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다는 시인 김경주를 만난다. [기담]이라는 시집으로 필명을 떨치고 - 그 시집도 준비해두었지만 - 김수영 문학상이라는 타이틀에 끌려 이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를 먼저 보게 되었다. 왜냐고, 내게 김수영은 그냥 시인 김수영이 아니라 내 삶의 지표이자 등대인 그 '수영'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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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에 어울리는 시집이란 아마도 수영의 詩 정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진정성과 시대를 이끌어가는 시의 성취'에 있다 할 것이다. 예전의 수상자들 - 정희성, 이성복, 황지우, 김광규, 최승호, 김용택, 장정일, 조정권, 유하 등 - 이 우리에게 던져주었던, 상투적인 표현을 넘어선 신선한 충격과 진지함을 이 시집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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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낱말들, 정교한 횡설수설이 있다 하지만 천년 전으로 바람이 눈을 감을 때 배반은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서사이고 ~ |
- '정교한 횡설수설'에서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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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떠난 폐가의 마루 냄새를 맡고 밤이면 이름이 없는 먼 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혀에 굴리다가 죽은 바람은 ~ |
- '대필(代筆)'에서 (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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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집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는 심사숙고 끝에 어질러놓은 시어들이 무정형 속의 규칙을 가지고 자신의 빛깔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저 詩를 즐겨 읽기만 하는 나에게는 만만치 않은 시들이었다. 그래도 위 구절들처럼 평범한 표현과 비유를 훌쩍 뛰어넘는 시인의 눈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고등학생 때 수영의 詩를 처음 읽었을 때에 비견할 만한, '어,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면서도, 끝내는 따라가게 되는 진정성의 힘을 만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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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를, 한 두편이 아니라 시인의 한 권의 시집을 읽을 때에는, 그 시인과 그 시집과 그 시가 씌어진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흐름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시를 재미있게 즐기려면 그 흐름의 줄기를 찾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맥을 찾으려 시집을 덮었다가 다시 뒤적거렸다. 그리고 겨우 찾아낸 것이 '눈'이다. 너무 자주 등장하여 오히려 놓칠뻔 하였던 말이 여러 가지 모습과 이름으로 이야기되는 그 '눈'이다. 그 눈에서 '시차'도 생겨난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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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에서 태어난 눈들은 모두 내가 태어난 계절에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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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오기 전, 인간의 눈 안쪽으로 넘어가야 하는 노을은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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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짝 귀를 쥐어 줄 때 그의 눈을 사랑하기로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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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에서의 이별은 밤마다 한 눈이 다른 한쪽 눈을 구축하는 시간이어서~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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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그 높이에선 늘 눈을 감는다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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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에 잠긴 그 눈동자에 모래가 흘러내리는 꿈을 꾸게 된다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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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란 자신의 눈을 몸 안으로 안내하다 가는 일이라는 생각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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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메아리가 돌아오는 겨울엔 새들의 눈마다 다른 냄새가 난다 (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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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어(譯語)처럼 엄마의 눈이 하나의 편물이 되어 갈 때 (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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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눈이 멀게 되고 / |
자신의 구슬 속에 아버지의 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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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의 책들이 다른 눈으로 태어나는 월요일 (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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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녁은 '고래의 눈 속'이다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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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눈동자에는 밤이 아직 머무르고 하나의 눈동자에는 낮이 아직 시작되고 있는 그 눈동자를 보고 있었죠 마마 (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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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을 보면 움직이는 곤충의 눈이었단다 (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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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처럼 묵직하게 젖을수록 멀리 갈 수 없는 내 눈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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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아 각 시의 제목들은 옮겨두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자주, 시인이 '눈'을 이야기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왜 이 시집의 제목이 [시차의 눈을 달랜다]일까에 집중해 본다. 시차라는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공간적인 이동과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적 차이를 아우른다. - 시차(時差)와 시차(視差)를 함께 쓸 수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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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눈으로 다른 곳을 보기도 하고 같은 곳을 다르게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곳을 다른 때에 보기도 한다. 이 모든 시차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일렁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차에 관한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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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경영학과 3학년 때 국문학과 1학년의 <시 창작론> 강의를 한 학기 수강한 적이 있다. 그 창작론의 핵심은 '낯설게 하기' 곧 '다르게 보기'였던 것이다. 일상의 익숙하고 평범한 모습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르게 바라보고 낯설게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은 시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런 면에서 시인의 눈은 나와는 아주 큰 시차를 가지고 있고, 충분히,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듯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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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향을 선물받은 날 다리를 좀 절었고 시차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집에서만 지내는데도 망각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데에도 기억은 수십 종의 식물을 달고 간다 어쩐지 너의 여행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많은 종(種)의 연필이 필요할 것 같아서 흑마를 탈까? 백마를 탈까? 청기를 들까? 백기를 들까? 여행은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침묵의 차이 같아….. |
- '시차의 건축'에서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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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그곳을 오고 가는 내 다양한 인종(人種)이다 꽃의 이름보다 꽃 냄새를 기억하려는 사람의 눈을 믿어 본다 |
- '시차의 건축 2'에서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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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침묵의 차이 같아'라고 이야기하거나 '꽃의 이름'보다 '꽃의 냄새'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시인의 눈을 통하여 미처 모르던 또 다른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늘 보던 세상을 다시 만난다. 그렇게 '시차의 건축'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쓰다듬을 수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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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을 달래기 위해 |
새벽엔 욕조를 열심히 닦지만 |
오늘 밤엔 밤에 사라진다는 |
사람의 눈만 달랜다 |
- '내 욕조의 입장권'에서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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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누워 그대가 내 머리칼들을 쓸어내려 주면 손가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난다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는 고래의 표정, 숨 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머리카락들, 해변에 누워 있는데 내가 지닌 가장 쓸쓸한 지갑에서 부드러운 고래 두 마리 흘러 나온다 감은 눈이 감은 눈으로 와 서로의 눈을 비빈다 서로의 해안을 열고 들어가 물거품을 일으킨다 ~ |
-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에서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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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시집에서, 넉넉하고 살가운, 따듯한 위무의 말을 건져 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무심한 듯 시인이, 언뜻 지나치며 건네주는 '사람의 눈'을 '달랜다'라는 구절만으로도 '내 가장 아픈 저녁에'도 만나 볼 한 권의 시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비'비고 '서로'에게 '물거품을 일으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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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윽고 우리는 시인의 울컥?하는 진심이 스며나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달랜다'. '바람이 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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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
당신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한 번만 생각해 보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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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잘 흘러가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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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어디든 |
바람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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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눈을 뜨면 |
누구나 자신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바람의 시차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
- '마침내 아주 작은 책이 되어 버린 어떤 무렵'에서 (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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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 10. 새해, 이제서야 첫걸음입니다. 꾸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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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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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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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옮겨 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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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란 인간은 결국 자신과 가장 닮은 허구를 타인 쪽으로 열고 간다는 거다 |
- '입김으로 쓴 문장'에서 (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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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눈과 내 눈이 만나는 자리를 내 종이로 옮겨 온 저녁이라 부르면 나는 '이누이트 극지 모임'의 동인 같기도 하고 내가 가장 아픈 저녁에 내밀던 혀의 색깔 같기도 하다 ~ |
- '나는 밤을 새들의 꿈에 등장하는 내 눈이라 부르지만'에서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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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입을 벌리면 그 입안에 마르지 못한 채 몇억 년된 물방울 하나 맺혀 있다고 하자 아직 그 물방울 하나 우리가 바다 한가운데서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 주자 |
- '입안에 마르지 못한 채 몇억 년된 물방울 하나'에서 (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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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때문에 울먹이는 일 좀 없었으면 하는데 |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
-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에서 (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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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좋은 바람을 상상할 줄 아는 것이 먼저다. |
- '종이로 만든 시차 3'에서 (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