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쓰기 법

이해인

 

1. 쓰기 전에 먼저 오래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할 것

 

2. 다른 이들의 좋은 글들을 많이 읽고, 새겨 읽을 것

 

3. 어떤 사물에 대해 바르게 묘사할 수 있게 우리말 공부를 충실히 할 것

 

4. 떠오른 생각들을 일단 메모한 다음 두고두고 발전시켜 나갈 것

 

5. 늘 진실하고 겸허한 태도로 글을 쓰며 다른 이의 평가도 받아 들이되 너무 매이지는 말 것

 

6. 어떤 글에서든 다른 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어슬픈 추측을 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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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물

                                                                                   

                                                                                                  서정윤

 

아직도 가슴에 거짓을

숨기고 있습니다

늘상 진실을 생각하는 척하며

바로 사는 것 처럼 행동하지만

나만은 그 거짓을 알고 있습니다

 

나조차 싫어지는 나의 얼굴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인간적

인간적이라는 말로써

인간적이지 못한 것까지 용납하려는

알량한 '나'가 보입니다

 

자신도 속이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들키는 바보가

꽃을, 나무를,

하늘을 속이려 합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웃습니다

비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기에

더욱 아픕니다

언제쯤이면 나도

가슴 다 보여 주며 웃을 수 있을지요

 

눈물나는 것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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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17일 오후 9시가 넘어 점호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내무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제대를 이틀 남겨 놓고 있는 난,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몇 몇 밥 안

되는 병장 놈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모포말이'라는 단어를 엿들어야만 했다.

특히 태권도 사범인 박병장 목소리가 유난히 크다.( 박병장은 나보다 나이가 많

아 내가 며칠 전부터 '형'이라 불러줬다. 짬밥 없을 때 내가 무진장 가지고 논 기

억 밖에 없다.) 그렇다! 그 이름도 유명한 '모포말이'.....말년 병장들이 집으로 가

기 전 모포로 둘둘 말아 오뉴월에 개 패듯 지근지근 밟아주는 거다. 내가 짝대

기 두 개 달고 있을 때부터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단어가 왜 지금 내무반의 지존이자 꼴통인 그 놈의 짝대기 네 개들

에게 회자되고 있단 말인가. 아~ 불안하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꼭 이 놈의 불길한 예감은 내가 진정 원치 않을 땐 적중한다. 그렇다.

일직사관인 탁중사가 모레 집에 가는 '아저씨'들은 내무반 한가운데로 모이란

다. 우~~와~~ 내무반은 축제 분위기다.(참고로 우리는 한 내무반에 50명가량이

함께 생활한다.) 몇 분 후에 다른 내무반에 있던 내 동기 두 명도 우리 내무반으

로 질질 끌려왔다. 한 번에 몰아서 깔끔(?)하게 끝낼 심상이다. 내 동기 녀석인

황병장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아.. 저... 허리가 안 좋은디... 쪼까 빼주시면

안된다요? 밖에서 허리 쓸 일이 월매나 많은데..." 일직사관이 씩 웃으며 "안! 돼!

이 놈아, 뺀질되지 말고 모포 준비해." 여기 저기서 킥킥되는 소리가 들린다. 도

저히 이 상황을 벗어날 방도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포기할 순 없

지. '용기 빼면 느끼함'(?)밖에 남 지 않는 내가 용기를 내 근엄한 표정으로 그 탁

중사에게 한마디 했다.

"침낭으로 하면 안됩니꺼?"

그래서 나는 우리 동기들이 모포로 말릴 걸 침낭으로 말리게 하는데 지대한 공

헌을 했다.(참고로 함께 전역하는 네 명의 내 동기들은 운좋게 모두 나이도 같

고 허물없이 지내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근데, 그 놈들은 날 '쓰레기'라고 부

른다. 왜? 나도 모르겠다.)

우선, 내가 침낭 속으로 꿈틀꿈틀대며 몸을 숨겼다. '엎드릴까... 똑바로 누울

까......모로 누울까............머리를 손으로 가릴까...... 그보다 중요한 곳을 가려야

하나?....' 한참 고민하며 이 자세, 저 자세 다 취하고 있는데....갑자기 적막이 흐

르는 거다. 마치 폭풍 전야인 듯.

그 적막을 살짝 깨며 애잔한 노래가 들려온다. 우리 분과 막내인 강이병 의 목소

리다. 사회에 있을 때 모 보컬그룹에서 활동했다는데,노래 솜씨가 가수 뺨치는

녀석이다. 구슬픈 노래였다. 우리가 보통 '전역가'라고 부르는 노랜데, 가사는

대충 이랬다.

< 입영 전야에 어머님은 우셨다. 이 못난 아들의 2년이 슬퍼서 우시나 보다. 첫

면회 오시던 날 내가 또 울었다.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덧 시

간은 흐르고 흘러 나도 이제 말년 병장. 잘 있거라 연천 땅이여. 사랑하는 나의

전우여. 잘 가세요. 문병장님. 내가 또 울었다.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

다.>

빌어먹을! 갑자기 목이 메어오는 건, 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순간 지난 군생

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발냄새,땀 냄새로 범벅이 된

텐트에서 함께 살을 맞대고 잤던 녀석들... 한 겨울 외곽보초 후 고참이 해 주던

뜨거운 봉지 라면에 흘렸던 눈물... 부대를 둘러 싼 산이 온통 울긋불긋해졌을

때마다 찾아 오든 사회에 대한 짙은 그리움들... 힘들고 고달픈 일상속에서도 옆

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 한없이 군대가 혐오스러워 지고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끝없이 맘 속으로 되내었던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어느새 지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상에 젖어 들고 있는 내가 웃겼다.

어느덧 노래가 끝나는 가 싶더니 "야! 불 꺼!!"라는 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난 그 노래에 완전히 맛이 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무방비 상태였다. 이런 씨** 몇 초간 소나기처럼 옆구리며 다리며

등이며 사정없이 밟아대기 시작했고, 어떤 쉐이(?)는 베게를 집어 던지기도 했

다.

그렇게 우루루 밟고 나더니 금방 잠잠해졌다. 근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평소에 늘 귀여워하던 은병장이 내 침낭을 잡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더니 또

시작하는 거다. 끝난 줄 알고 마음을 놓고 있다 또 그렇 게 겁나게 밟혀부렀다.

정말 디지는(^^::) 줄 알았다.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평소 내게 쌓여던 '갈굶의

부산물'들이 사라지길 빌 뿐이었다. '그래 나쁜 기억은 잊고 좋은 기억만 간직해

주렴.친구들아...'침낭말이를 끝내고 단체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며 박수를

쳐 줄 땐 그 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먹고 좋다고 배시시 웃음이 새 나오는 건

또 무슨 조화인지.  한쪽 눈망울엔 밟힐 때 흘린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ㅜ)

그 놈들에게 감격해서 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 줬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해

야 할 것 같았다.

"음, 그래 다음 주부터 있는 유격훈련 자~알 뛰래이....."(참고로 그 군인아저씨

들은 다음주부터 유격훈련에 들어간다. 나는 유격에 유자만 들어 도 한번씩 경

기를 한다. PT체조는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PT 8번 준비!! 유~~격...... 온 몸이 비

틀리는 고통뿐이다. 34번 올빼미의 아픈 기억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근데...근데, 잠시나마 우리들을 밟으며 유격의 공포를 잊고 있던 그들에 게 '유

격'이란 말을 끄낸 자체가 실수였다.

누군가가 또 소리친다. "저 아저씨 아직 정신 못 차렸구만, 다시 말아~~~" 우~~

와~~~~~

으~~~~~~~~~~~~~~~~악!!!!!

...............................................

그렇게 군대에서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2003.4.17.일기 각색>

 

 

 

 

 

 

 

 

 

*2003년 2월 중순, 988포병대대   제 3포대 사격지휘 분대장이었을 때, 전포대장 휴대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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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쌤 2004-01-1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1년 2월 20일 의정부 306보충대를 거쳐 5사단 열쇠부대 신병교육대, 그리고 988포병대대까지... 그리고 2003년 4월 19일 전역했다. 군대라는 곳이 싫었지만, 난 그 속에서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았다. 제대는 한 때 내 꿈이자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그러했다.
요즘 한없이 흐트러지고 타성에 젖어 있는 내 자신을 각성 시키고 싶어, 옛 일기장을 들추어 보다 발견한 글이다. 새삼 그 때의 일이 어제 일 마냥 생생하다.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된다.'고 푸시킨이 말했던가.
그래... 지금 지나가 버린 그 시절이 그리움이 되어 밀려 옴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그 사람과 이별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 앞에서는 못 다한 사랑에 통곡을 하면서도 한순간씩 사랑과 죽음을 나누면서 지극히 태연하고 담담하다. 그것은 아마도 이 순간이 아니어도 내일, 모레 또는 내년쯤에도 지금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과 바람 때문이리라.

이런 말이 있다.

'만일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너는 그를 사랑할 수도 있을테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너는 그를 더 간절하게 더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을테니까......'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열심히 사랑하자. 오늘이 지금의 그 아름다운 빛깔로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테니까.

*이성호, <나는 회계학 시간에 詩를 읽는다.> 에서.

 

 

 

내가 군에 있을 때다. 제대가 얼마 남지않은 말년 병장 시절.

일직사관이 느닷없이 대구가 고향인 사람은 집으로 전화를 해보란다.

2. 18. 대구 지하철참사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 때 생각이 난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모두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며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난 마음 속으로 애타게 이런 기도를 했었다.

'부디 아무 일 없게 해 주십시오.   살아 있게 해 주십시오......

저의 모든 걸 빼앗아 가셔도 좋습니다. 그들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내 생애 이보다 더 간절한 기도는 없었다.

통화량 폭주로 인해 전화가 계속 불통이었을 때, 내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중에 겨우 형과 통화가 된 후에야 난 안심을 했고, 난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 난 그 소중한 기억을 잠시 잊고 있었다.

'훗날 좋은 선생이 되어서, 부모님 도움없이 돈 많이 벌게 되면 효도해야지.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좀 더 잘 해야지... 이 일만 잘 끝나고 나면 내 가족을

열심히 사랑하고, 여자친구를 더 사랑하리라. 좀 더 나은 모습이 되면, 그 때

좀 더 당당히 사랑해야지......' 하고 사랑하는 것을 잊기도 하고 미루기도 하고

있다.

이건 아니다. 사랑은 미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순간 열심히 사랑하자. 후회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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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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