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고 한참을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언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오랜만에 시절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여러 번, 이제서야 나도 아이들 품 속으로 가보련다. |
|
1987년 6월, 역사 속에 남은 그날, 다행히도 난 거리에, 그 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비록 여러 가지 까닭으로 명동성당으로 이어지던 장기농성에는 합류하지 못하였지만 6월10일, 거리를 내달리던 젊음, 그 속에 나도 있었다. 그로부터 스무 해도 더 지난 지금, 정말 다행스럽게 아이에게 난, 아빠도 그때 그 역사 속에 '삭발+단식'으로 발 딛고 있었노라고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어떤 자격증을 가진 사람처럼 말이다. |
|
그리고 2008년 촛불의 날들이 밝았다. 전국이 촛불잔치로 들뜨던 그 시간 속에 나는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자. 지금 있는 곳이 서울이 아니라 김해라는 시골! 이기에 갈 곳이 없었다고 말하자. 초등학교 5학년이던 딸아이조차 집에 와서 당시의 문제점에 대하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또박또박 밝은 목소리로 얘기하던 그 밤들, 나는 현장에 없었다. 아무 데도 없었다.
|
|
스물둘의 나이가 마흔넷의 나이가 되는동안 그렇게 나는 변하였다. 먹고 살기 위하여 솟구치던 뜨거운 피를 누르고 또 눌러 파랗게 식혀버렸다. 그래, 그저 먹고 살기 위하여. 하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가슴 속 무언가가 있어 발버둥치고 퍼덕거리곤 하였다. 소설 속 열다섯 소녀 지오와 아이가 만난 이 땅의 젊은이들, 그리고 넘쳐나는 이야기들이 나를 다시 일깨운다. 기어코 울먹거리게 한다. |
|
사람들은 지치지 않게 싸우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말할 만했다. 축제가 된 싸움은 이전의 우리 역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 즐거운 싸움에 누구는 섞이고, 누구는 구경하고, 누구는 욕하고, 어디서는 애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소집을 당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이별을 하는 연인들도 있을 것이었다. (242) |
|
책 속에서 만나는 2008년의 그날, 촛불 투쟁이 아니라 촛불 잔치의 상세한 이야기들은 이미 만날 만큼 만났었다. 그 시간만 다룬 책도 있으니까. |
|
그래, 그 시간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우리는 적당히 따듯한 마음을 나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책, 이 소설의 고마움은 촛불잔치에 관한 에피소드나 정황의 세부적인 묘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을 통하여 전해지는 신선한, 몸과 마음의 이야기가 내게는 더 좋았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 말이다. |
|
아무튼, 물오른 신선한 몸의 시절이 있는 거다. 남자애들만 있는 운동장에 나타난 소녀 하나가 어떻게 운동장 전체의 공기를 바꿔 놓는지, 여자애들만 있는 교실에 나타난 소년 하나가 얼마나 근사하게 반짝이는지, 아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면서 만나게 된 그 모든 풋풋한 장면들의 소스라치게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연우의 마음 한 켠에 고여 있던 오랜 상처딱지를 마법처럼 치료해 주었다. 이건 정말 자연스러운, 인생이라는 마법인 거야. 우리 인생 전체가 마법 같은 거라고. (144) |
|
이런 경험, 겪어본 사람들은 알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이다. 중3 때, 근처 여중학교에 선생님 심부름을 가서 고개 숙이고 걸어가던 그 순간 말이다. - 그런데 나도 '반짝'이기는 하였을까? ^^ - 아마도 그런 날들이 나를, 우리를 버팅기게 한다. 그렇게 삶은 자라나는 게 아닐는지…. |
|
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나고 고작 하는 이야기가 '물오른 몸'에 대한 이야기라니.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도 있으시리라. 하지만, 바로 지은이가 건네주는 이 이야기가 '반짝이는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돌고 돌아 전해주는 '무지개' 같은 이야기 말이다. |
|
그리하여 나도 다시, 자꾸만 멈추고 머무르는 삶에서 벗어나 자라나는 아이들처럼 뒹굴고 흐르며 자라나는 삶을 살아봐야겠다, 라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2010년의 촛불잔치에는 아이 손을 잡고 온가족이 함께, 다시 거리에 서보리라고…. |
|
귀여운 것들! 사랑해라, 사랑해. 오늘날까지도 사랑이 세상에 찾아오는 건 먼저 산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더라. 하늘이 다시 한 번 너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더라. (193) |
|
|
2010. 3. 1. 잠시나마 '아현동 고갯마루'에서 지낸 추억,
제게도 있습니다만... ^^;
|
|
|
들풀처럼 |
|
*2010-026-03-02 |
|
|
*책에서 옮겨 둡니다. |
|
나는 자유! 바람 농장의 아이라는 거야…… 힘들 땐 레인보우 마운틴을 생각할게.응…… (11) |
|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엔 튀면서도 오랫동안 몸에 밴 숨결처럼 자연스러운 게 있었다. (14) |
|
발칙한 것들을 보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14) |
|
하지만 사람이란 철새 가족들이 물어다주는 맛있는 이야기들을 냠냠 받아먹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이어서 여행자가 되는 법이다. (18) |
|
니를 낳은 사람은 분명 엄마이고, 엄마가 누구와 잠을 자고 나를 낳았는지는 엄마에게 중요한 일일 뿐이다. (22) |
|
비행기를 타고 새처럼 떠나는 사람과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인생은 공항 사이에 있고 세상은 크고 작은 공항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29) |
|
초등학생용 특목고 문제집이라니! 잘될까 생각하기 쉽지만, 초등학생용 특목고 문제집으로 돈벌이가 가능한 게 대한민국이다. (36) |
|
모든 여행은 죽음의 가능성을 감수하는 여행이다. ~ 옛 인디언 아이들은 부족의 지혜로운 노인들에게서 삶과 죽음에 대해 동시에 듣고 배웠다. 죽음을 상상하는 순간 세상의 일들은 좀 더 근사해지는 것이다. 그만큼 삶이 빛나기 시작하니까. (41) |
|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43) |
|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과거에도 결코 혼자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결코 혼자이지 않을 것이다. (51) |
|
우리 집의 전통이랄 수 있는 자율적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아무도 내게 서둘러 이유를 묻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물음은 스스로 먼저 충분히 만나야 하니까. (61) |
|
*카우치 서핑 Couch Surfing : 무료숙박을 제공하는 전세계 여행자들의 커뮤니티 |
|
사소한 것에 감동하는 사람들은 묘하게 희영의 꿈을 흔들었다. 코코돌코나기펭,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69) |
|
"지오야,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어디서든 그걸 기억하렴." (87) |
|
"하린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 우리 강아지! 운명은 질문하는 자를 사랑한단다. 힘들 땐 레인보우를 생각하렴." (88) |
|
"아니, 난 믿을래요. 우연 같은 운명. 내가 그 애를 우연히 알게된 것처럼요. 방송 같은 거 말고.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소박한 일을 하고 싶어요.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만나게 될 거니까. 그리고 그 애가 이번 여행의 전부는 아니니까. 내, 첫, 단독비행! 나는, 나를, 성장시키고 싶은 거예요." (90) |
|
"잘 들어둬라 소년들아. 생명을 가꾸기 위한 길은 이렇게 험난하고 위대하노니!" (93) |
|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물처럼 깊이 대화하라. 사랑이 많으면 슬픔이 많다네. 두려워마라, 대지의 딸아. 큰 슬픔을 통해 기쁨으로 나아가라. (117) |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126) |
|
윗대가리들이 후진 나라에선 법적인 민주주의라는 게 그런 식이지. 허접한 껍데기. ~ ~ 가난한 골목길의 새벽. (149) |
|
'마음을 다하는 과정이 마음 없는 결과보다 언제나 더 소중하다. (158) |
|
"백성을 섬길 줄 모르는 정부 때문에 내 새끼들이 고생이 많다." (164)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w/i/wideblue/mqRxUgud.jpg)
|
|
목욕탕은 인생이 별반 특별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181) |
|
그러니, 오로지 '카르페 디엠'이다! 저마다의 앞에 닥친 현재를 충분히 누릴 것!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며, 미래를 미리 걱정하거나 짐작하지 말 것! (182) |
|
외로운 영혼들은 노래를 들려줘야 가벼워진댔어요. 무겁고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가 생긴 거라고. (183) |
|
돌아보니 깃발을 잔뜩 단 돛배처럼 아현동 고갯마루가 도심을 향해 넘실거리고 있었다. (189) |
|
사막을 노 저어가는 배처럼 현실감이 떨어지는 거친 얘기들이지만, 이런 꿈이라도 꾸어야 할 만큼 현실은 형편없으니 ….. (195) |
|
언젠가 마리가 이야기해 준 것처럼 기쁨과 슬픔이 한 쌍으로 온다는 걸 인정하려고 하고 있어. 숨 쉬고 사는 것이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늘 한 쌍으로 드나드는 게 삶이라는 걸, 아주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아. (214) |
|
"울어, 울어도 돼. 울음이 나올 땐 울어야 다른 기억이 돌아와." (230) |
|
"조안이 그랬어. 일어난 모든 일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고, 경험은 마음에 쌓여서 다른 경험을 부른다고." (243) |
|
"그만! 그만해, 제발!" 지오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
"사랑해! 제발 그러지 마! 사랑해! 사랑한다구!" ~ |
"그러면 모두가 아파. 네가 아프면 내가 아파. 사랑해. 그러니까 그러지 마. 그러니까 아프지 마. 사랑하니까." (272) |
|
옹이 말이야. 삭정이가 떨어져야 세 가지가 나거든. 옹이는 상처인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상처인데… 삶도 죽음도 고독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 나는 울지 말아야지. (314) |
|
상처를 치유해 가는 힘은 자신이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을 때에만 생긴다고 연우는 속으로 되뇌였다. (323) |
|
아홉은 완전수에 근접해 있는 숫자지. 근접해 있지만 완전수는 아닌 숫자. 채워지고 있거나 비워지고 있는 숫자. 변화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숫자니까. (3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