용돌이는 엄청 난 힘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의 에너지를 무한하게 끌어올리기도 하고 통제가 안 될 때는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그 회오리바람을 잠재운다.
하지만 가끔, ‘아줌마’로 한 살씩 먹어 가는 나도 이런 작품을 만나면서 감정의 급물살을 타는 것도 좋겠다. 내가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낫게 바꿀 있지 않을까, 다시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으며.
P.S. 번역서라는 느낌이 늘 겨를이 없게 만드는 매끄러운 우리말 문장은 고맙게 여겨진다. 소설가 겸 번역자인 역자의 내공 혹은 정성스러운 편집자의 노력이거나 할 터인데 독자로서는 아무튼 반갑고. (그래서 본문 중간에 문장이 한번 더 겹쳐 나오는 오류도 애교로 ^^)
그리고 열린 결말을 의도한 것은 알겠지만 이야기가 갑자기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어 살짝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